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에자신은황후였다는여자가있습니다.소녀시절에스스로지어붙인
“경자”라는이름을자신의본명인“천옥자”앞에두었지요.
그뒤그이름은인생의아름다움과슬픔,외로움들을신비롭게표현할줄아는,
대한민국의대표적여류화가의이름이되었습니다.
천경자화백은어려서부터독특한감수성을가지고화가가되기를꿈꾸었습니다.
그녀가자랄당시대부분의여자는소학교도제대로다닐수없었던일제시대였습니다.
하지만천화백은교육과문화에열린가정환경덕분에광주에서
고등학교까지마칠수있었지요.
고등학교를마칠때즈음집안에혼담이들어왔습니다.하지만그녀는그림을공부하고
싶었고일본유학을결심했습니다.물론집안의반대가심각하였지요.천화백은정신병자흉내를내면서까지
부모님께유학을보내달라고졸랐습니다.미친듯이웃다가,울기도하고,중얼거리면서집안을돌아다녔지요.
결국부모님은허락하셨고,그녀는배를타고일본으로떠날수있었습니다.
동경여자미술학교를졸업하고돌아온천화백은유학중만난남편과결혼을하였습니다.
그러나남편은일찍세상을떠났습니다.그후다시신문기자였던두번째남편을만났지만곧헤어졌습니다.
진주를품은조개처럼쉽지않았던인생의고개들이그녀의가슴속에쉽게식지않는예술혼을잉태한것입니다.
“나물캐러갔던동네소녀가허리띠인줄알고꽃뱀을집으려다가물려죽은일이있었어요.무서우면서도
이상하게마음끌리는그장면이어렸을때부터머리에남아언제가그림으로그리고싶었지요.
그러나내가처음그린뱀은꽃뱀이아니라한뭉텅이의푸른독사였어요.”
인생의실패와좌절을맛보고그녀가자신의삶에저항하기위해택한소재가뱀이었습니다.그녀는전남여고
미술교사로재직하면서뱀에대한이미지를탄생시켰습니다.6.25로인하여부산으로피난을갔던천화백은
그곳에서자신이그린뱀그림전시회를하였습니다.그리고사람들은‘젊은여자가뱀을그렸다’면서
신기해하였구요.그것이“천경자”라는이름을세상에알리게한것입니다.
또한그녀의작품속에서일관되게등장하는이미지는꽃과여인입니다.아마도가장일반적인아름다움을대변하는것이
꽃과여인이기때문인듯합니다.그녀의작품속에는
아름다움이주로보여지고있지만,그아름다움은외롭기도
하고슬퍼보이기도하지요.고독의미와아픔의성숙이
천경자의예술을다른작품들과다르게만들고있습니다.
그러던1974년,18년간재직하던홍익대교수직을버리고,문득천화백은아프리카로떠났습니다.그렇게시작된여행은
남태평양과유럽,남아메리카까지계속되었지요.그곳을
돌아보고그여행에서느낀선명한색감과원시적인상을
자신의작품세계에반영하기시작하였습니다.그리고
베트남전쟁에서보여졌던안타까운인간의또다른모습들을아름답고평화로운자연에비추어서그림으로
남기기도하였습니다.
얼마전이었던1991년천화백은힘든일을겪기도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소장의“미인도”에대한진품시비사건
때문이지요.천화백은끝까지자신의작품이아니라고
말하였지만,사람들은듣지않았습니다.많은감정사들이
그녀의작품이라고판결하였고,입장이난처해진
미술관에서도천화백의작품이라주장하였지요.
마음에큰상처를입은천화백은자신의작품들을서울시립미술관에기증하고,큰딸이있는미국으로떠났습니다.그뒤진품위조사건은범인이밝혀졌습니다.그러나천화백은
한국에다시돌아오지않은채지금도스케치북을
옆구리에끼고중남미를여행하고있다고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