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세탁실에 빨래를 넣으러 갔다가  감자가 담긴 봉투를 발견했습니다.
베란다에 두고 잊었다가 갑자기 감자부침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자가 어찌나 큰지 내 주먹만 했고 껍질이 하얗고 고급지게 생겼습니다. 감자가 고급지게 생겼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시겠지만 설명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어릴 때 이런 여름날에는 감자 껍질을 벗겨야 했습니다. 감자나 옥수수를 삶아 식구들이 끼니를 이어가야 하던 때입니다. 어른들은 일하러 가고 나는 집에 남아 긴 여름날 오후 내내 물에 불린 감자 함지를 끼고 쪼그려 앉아 일을 합니다.
“감자숟가락”으로 불리던 감자 긁는 숟가락이 기억나는 분이 계실 겁니다.
놋숟가락으로 감자를 오래 벗기다 보면 숟가락 끝이 닳아 반달 모양이 됩니다.
식구가 많아 감자를 삶아 한 끼를 이으려고 해도 커다란 오지 함지에 가득 닮긴 감자의 껍질을 긁어야 합니다. 감자가 상한 부분이 없고 굵고 상품 가치가 있는 것은 골라서 팔아야 했고 집안 식구들이 먹는 것은 호두알만 하거나 완두 콩만 한 크기의 것들과 캘 때 호미에 찍힌 상처가 있든가 햇빛을 봐서 파란색을 띤 하찔 감자입니다. 그런 것은 껍질도 잘 벗겨지지 않고 일거리만 많은데  물에 불려 두었다 하면 그나마 껍질 벗기기가 좀 수월합니다.

더운 여름날 뒤란에서 종일토록 감자를 까다 보면 그 양이 천천히 줄어들어 지루하기만 합니다. 왼손에는 감자, 오른손에는 숟가락을 들고 멍하니 수돗가에 핀 백일홍을 쳐다보다가 나리꽃을 또 한참 바라보고 앉아있다 보면 일은 더디기만 합니다. 나리꽃이 나를 보고 있기에 말을 걸어 봅니다나리야~ 구경만 하지 말고 와서 도와주면 안 되겠니?” 나리는 못 들은 척 그 자리에 서있고 감자가 담긴 오지 그릇이 바다만 해 보입니다조그만 손에는 감자 물이 까맣게 들었고, 손으로도 잡기 어려운 감자알은 미끈거려 숟가락은 감자가 아닌 내 손바닥을 긁어댑니다. 날선 반달 숟가락에 긁힌 손바닥은 벌겋게 부어오릅니다.

요즘엔 감자껍질 벗기는 기구가 있어서 힘을 가해 살짝 긁기만 하면 껍질이 얇게 벗겨집니다. 큼직하고 잘생긴 감자는 식구 수대로 다섯 개만 벗기면 됩니다. 호두알만 한 감자를 종일 벗기던 때를 생각하면 일도 아닙니다. 주방 바닥에 주저앉아 껍질 벗긴 감자를 강판에 큰 힘 안 들이고 쓱쓱 밀어내자 뽀얀 감자 즙이 생겼습니다. 거기에 소금으로만 간을 해서 프라이팬에 노릇하게 구워냈더니 아이들이 무척 잘 먹습니다
할머니 맛있어요.”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높이 치켜들기도 하며 맛있게 먹는 아이들 모습을 보니  마냥 뿌듯했습니다.
나는 우리 한이 나이만 할 때도 감자 껍질 벗기는 일을 해야 입에 밥이 들어갔는데, 지금 7살짜리 우리 한이가 얼마나 아기인지! 내가 저 나이 때 감자 껍질을 벗겼다는 것이 스스로 믿기지 않았습니다.
프라이팬에 구워낸 부침개가 혹 뜨거울까 식혀가며 입에 넣어주다가 어린 날 내 모습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가난했던 시절에는 한 끼 식사를 이어 가느라 억지로 먹던 감자였지만 이제는 근사하고 귀한 건강식 요리(!)입니다.

1 Comment

  1. 데레사

    2018-07-29 at 00:31

    나도 자주감자 껍질 벗기던 일이 지긋지긋
    합니다. 숟가락도 쓰고 전복껍질도
    사용했지요.
    요즘 아이들에게 그 일시키면 아동학대라
    할겁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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