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Scouting 3.> 1.4 후퇴 피난길에서

1950년겨울은유난히도추웠다.

인천미국문화원콘셋트건물에피난가지못한인천의소년대대원들이어수선한마음으로모였다.

나라가위급할때우리도무엇인가를해야되지않겠느냐는것이중론이었다.

소년병으로군대로가자는사람과지도자들과의론해서결정하자는사람들이있었는데

우리는대표3사람을뽑아서중앙본부에보내답을얻자는데로의견을뫃았다.

12월13일본부를찾아간우리들에게중앙본부는전시봉사대를조직하여부산으로내려간다는데

인천대원들도합류하려면지도자가인솔해서본부로올라오라는것이었다.

인천으로내려와서대장님들을찾으니다들피난나가셨고팔미소년대대장님만이계셔서

우리와함께가시자고청하였으나가족들과같이움직이라시며허락을안하신다.

할수없이우리대원들은부모님의동의서를지참하고길을떠날희망자12명을모아서짐을꾸려짊어지고

중앙본부로올라갔다.지도자가없어서합류시킬수없다는통보를받고힘이빠저있는데봉사대에서

활동하시는용헌식선생님께서우리들의임시대장님이되어주시겠다고하셔서우리는정식으로전시

중앙봉사대에편입이되었다.날마다거리로나가서교통정리를하고붐무기를들고나가서거리를지나는

사람들에게DDT소독약을뿜어주면서몇일을보냈는데,1950년12월28일에서울을떠난다고떠날준비를

하라는지시를받았다.

문교부장관이셨던백낙준회장님이보내주신추럭2대에짐을가득히싫고그위에120여명의봉사대대원들이

올라앉아꽁꽁얼어붙은한강을마포나루로해서건너는데얼음이갈라지는소리가쩍~쩍하고소리를낸다.

찬바람을맞으며서인천미국문화원에도착하여콘셋트에서잠을자고12월30일우리는인천부두까지행진을하여

오후4시경에정박중이던미해군상륙선3천톤급LST를타고인천항을떠나외항에서대기중이던1만톤급VICTORY

호로한밤중에환승을하였다.

배의앞부분에는죄수들과인민군포로들이타고있었으며,후면에는우리대원120여명과정부요인가족들이

타고있었다.VICTORY호는흥남에서북한피난민들을남쪽으로피난시키고우리를태우러왔단다.

배가인천앞바다를떠나서제주도남쪽을돌무렴우리는배에서1951년1월1일을맞았다.

미국인선장의배려로갑판위에서신년기념식을거행하고멸공통일을힘차게외첬다.

우리들은미국선원들과손짓발짓으로의사를나누면서정부요인가족들의선상고통을도와주기도하였다.

1월2일부산항에도착한우리는부산시수정동1번지"부산진은영극장"에짐을풀고그곳을우리전시중앙구호대의본부겸대한소년단임시중앙본부로사용하게되었다.

그때피난생활에는이창호간사장직무대리와용헌식선생님,드리고총무라는김선생님,전용한간사님의아우되시는전영한선생님,개성대대장님이계셨으며,전체도반장은경복소년대출신김용호선배가담당하셨다.

서울과인천개성대원들로구성된봉사대의잠자리가배정이되었는데우리인천대원들은무대위로배정을밭아서짐은무대뒷편에정열해두고잠은나무바닥인무대에서자면서그곳을우리들의집이요침실로애용하였다.

개성에서온대원들은우리천체의취사를담당하여날마다밥을해대는수고를담당하였다.

1.4후퇴때우리단원들을부산까지수송해준1만톤급미국화물선VICTORY호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