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색 한복
주말에 조카 결혼예식이 대구에서 있었습니다.
큰딸 결혼식에 입었던 한복을 어머니와 똑같이 입고 결혼식장에 가자, 보는 사람마다 “어머니께서 연세 가 있으신데 곱다.”고 부러워했습니다. 거기다 모녀가 유니폼처럼 분홍색 한복을 똑같이 입으니까 눈에 띄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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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복은 9년 전 큰딸 결혼식에 입었던 옷인데 가끔 친정 행사에 꺼내 입습니다.
결혼식에 신부 엄마는 분홍색 한복을 입고 신랑 측에선 파란색 한복을 입는다고 해서 맞췄던 한복입니다. 나는 딸 친정엄마니까 당연히 분홍색 한복을 입어야 했고 이왕 하는 김에 외할머니도 분홍색으로 한 벌 해 드리자는 생각에 고르다가 특별한 디자인을 못 고르겠기에 그냥 같은 것으로 했던 것인데 지금 와 생각하니 잘한 것 같습니다. 연세 드실수록 고운 색 옷을 입는 것이 유리한 것 같습니다.
분홍색 한복을 입은 어머니가 연세에 비교해 고와 보이지만 속 사정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외사촌 오라버니가 우리 집안일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데 조카 결혼식에도 오셨습니다. 결혼식 새벽에 예상치 못했던 10월 태풍이 남해안에 상륙하여 전국적으로 비바람이 엄청났습니다. 우리야 당연히 가야 할 자리라 비바람을 뚫고 새벽에 출발해서 빗속을 달려갔지만, 사촌 오라버니는 비 때문에 못 온다고 전화 한 통화 면 그러라고 할 만큼 날씨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 날씨에도 비바람을 맞으며 빗속을 달려 기어이 오셨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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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사촌 오라버니를 어머니는 친정 장조카라 특별히 귀애하는 분입니다. 외사촌 오라버니는 어머니를 뵙자 두 손을 덥석 잡으면서 “고모!” 하고 큰 소리로 부르며 반가워하는데 어머니는 누가 나를 이렇게 반가워하나 모르셔서 어리둥절한 표정입니다. 내가 옆에서 “엄마 친정 조카잖아. 용이 오빠!”라고 설명하자 그제야 어머니는 “으응~ 그래 잘 있나?”라며 얼버무리는데 선명한 기억이 없는 듯했습니다.
오라버니는 어머니 뒷좌석에 앉더니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우리 똑똑한 고모님도 연세가 드니 어쩔 수 없구나…….”라며 탄식하듯 중얼거렸습니다.
유난히 챙기던 친정 장조카도 드문드문 만나다 보니 기억 속에서 지워졌나 봅니다. 그래도 자주 보는 자녀들은 잊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요양병원에서 입원환자분들을 보면 인지저하 어르신들이 끝까지 기억하는 사람은 자녀이고 그중에서도 장남을 가장 마지막까지 기억하시더군요.
예식과 식사를 마치고 친정 조카를 기억하지 못하는 고모 때문에 눈물을 쏟은 오라버니와 여러 형제들이 둘러앉았을 땝니다.
막네 남동생이 사촌 오라버니를 “형님”이라 부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본 중학교 다니는 막냇동생 아들이 의아한 듯이 묻습니다.
“아빠에게 형님이면 우리는 큰아빠라고 불러야 해요?”
아빠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분은 자기들의 큰아빠라고 알고 있었으니까요.
막냇동생은 가만히 있고 외사촌 오라버니가 여러 말로 아이가 알아들 을 수 있도록 설명을 했습니다.” 나는 너에게 오촌 아저씨가 된단다. 오촌이 먼 게 아니야. 너는 한이 엄마와 사촌 간이고 한이에게 네가 오촌 아저씨가 되는 거야.” 딱 형이라고 부르면 맞을 것 같은데  촌수로는   아저씨가 되는 것이 늘 마땅치 않던 아이였지만 오촌 아저씨가 가까운 친척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 같았습니다. 외사촌 오라버니가 촌수를 따져 설명하는 것을 보면서 기시감이 느껴졌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도 우리가 어릴 때 저런 방법으로 촌수를 따져 설명해 주셨거든요.
어린 조카들에게 촌수를 따져 관계를 설명하고, 고모의 인지가 떨어진 모습을 보며 눈물을 쏟는 오라버니를 보면서 우리 세대의 나이 듦이 느껴져서 잠시 슬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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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주인 오라버니는 몹시 즐거워 보였습니다.
서른다섯 딸을 짝지워주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딸을 시집보내면 친정아버지가 대부분 서운해서 운다고 하잖아요.
오라버니는 작년에 아들을 먼저 결혼시켰습니다. 동생이 먼저 결혼해서 벌써 아이 아빠가 되었는데 나이 든 누나가 밀려 있어서 근심이 많았나 봅니다. 오라버니 친구들이 축가를 부르는데 신부 아버지도 함께 부르다가 앞으로 나가 신부와 신랑을 꼭 안아주기도 했습니다.
오라버니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딸아이를 꼭 안아주고 사위 또한 안아주면서 등을 토닥여 주는 모습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군요. 감동이었습니다.
나는 결혼식장에서 신랑 신부가 양가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장면에서 매번 혼자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하곤 하는데, 조카 결혼식에서 오라버니의 모습을 보니 진한 아버지의 정이 느껴져서 더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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