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전 28세의 청년이 보았던 5.16혁명.

나는5.16군사혁명을인천시답동에있던우리집에서맞았습니다.

서울태평로국회의사당앞에는날마다날이새기가바쁘게별의별집단의데모군중들이

진을치고소란을피웠었고,정치를한다는사람들은먹이사냥에나라일은뒷전이었는데,그

때민주당의곽상훈선생님이5.16몇일전에미국방문길에오르시게되어환송을나갔는데

선생님께서는서울에는올라가지말라고알수없는말씀을남기셨습니다.

정부는무능했고,사회는극도로혼란해서내일을예측할수없었던시국이였었는데아침라디

오방송을통해서군사혁명의소식이전해지고,어디서만든것인지는모르겠는데호외가우리

집마당으로도날라들어왔습니다.많은사람들이국가의장래를우려하던때라선가대체로혁

명공약을받아들고는환영하는분위기였는데데모로소일하던사람들은불만이많었습니다.

혁명군들이거리의깡패들을소탕하고,부정했던정치인들을정치정화법을적용하여조사를했

으며국회는해산되고관료들은쫏겨났으며,혁명위원회가조직되고군인들이각부서와중요

한고위공직에임용이되었습니다.초기에는군대의기강으로다스리려다가벽에부디치기도

했었지만그들의국사처리는대체로좋은평가를받았었습니다.

허지만혁명초기에는약간의세력다툼도없지는않았었는데그래도밖으로까지들어내지는않

았으며국가의행정력보다앞서가던군사행정론이각부처마다적용되면서구습의행정관습

도개선이되었었습니다.국가재건최고회의가구성되고재건국민운동이전국적으로조직되면서

5.16혁명의성과는들어나기시작을했었습니다.

우리의역사가언제나그랬던것처럼다수의말없는찬성보다는소수의불만분자들의목청큰소

리가정치의혼란을부추긴것이사실이었는데해가지날수록그런정권에대한구습이노골적으로

들어나면서집권군부세력과재야세력간의마찰도끊이지않았습니다..

이런와중에도새마을운동이시작되고군부세력이군복을벗고민간으로의정치참여가이루어지

면서재야세력들의저돌적인압박이계속되었지만그래도국가재건의틀이만들어지고시행되면서

국민들의지지도높아갔었습니다.허지만혁명세력들의권력연장을위한모험도국민들에게는불

안의요인으로들어났었습니다.

결국혁명세력은박정희대통령의서거로와해되고국가건설의맥은또다른세력집단으로넘어가면

서계획의차질도생겼습니다.이런5.16혁명의정신을정치나권력에무심했던국민들은분명한

국가적혁명이라고기억하는반면에,열등의식에서벗어나지못하는정치꾼들이나상습적인데모꾼

들은군사쿠테타라고폄하하는현실에서누구의주장이옳고그름을떠나5.16혁명은분명국가적인

엄청난변화속에발전의터전을이뤘다는점만은누구도부정하지는못할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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