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누구랑 하느냐에 따라 여행의 내용이 사뭇 달라집니다.
이번 북해도 여행은 동생과 함께 했는데 자매 셋이 갔을 때와 어머니를 모시고 갔을 때와도 달랐습니다. 여러 식구가 이동할 때는 훈훈함이 있었다면 여동생과 단둘이 하는 여행은 유쾌하고 북해도 공기만큼이나 상쾌했습니다. 여행이 즐겁고 경쾌한 것은 동생의 성격이 때문일 겁니다.
동생은 우리 형제 7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났고 위로 오빠와 아래로 남동생이 있어서 터프한 남자형제 사이에 끼어 자랐습니다. 힘이 센 남자형제 사이에서 자라기 위해선 주특기가 있어야 하는데 동생의 주 무기는 애교와 말이었습니다. 말을 어떻게나 잘 하는지 참새 아니면 우리 집 짹짹이로 불렸고 어지간한 상황은 애교로 모면했습니다. 나와는 12살 차이가 나는 띠 갑장입니다. 동생이 초등학교 입학할 즈음 나는 20살이어서 입학식에 어머니 대신 학부형 같은 모습을 하고 학교에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동생이 초등학교 고학년일 때 결혼을 해서 집을 떠나 나와 동생과 함께 산 기억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동생은 나를 거의 어머니와 같은 서열에 올려놓습니다.
이 여동생이 태어날 즈음 우리 집은 가난이 정점에 달할 때였습니다. 오빠는 중학생이고 나는 13살로 6학년 때 동생이 태어났습니다. 이미 5남매의 집에 자녀가 또 태어나는 것은 그다지 환영받을 일은 아니었고 이웃에서 먼저 동생을 탐했습니다. 여아가 태어나면 데리고 가겠다고 자녀가 없는 어떤 분과 어머니께서 약속을 했답니다. 그 댁에서는 여아를 꼭 키워보고 싶어 하셨고 부잣집이라 우리 집에 있는 것보다 귀하게 길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우리 부모님은 허락을 하신 것 같습니다.
동생이 태어난 지 한 달이나 지났을까?
동생이 4월에 태어났으니까 5월 즈음인데 학교에서 일찍 돌아오다 보니 우리 집에서 여자분 두 명이 예쁜 포대기에 아이를 싸안고 나오다가 나를 보자 화들짝 놀라면서 골목 밖으로 뛰어갔습니다. 나는 집안으로 바삐 들어가 아기가 누웠던 장소를 봤는데 비어있고 어머니는 울고 계셨습니다. 그길로 뛰어나가 동생을 안고 가는 아주머니에게서 아기를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내 동생인데 왜 데려가느냐고 울고 난리를 쳤더니 아주머니가 창피했던지 가던 길을 돌려 집으로 왔습니다. 내가 큰소리로 울자 아기도 포대기 속에서 놀라 울었습니다. 어머니도 울고 나도 아기를 끌어안고 몸부림치며 울고 아기는 놀라서 우는 아주 슬픈 광경이었겠지요. 아주머니는 나를 다독이면서 “아기를 예쁜 옷을 입히고 맛있는 것 많이 먹여서 잘 길러주겠다.”라고 나를 설득했지만 나는 무조건 안 된다고 울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어쩔 수 없이 “젖을 더 먹여서 데려가겠다.”라고 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당시는 입양 절차 없이도 아기가 없는 집에서 남의 애를 데려다 키우는 것이 어렵지 않았나 봅니다. 어찌 되었든 동생은 나의 억지에 막혀 남의 집으로 가지는 않았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동생을 남의 집에 보내는 건 싫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아기 동생이 한 명 더 있으면 나에게 가사노동이 그만큼 많아지는데도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본능적인 것 같습니다.
나는 그 일을 잊고 있었는데 동생이 이번 여행에서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더군요.(어머니께서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합니다.) 언니 덕택에 남의 집에서 크지 않고 내 부모 형제와 함께 살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요. 그러니 이렇게 함께 여행을 올 수 있지 않느냐고 하며 웃더군요. 나는 혹시 부잣집에서 넉넉하게 컸으면 지금보다 더 훌륭하게 크지 않을까 했더니 남의 집에서 크면 지금보다 어떻게 더 나을 수 있겠느냐고, 말하는군요.
우리 어머니께 지금은 막내딸이 가장 잘합니다. 여전히 애교가 많고 싹싹하고 정이 많아서 누구에게나 잘 하지만 어머니와 나에겐 더욱 잘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때 보험을 잘 들어 둔 것 같습니다. ^^
남자형제 사이에서 자라 단련되어 두려움을 모르고 당당함과 꿈을 가꿀 줄 아는 고집과 무엇보다 열정이 있고 부지런합니다. 그녀는 삶이 춤이고 춤처럼 삶이 아름답습니다. 생기발랄해서 그녀가 있는 곳은 늘 환하고 즐겁습니다. 그녀의 생기가 주변에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우울했다가도 그녀가 언니를 부르며 몇 마디 말만 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것도 타고난 능력입니다. 그래서 그녀 주변엔 사람이 많고 그 에너지로 주변을 행복하게 합니다.
나와 여행을 다녀온 지 3일 뒤에 국제회의가 있어서 방콕으로 날아갔습니다.
영하의 눈밭을 다니다가 영상 30도의 태국에서 일정을 진행하는 것이니 체감 온도가 4~50도 차이가 나는 겁니다.
그녀는 오갱끼데스카를 외치며 북해도 눈밭을 즐겨 뛰어다녔는데 성하의 나라 국제회의장에서도 오갱끼데스카를 외치며 분위기를 이끌어갈 겁니다.
데레사
2019-03-07 at 09:15
잘 하셨네요.
그때 힘들었어도 남에게 안 주어서 다 행복한
거지요. 만약에 남에게 주었드라면 어머님은
눈물로 살아오셨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