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한 부자

포목상을 하던 아버지 친척 형님이 계셨습니다.
포목상을 지금으로 말하면 주단집인데 기성복이 발달하지 않아서 천을 끊어다가 집에서 옷을 만들어 입어야 하던 시절이라 포목점을 운영한다고 하면 사는 것이 넉넉했습니다. 60년대에는 동내에서 정미소나 양조장, 포목점을 하면 부자였고 실제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형제가 한 분도 없는 독자 시라 친척 형님을 가장 가까운 혈육으로 여겨서 명절 때가 되면 인사를 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부자인 아저씨는 아주 인색한 분이셨습니다. 어린 나로서는 그분에 대해 정말 이해 못 할 부분이 많았습니다. 크리스마스 동화 스크루지 영감이나 베니스 상인을 읽으면서 아저씨가 모델이 아닐까 혼자 생각했습니다. 샤일록 같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형광등을 환하게 켜 놓은 점포에 색색의 고운 천들이 필로 말려 세워지거나 차곡차곡 개켜 있는데 옷감에서 나는 냄새가 향긋해서 기분조차 밝아지는 듯한데 포목점 주인인 아저씨를 만나면 그 기분을 망치게 됩니다.
요즘엔 장사가 통 안돼, 작년에 반도 안 팔려
불경기가 심하네. 이러다간 장사 문 닫아야 할 것 같아
매년 볼 때마다 장사는 작년에 반도 안 된다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사셨고 불경기라고 규정지으시지만 내가 보기엔 날이 갈수록 물건이 많아지고 점포는 휘황해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한 번도 엄살을 안 부리는 것을 본 적이 없고 실제로도 얼굴은 늘 어둡고 쪼들려 보였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마음이 약하고 여린 분이라 형님의 그 말씀을 들으면 진심으로 걱정을 했습니다.
형님! 장사가 안돼 걱정이네요. 이렇게 큰 점포를 유지하시려면 손님이 많아야 하는데, 도와드릴 방법도 없고.” 가난하지만, 선비 같은 품위를 지키고 살았던 우리 아버지는 그분에게 가서 손을 내밀거나 돈을 빌린 적이 없는데도 아저씨는 우리 집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알아서 미리 장사가 안된다고 엄살을 부렸습니다.
 

내가 중학교 때 가정 시간 실습을 위해 옷감 천이 필요해서 간 적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지정해 준 몇몇 가게에 아저씨네 가게도 명단에 있었기 때문에 기왕이면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아저씨는 나에게 인사만 받고 등을 보이고 돌아서 계시고 아주머니는 돈을 받아야 할까 깎아 줘야 하나 고민을 하는 눈치입니다. 나는 실습에 필요한 천이 얼마인지 이미 알고 있는 터라 준비해 가지고 간 돈을 내었더니 아주머니가 곤란해하면서 돈을 뭘 받니, 그냥 가지고 가라.”라며 돈을 나에게 도로 주자 아저씨가 돌아선 채로 헛기침을 두어 번 했습니다. 아주머니는 내 눈치를 보면서 어색한 손길로 돈을 챙겨 손금고에 넣었습니다. 아저씨는 손금고를 여닫을 때 나는 또로 롱 소리를 듣고 돌아서서 나에게 잘 가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아저씨는 돈을 알뜰히 모아 시장에서 이자놀이를 하셨답니다. 사채업을 그때는 왜 놀이라고 이름 붙였는지 지금도 궁금합니다. 시장 상인을 상대로 고리의 이자를 받는 일을 일수놀이 사채놀이라고 했거든요. 자본가인 아저씨는 이웃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늘려 가는 재미가 놀이처럼 쏠쏠하긴 했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저씨가 갑작스럽게 뇌중풍을 맞았습니다. 뇌졸중이라는 것이 예고하고 오는 일이 아니니 그 가정엔 갑자기 들이닥친 불행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작은 장터에 회오리바람처럼 소문을 만들어 가는데 인심을 못 얻고 돈놀이를 하셨던 분이라 그 끝이 비참했습니다.
아저씨는 심한 뇌출혈로 의식을 잃어서 유언 한마디 못하고 3일 후에 돌아가셨는데 시장 상인들이 빌려 간 돈을 아무도 안 갚는다고 했습니다. 아저씨는 누가 알까 봐 장부 같은 것은 만들지도 않았고 거래 내역은 빌려 간 분과 아저씨 머릿속에만 있어서 돌아가시고 나자 누구도 빌린 돈을 갚으려고 하지 않더랍니다. 아저씨는 돈의 내역에 대해서는 아내에게도 비밀이라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빚을 갚으러 오는 분은 없고 오히려 돌아가신 분께 돈을 빌려줬다고 받으러 오는 사람들만 줄을 잇더라고 했습니다.
그게 세상인심이라 빌려준 많은 돈은 다 떼이고 포목점은 큰아들이 물려받아서 했는데 어느 해 추석 전에 시장에 화재가 나서 다 태우고 그야말로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아저씨가 우리 아버지를 박대한 생각을 하면 조금도 정이 안 가는 집안이지만 그래도 어려움에 처했다고 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있을 때 가치 있게 돈을 쓸 수 있는 것이 정말 어려운 문제인데 빌 게이츠가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한 연설이 얼마나 훌륭한지 읽으면서 새삼 감탄했습니다. 세계 제일의 갑부가 사회에 봉사하는 자세가 너무도 대단합니다.
중국의 마윈은 아시아 최대 자산가인데 54번째 생일을 맞는 910일 알리바바의 회장직에서 물러나 교육을 통한 자선 활동에 나설 것이라고 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웃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데 말입니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8-09-11 at 17:01

    그 아저씨 같은분 주변에 더러 있어요.
    대부분 써보지도 못하고 비참하게 돌아
    기시더라구요.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어요.

  2. 윤정연

    2018-09-13 at 10:00

    좀 넉넉히 살면서 배풀줄도 알면
    배니스 상인 같은 동화도 없었겠지요…항상보면 돈만쌓아놓고 쓰지도 못하고 죽는사람 많다지요…특히 일본도 노인들은 부잔데도 아끼다 그냥~~
    그런소리 들으면 안타깝지요~~
    하긴 본인의 뜻이니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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