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4월11일피난처소였던부산진은영극장에서아침식사를마치고남어있는대원들에게
인사를나누며손을꼭잡아주기도하였고어떤대원과는끌어앉고인사를나누었다.
그날은서울70대와72대도귀향길에동행을하게되어먼저초랼역으로나갔다.
11시정각에미군군용화물열차지붕위로기어올라가서짐을가운데일열로내려놓고
서로가등을마주보고앉아서로프로앞뒤사람을묶어서안전하게떠날시간을기다렸다.
기치가기는도중에는절대로일어서서는안된다는주의사항도들었다.
봄이라지만차거운바람이뺨을때리는데공책을꺼내들고귀향보고서를쓸준비를하고있었다.
12시정각에초량역을떠난기차는부산진역에서3분을쉬고또떠나는데은영극장이눈에들어온다.
사상역-구포역-물금역-원동역을통과하여삼랑진역에서기차가멈추었는데이곳에서제2국민병아저씨들이
많이기차지붕위로올라왔다.
밀양-유천-청도를거처남성현에서또차는멈추었다.우리들을기차지붕위에서주먹밥으로저녁식사를하였다.
남성현역을떠나사바로긴터널을만났는데화통에서내뿝는연기로눈도감고입도소매로가라고통과하였다.
터널을빠저나온우리들의얼굴은까맣게석탄연기로칠을하였는데서로가바라보면서크게웃었다.
산성역에서한50분간을쉬었다가경산-고응을거처오후8시25분에대구역에도착하였다.
수색까지간다던기찬데사람들은대구까지빡에는갈수가없다고내리라고해서밤11시25분에내려서
역전광장에짐을모두어놓고삥둘러앉아서밤을지새웠다.
다음날아침에어느식당에서국을사다가싸온주먹밥으로아침을먹고는물어물어서울방면으로가는
국도의미군헌병검문서까지찾아갔다.
미군헌병이잡아주는국군트럭에올라타고우리일행은대구를떠났다.높은산을돌고돌아서
저녁8시30분에김천에도착하여그트럭은거기까지만온다고하여모두차에서내려어느집을찾아가
하루밤재워달라고청하니어서오란다,집주인이저녁을대접해주어서푸짐하게먹고그집마루에서
하루밤을잤다.
4월14일아침에일어나서그집옆으로흐르는냇가로내려가세수를하고정의배대장님께서시장에나가
사오신국거리로그집주인이끓여주는국에아침식사를한다음에다시헌병검문소로찾아가
11시15분에헌병이태워주는트럭으로또떠나서추풍령을지나2시25분에대전에도착하였다.
대전에서다시내려서헌병검문소를찾아가차를얻어타고또떠나서우리는한밤중에수원에내렸다.
어느집을찾아가서하루밤재워달라고청하니혼쾌히대청마루를내준다.
그집에서도늦은밤에저녁밥을얻어먹고모두들피곤하였던지깊게잠에빠저들었다.
4월15일수인선도로에있는헌병검문소에서태워주는트럭에올라인천까지무사히돌아올수있었다.
인천도원동에서내려서4월17일날미국문화원에서모이기로하고혜여졌다.
집으로돌아와보니현관문에는X자로널판지를대고못을밖아놓았고텅비어있었다.
부억문을뚫고드러가서보니식구들은없고쌀이며장작이며먹러리는많이있었다.
저녁밥을지어먹고2층의내방으로가서청소를하고일찍잠이들었다.
다음날아침에정의배대장님에게가족찾아떠난다고말씀드리고우리가족이피난갔을만한경기도안성외가집으로
다시길을떠났다.평택까지여러차레트럭을바꿔타고가서걸어서50리길안성에도착하니
저녁무렵이었다.외가에들어서니외숙모님께서나를끌어안으시면서보름만빨리오지……
하시면서우리아버지께서돌아가셨단다.우리식구들은모두용인군고삼면진외가댁에피난중이라셔서
그길로30리길용인샘실까지달려갔다.피난에가장을잃은슬품에어머님과둘째누님모자와남동생이
울음으로반겨주셨다.바로어둠이깃드는길을나서아버님산소에참배를하고돌아와가족들품에안겼다.
위의기록은그때만든귀향보고서가있어서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