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행이나 기적이 간절히 필요할 때

제가 고등학교 땐데 다른 식구들은 서울로 이사를 갔고 고3과 중3이었던 나와 동생만 강릉에 남아있었습니다. 전학보다는 다니던 학교를 마치고 서울 상급학교로 진학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3학년 2학기 등록금이 밀려 여러 번 재촉을 받았고 아버지도 알고 계셨지만 등록금을 쉬 보내주시지 못하셨습니다. 교납금이 밀린 사람은 기말시험을 못 보게 한다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찌 되었든 졸업은 해야 하는데 시험을 못 보면 진학을 포기해야 합니다. 아버지 형편을 아는데 조르는 것이 죄송해서 미적거리고 있다가 아버지께 교납금을 보내 달라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를 보낸 지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 선생님이 저를 불렀습니다. 교무실에 갔더니 반가운 아버지 필체의 편지봉투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편지를 가지고 교무실을 나오려고 하자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편지를 뜯어보라고 했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봉투 끝을 찢어서 아버지 편지를 꺼냈습니다.
수니야!로 시작하는 편지에는 어린 네가 고생이 많다는 위로의 말씀과 등록금이 늦어서 미안하다 시며 동생 것까지 교납금을 내고 나머지는 생활비로 쓰라며 5000원을 동봉한다고 했습니다. 두 장의 편지 사이에도 5000원 권은 없었고 편지봉투  벌려 다시 들여다봤지만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시험을 볼 수 있도록 어렵게 마련한 돈을 편지봉투에 넣어서 학교로 부쳤는데 사라진 것입니다. 5000원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정신이 아득해졌고 눈에서는 눈물이 툭 떨어졌습니다.
담임선생님은 내 손에 있던 편지를 가져가 읽어 보시더니
“돈을 편지 속에 넣어서 보내면 안 되는데……..”라고 하시며 혀를 찼습니다. 선생님은 우는 나를 교무실에 앉아 있으라고 하고, 아버지 편지와 봉투를 한 손에 거머쥐고 교무실을 나갔습니다. 우편물을 최초로 수령한 서무과에서부터 조사를 하고 다녔지만 돈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편지 봉투를 자세히 들여다보시더니 봉투 아랫부분을 뜯었다 다시 붙인 흔적을 발견하셨습니다.

5000 (1)  1973년도 5000원권

1973년도 5000원은 거액입니다. 서울시내버스비가 12원, 자장면이 한 그릇에 30원 할 때입니다. 그러니 지금 시세로 치면 어림잡아 100만 원 상당의 돈입니다.
지금도 백만 원은 큰돈인데 아버지께서 어렵게 마련해 보낸 돈이 사라졌으니 대책이 서지 않았습니다.
요즘이야 카톡으로도 돈을 주고받는 시대이니 편지봉투 속에 현금을 넣어 보낸다는 일이 믿기지 않을 겁니다. 그 당시 현금을 편지 봉투에 직접 넣어 보내는 것이 위법인 줄 알면서도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딸의 등록금을 제때 내지 못하면 중요한 기말고사를 못 볼 정도로 시일이 촉박하고, 전신환 수수료도 아깝고, 전신환으로 받으면 그걸 바꾸러 우체국까지 가야 하는데 수업을 빠져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고 하니까 여러 생각 끝에 현금을 넣어서 보내신 것입니다.

500 (1)

오백원도 상당한 위엄이 있을때입니다. (지금 5만원권 정도의 가치)

등록금도 못 내고 없어진 돈도 아깝지만 서무과 사람들과 선생님들이 한결같이 아버지의 부주의함을 탓했습니다.
편지 봉투에 돈을 넣는 사람이 어디 있냐? 그건 누구 가져가라고 하는 거지.
아버지가 진짜 돈을 넣은 것은 맞나?
전신환으로 바꿔서 보내는 것을 몰랐나?
이런 경우는 아버지가 잘 못한 거라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어,
돈은 사라지고 없는데 내 아버지까지 무식한 사람 취급을 하면서 모욕하는 것을 듣는 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수업을 제대로 못 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오는데 혹시 사라진 돈을 길에서 주을 수 있을까 해서 길바닥만 내려다보며 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5000원짜리 한 장을 내 앞에 떨궈 주실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하면서요. ^^
우체부 아저씨가 돈을 발견하고 꺼내어 두셨다가 다른 봉투에 넣어 가져다주시지 않을까?
키다리 아저씨가(동화를 읽은 탓)  내 책상 위에 교납금 하라고 가져다 놓았을 거야.
그러나 사라진 5000원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5000원은 내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액수였습니다.

5000원의 요행이나 기적을 간절히 바라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3 Comments

  1. 윤정연

    2018-08-11 at 13:40

    그래서 끝내 요행도 기적도 없었군요…가난했지만 그런 부모님 덕분에 7남매가 모두 대학을 다녔겠지요 목사님,약사님,교수님… 보통 아버지들은 이겨내지 못하셨을것이고 또한 자녀분들도 힘들어 포기할수도 있었겠지만…
    참 휼륭하신 부모님두신 수니님!!!
    어머님도 건강하시니 좋으시고
    항상 행복하세요~~^^

  2. 데레사

    2018-08-11 at 17:34

    그 시절은 그랬지요.
    나도 수업료 못내서 쫓겨나기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돈은 못 찾으셨지요?

  3. 김 수남

    2018-08-12 at 12:12

    언니! 정말 가슴 찡하고 눈물이 나려해요.저도 시골서 공부는 잘했는데(계속 반장도하고요)대학 갈 때는 우리들이 알아서 가야했기에 장학금 제일 많이 주는 학교를 선택해야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 길이 오히려 지금 저를 있게 한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셨음임을 늘 감사합니다.이름 있는 좋은 학교 갔으면 아마 지금처럼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매일 주어진 삶의 그 날 그 날 최선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체험하며 감사합니다.정말 누군지 모르지만 그 때 그 5000원! 가져 간 사람 회개하고 예수님 잘 믿고 천국가시길 기도합니다.

    언니데 형제 분들도 정말 모두 참으로 장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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