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변 이야기, 51.> 훈춘으로 가는 길.

2006년7월18일저녁9시까지L.A.국제공항으로모이기로약속을하였다.아틀란타에서

오는이유식목사님일행3명은비행기시간이조금늦어진다는연락이있었다.

11명방문단의이동길은쉽지만은안았지만모두들자리를잘지켜주어어려움은없었다.

공항한편에서출구하는기도를드리고모두들탑승구로들어갔다.

인천공항에서4시간의대기시긴이있었는데우리일행은공항기도실러옮겨감사기도를드

리고내려와아침요기들을하였는데우동을주문하는사람들이많았다

연길동항에내리니아직도오전중이라반갑게맞아주는허룡주임과모두들인사를나누고

훈춘으로들어가는데두만강을바라보는눈길들이눈물이라도흐를것만같이보인다.

훈춘에도착하니시당서기와시장은북경출장중이였으며,강흥연부서기가우리를맞아만찬에

초대해주었다.미국훈사회의아낌없는후원에고마움을전한다며건배를청하기도하였다.

다음날은장학금수여식준비를마치고훈춘경제합작구로해서방천에들러북녁땅과러시아의연

해주땅을둘러보고올라오면서대두천김노인댁을찾아갔다.허룡주임이사전에오찬상을부탁해

놓아서손두부며푸짐한상을받은일행은이유식목사님의감사기도로식사를시작하였는데모두들

손두부의맛에넋을잃었었다.

이제는대두천변김노인댁이미국훈사회의명소로자리를잡게되었는데김노인의해박한

시대감각에일행은또한번놀라지않을수없었다.세계의정치에경제며사회의흐름을

훤하게읽고있는김노인에게모두들감복하는빛이였었다.

김노인댁에는몇차레를다녀가도또오고싶으리만큼정이듬북담겨있는그야말로우리들

마음의고향이었다.

대두천을따라조금내려가서두만강에이른일행은두만강물에발이라도담가보고가야겠다며

발을두만강물에담그는분도있었고강건너북한땅을바라보면서저기가우리의땅인데…하면서

촛점을잃고바라보는분들도있었다.겨울이면저강이얼어서그얼음위로건너와쌀이며곡

식을얻어간다는데김노인은아낌없이퍼주고따뜻하게밥한끼라도먹여보낸단다.

고향이북한인분들은어느새눈가에홍조를띠우면서눈시울을적시는데아마도고향의그리움

보다는민족적비애에더마음이아픈것같았다.

김노인내외분을모시고기념촬영을하고떠나오는데김노인내외분은우리를보내는그자리에서

손을흔들며보내는아쉬움에자리를뜨지못하는것같았다.

훈춘으로돌아오면서권하의두만강다리에서바라보던북한의자유무역지대라는곳이야기도올랐

으며대두천변에살고싶다는분도있었다.우리들마음의고향속에는이렇게많은찾아볼곳이있

었으며많은이야기거리가있음을도라보면서훈춘시내로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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