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 이야기 이어집니다.

90년쯤 전 일제 강점기 때 강원도 산골에는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먹거나 풀을 뜯어 죽을 쑤어 끼니를 때울 정도로 먹을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약이나 의료혜택은 꿈도 못 꿀 환경에서 자녀를 낳아서 길렀습니다. 할머니는 아기를 사산하기도 하고 조금 자라다 병들어 죽는 등 자녀를 다 잃고 실의에 빠졌습니다. 딱 아들 한 명 남았는데 열병이 들어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이 아들마저 잃으면 할머니는 살 희망이 없어서 아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 동네 용하다는 무당에게 점을 봤습니다. 조상 중에 어떤 분이 나무하러 갔다가 산에서 죽어, 저세상을 못 가서 해코지를 하는 거라며, 산속 깊은 곳 큰 바위 밑에 떡을 해가지고 가서 치성을 드리라고 했답니다.

밤이 되면 호롱 불을 겨우 켜는 산골에서 달빛이나 별빛 외엔 밤길을 밝힐 무엇이 없는데 산속 깊숙이 들어가서 죽은 원혼을 달래라니 보통 담력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개 짖는 소리와 닭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은 깊은 산중에 들어가 빌고 오라고 하는데 할머니는 자식을 살려만 준다면 못할 일이 없더랍니다. 늑대나 여우 호랑이 같은 산짐승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얘기를 흔히 듣는 그 시절에 한밤중에 깊은 산중으로 여인을 보내 빌라고 하는 무속인이나, 아들을 살리려고 그믐밤 산속으로 들어가는 할머니나 믿고 따를 게 없어서 그랬을 것 같습니다.
어찌 되었든 열병을 앓고 있는 아들을 살리려고 할머니는 무속인의 지시에 따랐습니다. 짐승의 울음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인가가 없는 깊은 골짜기에 가서 아들의 생명을 지켜달라고 큰 바위 아래서 간절히 빌었답니다. 나무하다 떨어져 죽은 조상이 누군지 모르지만 내 아들에게 해코지하지 말고 떠나라고 빌다가 소리까지 질렀답니다.

그렇게 산에 가서 빌고 집에 와 아들을 들여다봐도 도저히 살 것 같지 않았습니다. 아들을 못 살리면 나도 죽어야지 하고 툇마루에 걸터앉아 넋을 놓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마당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분은 자녀를 낳지 못해 시집에서 쫓겨나 떠돌다가 외국인 선교사 집에서 청소와 빨래 같은 일을 해주고 사는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그 당시 선교사가 강원도 산골에도 있었다는 게 믿기 어려워서 찾아보니 1908년도에 평창감리교회를 호주선교사가 시작했더군요.) 아주머니는 넋을 놓고 앉아있는 할머니께 다가와 손을 잡고 위로 하면서 예수를 믿자고 하더랍니다. 저잣거리에서 전도하는 그 여자를 봤을 때 저 불쌍한 여자가 예수교에 미쳤다.”라고 생각했는데 웬일인지 그 여자 말이 반갑더랍니다. 다른 귀신에게 빌어봤자 소용이 없고 신중에 가장 높으신 대장 예수귀신을 믿으면 아들이 나을 수 있다고 하는 말에 할머니는 귀가 번쩍 뜨였다고 합니다.

조왕신 지신 칠성신 터주신 조상신 등등 수많은 신이 발에 채서 걸음도 맘 놓고 옮기지 못하던 시절입니다. 남들은 말하기 쉬우니까 별별 방책을 다 알려주었습니다. 삼신이 탈이 나서 그렇다고, 삼신할미에게 빌라고 하는데, 삼신할미는 물론 알고 있는 모든 신에게 빌었지만 아무런 효험이 없었습니다. 아들은 죽게 생겼는데 귀신 중에도 대장 귀신이 있다니 할머니는 그 시로 예수를 영접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할머니는 “아들만 살릴 수 있다”면 못 할 일이 없었던 겁니다.

할머니가 예수를 영접하고 아주머니가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방에서 물~ 하는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버지는 조금씩 기운을 차리기 시작하여 살아났습니다. 그 후 할머니는 물론 아버지도 예수를 잘 믿었습니다. 내가 기독교인인 이유입니다.

저의 할머니가 예수를 믿은 건 딱 한 명 있는 아들의 목숨을 귀신의 작해로 부터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신앙이 3대째라 귀신 걱정은 안 합니다.

1 Comment

  1. 데레사

    2018-03-22 at 12:03

    소나무껍질로 만든 송기떡, 먹고나면 변보기가 얼마나 힘들던지….
    그 어려운 시절을 딛고 살아왔는데 살만해지니 나이도 많아지고
    몸은 여기저기 고장이 나기 시작하네요.

    저희는 어릴때 구세군을 다녔는데 저를 낳고 쌀이 없어 산모인
    엄마가 굶고 있는데 교회에서 쌀을 가져다 주었답니다. 그 계기로
    우리 부모님과 어린 나는 구세군 신자가 되었지요.

    나중에 카톨릭이 된건 남편이 병났을때 성당분들이 너무 잘 돌보아
    주어서 같이 영세를 받았습니다.
    종교라는게 큰 신앙적인 의미보다 이런 사소한 개인적인 감동으로
    믿게 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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