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임(林,任)씨와 평택임씨(平澤林氏)”

"뿌리를찾아서…임(林,任)씨와평택임씨(平澤林氏)"

(林,任)씨는
우리나라에서‘임’이라는같은음을쓰는성씨는둘이다.

하나는수풀임(林)을쓰는성씨이고,

다른하나는맡길임(任)을쓰는성씨이다.
그중수풀임(林)을쓰는성씨는전체성씨중에서

10번째로많은인구를가지고있는데,

2000년통계청인구조사에서23만7000가구에

76만2000여명이살고있는것으로파악되고있다.

임씨의최초유래는

중국의은(殷)나라시대로거슬러올라간다.

은나라마지막왕인주왕은폭군으로유명한데,

신하였던비간(比干)은그의폭정을참다못해

직간을했다가참형을당했다.

이광경을본비간의아들견(堅)은

장림산(長林山)에들어가은거하였다.

이렇게숲속에서은거했기에

수풀임(林)자를써서성을삼았다는것이다.

평택팽성읍농성임팔급이당나라에서건너와동료인7학사와함께축성했다는

이야기가전해오는토성이다.둘레가300m정도밖에되지않아,전쟁을위한성이라기보다는

곡창지대인평택의농산물저장시설로쓰인것으로학계에서는추정하고있다.

또다른유래도전한다.

4000년전중국기주땅태원현에있는쌍목(雙木)아래

신인(神人)이강림하여임씨성을썼다는것이다.

하지만,대체로앞에기술한비간과

아들견의유래에근거로삼는견해가일반적이다.

우리나라에서임(林)씨가처음시작된것은

동래(東來)8학사중의한사람인임팔급(林八及)에서부터이다.

임씨세보에따르면,임팔급은

당나라용도각한림학사(龍圖閣翰林學士)

행병부상서(行兵部尙書)를역임했었다고한다.

그는당나라문종때참소를당하여동료7학사

(유전,설인경,허동,송규,최호,권지기,공덕수)와함께

신라로망명하여평택현용포리에정착하였다.

그후적병이침범하자의병을일으켜이를격파하였으며

그공으로평택군(平澤君)에봉해졌다고한다.

그후임씨들은그를도시조로모시고있으며,

평택임씨로부터분관된것으로여기는것이일반적인견해이다.

다만,나주임씨의경우평택임씨에서분관되었다고하는

주장의신빙성을부여할수없다고하여부인하고있다.

현존하는임씨는

나주(羅州),평택(平澤),진천(鎭川),

(같은형제였다고,어릴적부터나는들었다.)

울진(蔚珍),예천(醴泉),부안(扶安),순창(淳昌),장흥(長興),조양(兆陽),

은진(恩津),선산(善山),진주(晉州),옥구(沃溝),경주(慶州),옥야(沃野),

전주(全州),임천(林川),임하(臨河),길안(吉安),밀양(密陽),보성(寶城),

안동(安東)등30여본이전해지고있다.

이와는달리맡길임(任)을쓰는성씨는

5만3000여가구에17만2000여명이살고있는것으로조사되고있다.

맡길임(任)을쓰는성씨는풍천과장흥을본관으로삼고있는

임씨가대종을이루고있다.

풍천임씨는임온(任溫)을시조로하는데,

그는중국소흥부(紹興府)자계현(慈溪縣)사람으로

고려충렬왕때그의5대손인임주(任澍)가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따라

고려에들어와살았기때문에본관을삼았다.

또,장흥임씨는중국송(宋)나라사람으로

고려정종때귀화하여정안현(定安縣:지금의전남장흥군관산읍)의

당동리에정착하였기에장흥임씨라정했다.

이렇듯맡길임(任)자를쓰는성씨의본관으로는

풍천(豊川),장흥(長興),곡성(谷城),과천(果川),아선(牙善),회덕(懷德),진주(晉州),

함풍(咸豊)등이전해지며그가운데풍천임씨와장흥임씨가대다수를차지한다.

임씨도시조임팔급동상평택임씨등임씨의도시조인임팔급은

당나라에서신라로건너온8학사중의하나이다.그의동상은평택농성입구에서있다.

평택임씨(平澤林氏)는
평택임씨는수풀임(林)을쓰는성씨의본산이라고할수있다.

인구는나주임씨(羅州林氏)보다조금적지만,

임씨의도시조라고할수있는

임팔급이처음우리나라에들어와

평택시팽성읍에정착한뒤평택군에봉해졌기때문에

임씨의대종을이루는본관이라고할수있다.

따라서임씨의다른본관들도

평택임씨에서갈라져나간분관들로보고있다.

평택임씨의시조는

임씨의도시조라고할수있는임팔급이다.

그는당나라팽성현(彭城縣)에서

한림학사병부시랑(翰林學士兵部侍郞)의벼슬을하고있었다.

하지만,나라는혼란스럽고참소하는무리들이끊이지않았다.

그래서임팔급은동료였던7학사와함께

신라로귀화하여평택시용포리에정착하였다.

정착한후적병이침투하자

성을쌓고적을물리쳐서평택군에봉해졌다고한다.

이러한평택임씨시조임팔급과관련된8학사동래는

우리나라에정착한중국귀화성씨의대표적설화이기도하다.

또,신라시대평택,당진등이

당나라와오가는주요교통로였음을감안할때,

당나라출신의주요정착지가

평택근방이었을것이라는점도충분히짐작할수있다.

지금도평택시팽성읍에는임팔급과함께온

동료7학사가쌓았다는설화가있는토축성이존재한다.

이렇듯임팔급을도시조로하고있지만,

임팔급이후세계를알수가없어,

고려말세자전객령(世子典客令)겸연희궁부사(延禧宮副使)를지낸

임세춘(林世春)을일세조로하는전객령계(典客令系)와

고려말에삼중대광(三重大匡)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이된

임언수(林彦脩)를일세조로하는

충정공계(忠貞公系)로나뉘어세계를이어오고있다.

평택임씨의각파에는

부사공파(府使公派),사직공파(司直公派),삼청당공파(三淸堂公派),

승지공파(承旨公派),영광공파(靈光公派),진사공파(進士公派),금호공파(錦湖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평성군파(平城君派),송현공파(松峴公派),만죽공파(晩竹公派),

송담공파(松潭公派),송산공파(松山公派),송주공파(松州公派),송당공파(松塘公派),

영해공파(靈海公派),관해공파(觀海公派),대호군파(大護軍派),현감공파(縣監公派),

거은공파(居隱公派),지평공파(持平公派),부원군파(府院君派),판윤공파(判尹公派)등이있다.


평택임씨는조선시대과거급제자91명을배출했는데,

문과에19명,무과에20명,사마시에52명이다.

또한2000년통계청이발표한바에따르면,

총6만5015가구에21만89명이살고있는것으로파악되고있다.

충주충렬사임경업장군사당충주충렬사는임경업장군을모신사당이다.

임경업장군은충주에서임황의여덟아들중넷째로태어났다.

뛰어난지략으로병자호란때청나라군대가피할정도로용맹을떨쳤으나,

끝까지친명원청의입장을견지하여고난의생을살았다.

평택임씨의연혁과인물

앞서도이야기했듯이,평택임씨는우리나라임씨의대종으로

각임씨본관들이평택임씨에서갈라져나갔다고보고있다.

평택임씨내에서는고려말세자전객령을역임한

임세춘을일세조로하는전객령계가있고,

고려말평성부원군이었던임언수를1세조로하는충정공계로갈라진다.

전객령계의파조인임세춘은고려말에세자전객령을지냈으며,

임세춘의증손임정(林整)은태종때예조판서를지내고

성종때청백리에녹선되었다.

또그의현손임명산(林命山)은이조판서,5세손임수창(林壽昌)은

부총관,6세손임규(林珪)는병조판서,8세손임유명(林有名)은

좌승지,10세손임황(林篁)은중추부영사에올랐다.

그는여덟아들을두었는데,넷째아들이바로임경업(林慶業)장군이다.

임연은고려고종때김준등과함께

당시무신정권의실권자최의를제거하고,정권을왕에게돌렸다.

임연과그의아들임유무는몽고에항전하다숨진무인이다.

그외임희는고려2대혜종의왕비인의화왕후의아버지로

문하시중평장사를지냈으며진천임씨의시조이다.

임개는선종때청백리로형부상서를지냈으며,옥구임씨의시조가된다.

임춘은고려의종때의문인으로예천임씨의시조다.

이인로등과함께벗하였으며,

강재칠현(江在七賢)의한사람이라고칭해지고있다.

그의시문은‘삼한시구감’에기록되어있으며

가전체(假傳體)소설인‘공방전’등이전해온다.

평택임씨충정공계시제평택임씨충정공계시제모습.평택임씨는크게임세춘을

일세조로하는세자전객령계가있고,고려말이인임,염흥방과함께전권을장악했다가

최영,이성계에게밀려난임견미의아버지임언수를1세조로하는충정공계가있다.

평택임씨의충정공계는

고려말삼중대광(三重大匡)임언수(林彦修)를파조로하고있는데,

그의아들임성미(林成味),임견미(林堅味),임제미(林齊味)가모두현달하였다.

임성미는우왕때왜구를무찔러삼사우사(三司右使)에이르렀고,

임견미는홍건적의난때왕을호종하여1등공신이되고,

제주목호의난과왜구를쳐서문하시중에올랐다.

그후염흥방등과함께정권을잡아전권을휘둘렀다.

그뒤최영(崔瑩)과이성계(李成桂)에게축출되고살해되었다.

또임제미는판개성윤(判開城尹)을지냈다.

임언수의아들은6명이었는데,각각여러본관으로나뉘어졌다.

조선시대에들어와서는

임세춘의증손으로태종때예조판서를지내고,

성종때청백리에녹선된임정(林整)이있다.

임세춘의10세손인임황(林篁)은중추부영사를지냈다.

임황은8명의아들을두었는데,

그중넷째아들이임경업(林慶業)장군이다.

임경업장군은

광해군때무과에급제하였고,

소농보권관,첨지중추부사를지냈다.

이괄의난때에공을세워진무원종일등공신이되었으며

후에병마절도사겸안주목사를지냈다.

병자호란이일어나자쳐들어오는적을무찔러용맹을떨쳤다.

하지만,역신김자점(金自點)의모함으로살해되었다.

그가죽은뒤‘소설임경업전’이나와사람들의입에회자되었다.

충정공계인임형수(林亨秀)는

임언수의7대손이며,

인종1년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지냈으나,

명종때벽서지변사건과관련대윤으로몰려

정언각(鄭彦殼)의참소로사사되었다.

임식(林植)은임언수의8대손으로

명종때17명현(17名賢)의한명으로이름이높으며,

강계부사(江界府使)를역임했다.

임회(林檜)는임언수의8대손이며송강정철의사위이다.

그는광주목사(廣州牧使)를역임하던중

이괄의난때반란군에게목숨을잃었다.

목숨을잃는상황에서도

반란군을꾸짖어서릿발같은기상으로유명하다.

구한말에는의병장임병찬이있으며,

3·1운동당시민족대표33인의한사람이었던임예환과

48인의한사람인임규등도평택임씨후손들이다.

임경업장군초상임경업장군은그의이름난

용맹성과는달리몸집은매우왜소했던것으로

전한다.

평택임씨의현대인물


평택임씨의현대인물에서는재계쪽에서많이배출되었다.

우선꼽을수있는사람은대상그룹(전미원그룹)의임대홍회장이다.

그는1956년동아화성공업㈜을설립하고,1958년에미왕산업사를설립했다.

다시1962년㈜미원으로상호를변경했다.

그후‘미원’브랜드로국산조미료1호를탄생시켰다.

순수국내기술로만들어진최초의인공조미료제품이었다.

최근엔한국형우주식품도개발했다.

계열사로대상홀딩스㈜를비롯하여대상㈜,대상팜스코㈜,대상정보기술㈜,

㈜상암커뮤니케이션즈,UTC인베스트먼트㈜,나드리화장품㈜,

대상FNF㈜,동서건설㈜등을두고있다.

그외재계에는임광정한국화장품회장,임종협이화산업회장,

임채홍내쇼날프라스틱회장,임승엽코오롱종합건설사장,

임원수동아건설사장,임정수지구레코드사장,임광수임광토건회장,

임영대대일유업사장,임재수전조흥은행장,

임송본전산업은행총재등이있다.

그외학계,법조,의료계에는

임한경변호사(전서울고법원장),임기호변호사(전서울고법원장),임동진변호사,

임의선세브란스병원장,임관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임희섭고려대교수,

임근수서울대교수,임응극서울대명예교수,임선호전남대의대학장,

임길진미프린스턴대교수,임현진서울대교수등이있으며,

정관계에서는임방현,임삼,임호,임갑수(이상전국회의원),

임명진외무부본부대사,임남수전체신부차관,임승래전전북도교육감등이있고,

문화예술계에서는임옥상(화가),임옥인(작가),임성남(전한국발레협회장),

임병진(전성균관유도회장)등이있다.

김성회한국다문화센터운영위원장kshky@naver.com

입력:2013-09-0221:24:49수정:2013-09-0221:24:49

"뿌리를찾아서…임(林,任)씨와평택임씨(平澤林氏)"

"백제의대륙경영!"

-두부국

백제가중국대륙을경영했다는주장은

일반사람은물론사학자들에게도생소하게들린다.

백제의대륙경영설은

‘삼국사기’에단한줄도나오지않지만

중국과일본사서에는편린이보인다.

백제가중국대륙에영토를갖고있었다는

사실을모르고있거나아니면아예무시하는경우는

고려시대의김부식뿐아니라요즘사학자들가운데도많다.

이들은백제가무슨수로바다를건너

중국에영토를확보할수있었는지도저히믿지못한것이다.

백제가중국의요서지방과산동반도를비롯한

동부해안지방에진출해그곳을다스린

강력한해양제국이었다는사실을꿈에도모르고있으니

이는,그만큼연구가부족하다는방증이다.

中사서속백제영토요서·산동아울러

그렇다고해서전대학자가운데

이런사실을밝혀낸이가전혀없었던것은아니다.

조선시대의신경준이’증보문헌비고’에서

백제가한때요서와월주를차지했다고썼고

신채호도’조선상고사’에서

백제가요서·산동·강소·절강등지를차지했다고했으며,

정인보도비슷한주장을했다.

중국사서가운데가장먼저이를언급한’송서(宋書)’는

‘백제국이본래고려(고구려)와더불어

요동의동쪽1,000여리에함께있었는데

그뒤에고려(고구려)는요동을침략해소유하게됐고

백제는요서를침략해소유하게됐는데

백제가다스리는곳을진평군(晉平郡)진평현이라고했다’고소개한다.

비슷한기록은

북송때사마광의’자치통감’이나

원나라때’문헌통고’에도보이고,

특히남북조때의’남제서’에는

백제가북위의대군을섬멸한전쟁기사까지나온다.

북위는남북조시대북조의하나로

선비족탁발씨(拓拔氏)의나라다.

이런빛나는백제의역사를김부식은

‘삼국사기’백제본기동성왕조에서'(재위)10년,

위나라가군사를보내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패하였다’는단한줄로뭉개버렸다.

유학·신라중심사관의영향으로분석된다.

선비족은중국북방의유목민족이다.

그들의기병수십만명이무슨수로

바다를건너백제로쳐들어왔다는말인가.

육로로백제를공격하려면고구려를거쳐야하는데

고구려가순순히길을내줬을까.

게다가당시고구려임금은

광개토태왕의뒤를이은장수대왕이었다.


고대사의권위자인윤내현박사는

‘한국열국사연구’에서"남북조시대에

백제가영토로삼고다스렸던중국지역이요서,

즉오늘의하북성난하유역에서동부해안을따라

산동성을거쳐강소성남부까지이르렀으며

남쪽의광서장족자치구울림군지역까지

근거지를마련했을가능성이있다"고기술했다.

윤박사의설명을더들어보자.

"백제가중국동부해안지역에진출해

그곳을지배했다는사실은

당시백제의국력을알게해주며

백제가해양활동을활발히한국가였음을말해주기도한다.

중국의동부해안지역은선사시대부터

황하중류유역과는구별되는문화권으로서

한반도및만주와밀접한문화교류를하고있었다.

그곳에거주했던사람들은황하중류유역거주민인

제하족(諸夏族)에의해동이(東夷)라고불렸다."

역사잃으면미래없어…제대로지켜야!

서한무제는위만조선(衛滿朝鮮)의우거왕을반대하고

서한으로이주한예군·남여등28만명을받아들여

지금의발해만서부연안창주지구에

창해군(滄海郡)을설치해그곳에거주하도록했다.

따라서중국동부해안지역에는

한민족이많이거주하고있었다.

이를기초로백제의중국동부해안지역진출이쉬웠던것이다.

또고구려와백제가멸망한뒤에는

고구려유민인이정기일가가산동성지역에서

치청번진(淄靑藩鎭)을경영하면서당황실에대항했다.

그뒤를이어장보고대사가

이지역을차지하고해상권을장악했는데

이러한활동이가능했던것도그전에

백제가이지역에진출했던것과무관하지않다는설명이다.

우리의!자랑스러운역사를!제대로알고이를지켜야한다!

역사를잃으면미래도없다!

역사에서교훈을찾고!내일의좌표를찾아야한다!

-황원갑소설가·역사연구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11&aid=000260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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