얼마 전 이모님이 돌아가셔서 강원도 평창에서 있었던 장례에 참석해서 외사촌들을 만났습니다. 장례에 모인 사촌들은 다 형제들이고 자매는 없습니다. 외가에 대한 대소사는 거의 빠짐없이 참석을 하는 편이라 사촌들도 모든 연락을 나에게 합니다.
어디서든 늘 좌중을 재미있게 휘두르는 여동생이 오빠들 틈에 앉아서 분위기를 이끌어갑니다. 오라버니 한 분과 남동생들과 한자리에 모여 앉았습니다. 한 동생은 얼마 전 심근경색으로 심장 스턴트를 했다며 술도 안 마시고 조용하게 앉아있고, 다른 동생들은 술이 좀 된 상태였습니다. 사촌 동생들도 이제는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들이 되었습니다. 사촌동생이라 그렇지 만약에 다른 일에 만났으면 깍듯이 어른 대접을 해야 할 나이들이 되었습니다. 고향을 지키고 사는 사촌들은 대부분 농토를 물려받아 농사를 짓습니다. 강원도 산골이라 전에는 밭농사를 주로 지었지만 최근엔 사과나무를 심어서 수확을 한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특용작물을 해서 수익을 올려서 농촌 살림 톡톡해 보입니다. 사촌들과는 어릴 때는 같이 놀았지만 우리가 고향을 떠난 후부터는 자주 만나지 못했습니다. 전에는 사촌 동생들을 대소사에서 만나면 “누님 오셨습니까.” 인사 한마디면 끝이었습니다. 가까이 오지도 않고 멀리 떨어져 있곤 했는데 이젠 서로 나이가 드니 같은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꽃을 피웠습니다.
사촌 남동생은 어릴 때 들로 산으로 놀러 갈 때가 많아서 공부는 뒷전이었습니다. 학교를 안 가면 집안일을 거들어야 하니까 일단 책보를 들고 집을 나갑니다. 마당 끝에 마구간이 있었는데 송아지 공부하라고 그랬는지 책보를 마구간에 던져놓고 온종일 놀다가 친구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되면 동생도 슬그머니 책보를 찾아 들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던 동생도 만났습니다. 동생의 얼굴이 빨갛기에 술을 먹어서 그런 가 했더니 평창 올림픽에 참가해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얼굴이 찬바람에 노출되어 얼어서 빨갛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진데 안 해도 되지 않느냐고 했더니 자원봉사하는 재미가 좋다고 했습니다.
강원도 억양으로 느릿한 말투로 “누님 픽처하고 포토하고 같은 말이래요? 외국선수가 지나가면서 픽처 픽처 하기에 무슨 말인가 했는데 휴대폰을 들고 자기랑 같이 사진을 찍자고 그러는 거더라고요. 포토 이러면 잘 알아들을 탠데, 하하하 제가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안 한 표가 나더라니까요.” 이러며 우리를 웃겼습니다. 마음씨 좋게 생긴 한국 할아버지가 자원봉사를 하니까 기념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외국선수들이 많았나 봅니다. 인기가 좋았답니다.
장례식에서는 회다지 소리를 선창하며 장례식 분위기를 좋게 했습니다.
회다지 소리는 장례를 치를 때 관을 묻고 난 후 땅을 단단하게 밟아주면서 부르는 노래를 말합니다. 상주의 슬픔을 달래주고, 무덤 만드는 사람들의 흥을 돋게 하기 위해서 하는 노래를 능청스럽게 잘 했습니다. 회다지꾼들이 회 작대기를 바꾸어 쥐면서 회를 다지며 돌아가는데 형님 누님을 부르기에 가 보니 작대기에 팁을 꼽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잘 밟는다고 상주들을 우려내는데 회다지기 꾼들이 다 동네 친구인 듯했습니다. 회다지기가 막바지에 이르자 회다지꾼과 일꾼이 한데 어울려 큰 율동과 함께 “에헤라 달회”를 우렁차게 부르며 회다지를 마무리하는데 그게 그렇게 보기 좋더군요. 보기 좋다는 말이 좀 모순되긴 합니다. 천둥벌거숭이 같던 모습이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데 결혼해서 애 낳아 아버지가 되더니 손자를 둔 할아버지들이 되어 장례식을 이끄는 모습은 타임머신을 타고 날라온 것 같이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부르나니 어머니요/찾는 게 냉수로다/ 일가친척 많다 한들/
어느 누가 대신 가며/ 자식들이 많다 한들/어느 자식 대신 가랴/
좌청룡 우백호와/ 삼강이 둘렀으니/ 천하 대지가 분명하다/
장례문화가 바뀌어 상여도 보기 힘들고, 회다지소리 달구소리도 듣기 어려운데 이모님 장례식에 사촌동생의 목소리로 들었습니다. 그것도 노인이 된 사촌동생의 육성으로 듣자니 마음이 참 이상했습니다. 어릴 때 할아버지들이 하던 일들을 내 대에 사촌동생들이 물려받아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화다지꾼들에게 막걸리 한사발씩 들이키게 하고 다시 회다지 하는 모습이 공연장에서 하는 유명한 공연보다 보기 좋았습니다.
평생 고향에서 살아가는 동생들의 삶이 행복해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