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시

 

글쓰기 교실에서 유언 시 쓰기가 있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유언 시를 어떻게 쓰나 궁금해서 자세히 읽어 봤습니다.

장애가 있는 어떤 분은 몸이 불편해서 받았던 친절한 모든 이웃들을 논두렁 같은 곳에 지천으로 피던 자운영 꽃에 비교했더군요. 이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호의에 감사한 맘으로 먼저 가서 자운영 꽃씨를 뿌려놓겠다며 자운영 꽃길로 먼 훗날 오라고 해서 감동했습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 남편에게 전하는 부탁의 말, 가까운 사람들에게 미안했다는 말, 용서를 해 달라는 말 등등 미리 쓰는 유언 시지만 막상 죽음을 생각하며 쓴 글이라 읽는 사람도 울컥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읽고 듣는 사람도 마음이 처연해지기도 했습니다.

톨스토이

대문호 톨스토이 묘

아동문학가 권정생 작가의 유언 시는 이렇게 쓰셨더군요.

한 인간과 하늘이 동시에 울부짖었다. (권정생)

<인간>

70년을 살았지만

아직 양복도 못 입어보고

넥타이도 못 매보고

장가도 못 가보고

약혼도 한번 못해 봤습니다.

돈가스도 못 먹어보고

피자도 못 먹어 봤습니다.

억울합니다!

 

<하늘>

겨우 70년 살아보고 그러냐

나는 7백억 년을 살았지만

아직 장가도 못 가보고

돈가스도 못 먹어보고

피자는커녕 미숫가루도 못 먹어봤다.

이 꼰대기 같은 놈아!

 

나는 무어라고 쓸까 심각하게 생각해 봤는데 할 말이 별로 없었습니다.

재정 관리나 아이 키우는 일, 사랑하며 사는 일, 가족애 등은 나보다 딸들이 훨씬 지혜 있고 모든 면에서 나보다 나아서 생활 전반에 걸쳐 조언할 것은 없습니다. 나이 든 사람이 현명하고 잘 살 것 같지만 나는 늘 지혜가 부족하고 용기도 의지도 없고 수줍고 조용하게만 살아와서 딸들에게 엄마처럼 살면 안 된다는 말은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잔소리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 알게 되니까요.

그러니 딸들에 대한 어떤 말보다 내 삶이나 잘 정리하고 가면 됩니다. 그래서 내가 의식이 없을 때를 대비해서 딸에게 이런 당부의 말을 썼습니다.

사전의료 의향서입니다.

 

잠 (최수니)

나의 삶을 의미 있고 충만하게 했던 딸아

이제는 금방이라도 엄마가 긴 잠에 들어도 아무 문제가 없지?

엄마는 잠잘 때가 충분히 되었어!

엄마 잠 많은 거 알지?

잠들었을 때 깨우면 싫어하는 것도?

엄마는 잠 안 자고 하고 싶은 일은 평생에 없었어.

이제는 푹 잘래.

 

오랜 잠을 자기 전에

엄마에게 고통이 있더라도

생명 연장을 위한

어떤 의료 행위도 못하게 해 줘

내가 의지가 있다면 알아서 선택하겠지만

너희가 선택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단호하게 말해

“우리 엄마를 깨우면 안 된다.”라고

 

마음 약한 딸에게 이런 선택의 시간이 없기를 원하지만

만약의 경우를 위해 이 글을 써

 

이제는 내가 영원한 잠을 잔다고 해도 주변에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반추해 보는 것조차도 귀찮아서 생각을 안 하는데 사후 세계가 어떨지, 내가 죽고 난 후에 내 딸들의 삶에 어떤 말을 남길지 이런 것은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 같고

혹시 내가 의식 없이 생명유지 장치에 의지해 무의미한 삶이 연장될까 봐 그 부분이 염려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라도 의식이 없으면 그냥 그대로 잠들게 해 달라는 유언 시를 남겼습니다. ^^

 

1 Comment

  1. 데레사

    2018-06-25 at 08:47

    나도 한번 지어봐야 겠어요.
    죽는다는것 생각하면 아직도 무서움에서 못 벗어나서
    이런 글 쓴다는것 생각도 못했거든요.
    이제 내년이면 팔십인데 우물쭈물 해서는 안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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