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히스토리, 내일은 미스터리

근무가 없는 날에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방콕하는 것을 좋아하는 집순이입니다.

일산에서는 서울 가는 일을 먼 길 여행 가듯이 별러야 갑니다.
그러니 긴한 일이 아니면 서울 나가는 일을 되도록 만들지 않고 일산 안에서 해결하는데 친구가 삼청동에서 만나 점심을 먹자고 했습니다. 서울도 인사동이나 광화문 정도라면 좌석버스를 한 번만 타면 되니까 그런대로 갈 만한데 삼청동에서 보자고 하니 집을 나서기 전에 벌써 아득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친구에게 “나는 좀 빼 주면 안 돼?”라고 했더니
선배 언니가 수니를 꼭 데리고 나오라고 해서 참석해야 한다며, 일부러 내 근무가 없는 날로 잡았다고 합니다. 여고 다닐 때 우리는 선배님들의 엄한 규율에 따랐기 때문에 선배의 부름을 거역할 용기는 없어서 괜히 중간에 연락하는 친구만 원망했습니다.
이 친구는 성품이 서글서글하고 타고난 친화력이 좋아서 선후배 사이에서 인기도 좋고 오지랖이 넓어 누구라도 거두려고 하고 자기 시간 써 가며, 경비를 부담하며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난여름 큰 수술을 하고 나더니 그런 성향이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친구가 한가한 사람도 아닙니다.
94세 된 시어머니와 은퇴한 남편 손자 둘에 딸네 가족까지 4대가 함께 사는 집안의 안주인인데도 주변을 그렇게 챙깁니다. 혼자 사는 친구가 있는데 얘가 아플까?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면서 수시로 안부를 묻고 어쩌다 전화 연결이 안 되면 나에게까지 전화해서 그 친구 소식을 아는 게 있냐고 묻는 등 진심으로 친구와 이웃을 챙깁니다.

친구는 삼청동 길상사의 진실한 신도라 나중에 길상사 근처에 살고 싶다는 사람입니다. 삼청동을 오래 드나들다 보니 주변을 손금 보듯 속속들이 알고 있어서 맛집에 여러 번 초대받기도 했습니다. 우리를 지하철 한성대 입구역에서 픽업해 맛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선배 언니 3분과 친구와 나 5명이 만나 갈비찜과 냉면으로 점심을 먹고 커피 마시는데 장장 4시간이 걸렸습니다. 식사하는 도중 우리는 강릉으로 주문진으로 옥계로 독일로 스위스로 미국으로 이야기는 날아다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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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어제는 히스토리, 내일은 미스터리, 오늘은 선물”이라고 70세가 되신 선배님이 말씀하셔서 모두 깊은 공감을 했습니다.
“누구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뻐긴다. 쩨쩨하게 금 따위를 입에 물고 태어나다니, 나는 금강석처럼 빛나는 자연환경을 안고 태어났다. 태백산맥을 베고 누워 동해바다에 물장구치를 치며 그렇게 자랐다.”
이러시는 분이라 그분의 이야기는 한결같이 들을 만하고 재미있고 즐거웠습니다. 언니는 대부분 후배들이 하는 이야기를 흐뭇한 미소로 바라보기도 하셨습니다.
독일에 사신지 40년 가까이 되신 선배님은 연세 높은 친정어머니를 뵙고자 잠시 귀국한 길인데 이렇게 좋은 삼청동을 구경시켜주어서 고맙다고 하시며 독일에 오면 안내해 주겠다며 꼭 놀러 오라고 했습니다. 독일에 오래 사셔서 독일 여인처럼 꾸밈없이 소탈하게 독일 사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스위스에서 살다 오신 언니는 딸이 결혼해서 일산에 살고 있다고 반가워하시면서 일산에 자주 오신다며 만나자고 했습니다.
같은 캠퍼스에서 공부했다는 사실만으로 서로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만남으로 삶이 확장되어 가는데 사람 만나는 일에 게으른 내 모습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내일이 우리에게 오는 일은 미스터리 한 일이고 오늘 이 순간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과 즐거운 시간은 선물입니다. 친구는 선배 언니께도 극구 사양하는 나에게도 빵을 사서 들려주기까지 하였습니다.
오지랖이 넓은 친구 덕택에 좋은 하루를 보냈습니다. 저도 닮아야 할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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