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원 벚꽃구경이 로망

사진 밑에 나와 있는 시간을 보니 76년 4월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22살 되던 봄입니다.
할머니
40여년 전 할머니를 모시고 창경원에서

오라버니와 내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면서부터 할머니께 창경원을 구경시켜드리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라버니도 학생이고 버스비가 없을 때가 있을 정도로 여유 없는 생활이라 할머니를 모시지 못하다가 어렵게 여비를 마련하여 강원도에 계신 할머니를 서울구경을 시켜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서울 창경원을 (지금의 창경궁)구경하는 것이 시골 사는 사람들의 로망이었습니다.

평생 시골에서 사셨던 분이라 차를 오래 타는 것도 힘들고 기력도 없으시고 숨이 차하셔서, 더 미루다 보면 할머니가 서울 구경을 못하고 돌아가실 것 같았습니다. 사진 속 할머니 연세가 75세입니다. 조그만 할머니가 깡똥한 치마를 입으시고 하얀 코 고무신을 신고 서울 나들이를 오셨습니다. 벚꽃이 반쯤은 지고 반쯤은 남아 있네요. 뒤로는 건축 중인 서울대학병원 건물이 보입니다. 할머니는 창경원 벚꽃 구경을 하신 다음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다녀가시지 못했으면 오라버니나 저에게 큰 회한으로 남을 뻔했습니다.

우리 할머니!
손주 사랑이 참으로 지극하셨습니다.
오라버니는 장손이라고 저는 큰손녀라고 동생들 보다 더 아끼고 챙겨주셨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감자 반 알도 아끼시면서 저에겐 보리밥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할머니 친정아버님이 약국을 하셨고 할머니 남동생이 이어서 약국을 해서 부자 친정을 두신 할머니는 동생 약국에 가서 인삼을 얻어 와서 봄가을로 우리 형제를 먹이셨습니다.

할머니께서 이웃들의 회갑 집에 다녀오시며 손수건에 꼭꼭 싸다 주시던 사탕이나 대추 등을 가져다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릴 땐 평균수명이 짧아서 60을 살아도 오래 살았다고, 회갑잔치를 크게 벌리고 동내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할머니는 그런 곳에 그런 곳에 식사 초대를 받아 가서도 음식 한 끼를 편히 드시지 못하고 당신 몫으로 나온 음식을 손수건에 싸다가 어린 저희들을 먹이시곤 했습니다.
색색으로 물들인 잔치 때나 제사상에 오르는 동그란 사탕
프랑스 국기같이 생긴 젤리
부서진 유과, 대추 한 알, 밤 한 톨, 부침개 한쪽,
그런 것이 맛있기는 왜 그리 맛이 있었는지요…….

제비 새끼처럼 받아먹는 우리를 보는 할머니의 눈빛을 지금껏 잊지 못합니다.
바라만 보고 계시는 할머니께 우리가 묻습니다.
“할머니는 안 먹어?”
“할머니는 잔칫집에서 많이 먹었어! 우리 강아지들 어여 먹어!”

할머니께서 어디 다녀오시면
할머니도 반갑지만 그 손에 들려진 손수건이 늘 관심의 대상이지요.
사립문에 할머니 들어오시는 것이 보이면
놀다가도 집어던지고 할머니께 달려갑니다.
“할머니! 할머니! 어디 갔다 와?”
“어이구 내 강생이 잘 놀았어?”
할머니는 주인에게 덤비는 강아지 같은 모습의 우리를
강생이라고 부르셨습니다.

할머니의 사진 보니 어릴 때 생각이 끝도 없이 떠오르고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살던 어린 시절이 그립기만 합니다.

layout 2018-4-10

1 Comment

  1. 데레사

    2018-04-10 at 20:22

    할아버지는 담배주머니에다 사탕같은걸 넣어
    오셨어요. 지금생각해 보면 분명 담배냄새가
    났을텐데도 잘도 먹었지요
    아버지 나뭇지게에 매달려 오던 진달래 꽃방망이도
    훌륭한 간식이었지요.

    정말 그리운 그 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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