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나주임씨(羅州林氏)”

"뿌리를찾아서…나주임씨(羅州林氏)"

입력:2013-09-1620:54:09수정:2013-09-1620:54:09-김성회

고려상장군임비가시조…9세손임탁이후나주서자리잡아

나주임씨의시조는임비(林庇)이다.

임비는고려시대충렬왕이원나라에갈때

호종했던공으로보좌이등공신에책록되었고,

뒤에상장군과,충청도도지휘사,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에오른인물이다.

나주임씨세보에서는,그이전에도여러대에걸쳐

고위직에오른인물들이있었다고하지만

자세한계보가전해지지않아,임비를원조로한다고기록하고있다.

이로인해,나주임씨가임팔급을도시조로하는

평택임씨에서분화되었다는주장도없지않다.

하지만,평택임씨보다인구가많은

나주임씨측에서는이를부인하고있다.

나주임씨가나주지역에자리를잡은것은

임비의9세손인임탁(林卓)이후로추정된다.

임탁은조선이개국하자,

벼슬을버리고금성(錦城·나주)회진(會津)으로낙향했다.

그로인해본관을회진으로정하고세계를이어왔다.

뒤에회진이나주에속하게되자나주로고치게되었다고전한다.

하지만일부나주임씨중에서는아직도회진임씨로표기하는사람들이있다.

나주임씨는조선초기에분파되기시작했는데,

임탁의손자인임유소(林有巢)를파조로도정공파(都正公派)가분리되었고,

임유소의손자대에서큰손자인임귀연(林貴椽)의후손이

장수공파(長水公派),정자공파(正字公派),

(아버지께서…어릴적나에게…집안의족보를말씀해주셨는데…

그때는…내가너무어려서…조상에대한말씀이어려워듣기싫어했었다.

내유년의기억으로는…‘금성’과…’정자공파’라는것만을기억하고있다.

단,한번도…집안의조상선산에도찾아가보지않았던…집안의부도수표인딸이지만…

아버지…그래도사회에서는…제가보증수표라는것을지켜봐주세요…아멘.)

절도공파,첨지공파,생원공파,첨추공파(僉樞公派)로파생되었다.

또둘째손자인임귀량(林貴樑)의후손에서진사공파가분파되었다.

나주임씨에서배출한조선시대과거급제자는모두218명으로,

문과49명,무과16명,사마시132명,역과8명,

의과4명,음양과8명,주학1명등이다.

그중상신에오른사람은

순조때우의정을지낸임한호(林漢浩)가있다.

현재나주임씨는전라남도나주·완도·장성등

호남지방에주로거주하고있으며,

경상북도달성과충남서천군일대에도거주하고있다.

2000년통계청이발표한결과에의하면

나주임씨는총7만3556가구에23만6877명이살고있는것으로추정되고있다.

대종가나주임씨의시조는임비이지만조선개국후나주임씨의중조인임탁이나주에

내려와은거하면서나주임씨가시작되었다.사진은나주에있는나주임씨대종가의전경이다.

◆나주임씨의연혁과인물

앞서이야기했듯이나주임씨의1세조는

고려때상장군을지낸임비이다.

그는충렬왕이원나라를다녀올때호종했던공으로

보좌2등공신에책록되고철권(鐵券)을하사받았으며,후에상장군에올랐다.

그의9세손인임탁은고려말에해남감무를역임하였으나,

고려가망하고조선이개국되자,

송도(개성)부조현에서조천관(朝天冠)을벗고

북쪽을향해통곡한뒤금성의회진으로내려가불사이군의충절을지켰다.

그로인해두문동(杜門洞)72현의한사람으로추앙을받았고,

나주임씨가생겨나게되었다.

이에따라나주임씨는임비를원조로하고,임탁을중조로삼고있다.

시제나주임씨대종회에서는임비등의묘가개성근방으로추정되나찾을수없어

중조인임탁의묘에서시제를봉행하고있다.

나주임씨는임비의14세손,임탁의7세손인

임붕(林鵬)과그의손자대에서크게일어났다.

그는중종때별시문과에장원으로급제하고

예문관검열(檢閱)과승문원주서(主書)를거쳐

예조및병조좌랑과5조의참의를역임한후

광주목사로나갔다가경주부윤을지냈다.

임붕의아들임복(林復)은

명종즉위년에증광문과에급제하여

승문원정자(正字)에등용되었으나,

양재역벽서사건(壁書事件)에연루되어

삭주(朔州)에유배되었다가풀려나와무고를입고

향리에내려가은거하였다.

그의아우임진(林晉)은무신으로

제주목사와5도병마절도사를역임하며선정을베풀어

청백리에녹선되고청정비(淸政碑)가세워졌다.

임복의아들로선조때

정시문과(廷試文科)에급제했던임서(林?)는

인조반정후황해도관찰사겸

병마수군절도사가되어적폐를시정하고,

농사의장려하고군사를조련하는등많은치적을남겼다.

또임진의아들임제(林悌)는

선조때문과에급제하여

예조정랑겸지제교(知製敎)를지냈다.

그는격렬한당쟁을개탄하여벼슬을버리고

명산을찾아다니며문필로여생을보냈다.

문장이호쾌하고의협한시풍으로

조선시대호남의시인가운데최고로꼽혔으며,

저서로는‘화사(花史)’와‘수성지(愁城志)’를비롯하여

‘백호집(白湖集)’,‘계백류상영록(溪碧觴永錄)’등의문집이있다.

그의아들임탄(林坦)도벼슬을하지않았으며,시로써이름이높았다.

임진의아들이자임제의아우로공조정랑을역임했던임환은

임진왜란때의병장김천일(金千鎰)의종사관으로전공을세웠으며,

정유재란때에는사재를털어이순신의병량을조달했고,

‘진사군(進士軍)’이란의병을일으켜여러전투를치르며활약했다.

임서의아들임담(林?)은인조때문과에급제였고,

병자호란이일어나자총융종사관(總戎從事官)으로

남한산성에들어가남격대(南格臺)에서수비를하였다.

그후유탁(柳濯)의모반사건을처결하고

예조와이조판서,의금부판사를지냈다.

벼슬을하는동안청탁을배제하고청빈하여집안이무척가난하였다.

그로인해우승지였던형임연이집을사서주었다는일화가있다.

나주임씨족보나주임씨의세계가고스란히적혀있다.

임담의아들은승지를역임한임상원(林象元)이며,

손자는나주임씨문중에서유일하게

상신에오른임한호(林漢浩)이다.

그는정조때문과에급제해이조판서와

판의금부사등을거쳐순조때우의정을역임했는데,

서얼의등용을주장하여서자도벼슬할수있게하였다.

또임담의5세손임시철(林蓍喆)은공조판서를역임했고,

6세손임경진(林景鎭)은이조참판을,

7세손임영수(林永洙)는예조판서를,

그의동생임한수(林翰洙)는강원도·함경도관찰사를지냈다.

또임최수(林最洙)는시종원시종을지냈다.

임서의현손인임영(林泳)은부제학을지냈고,

임붕의9세손인임한진(林翰鎭)은이조참판을,

임한진의아들임긍수(林肯洙)는이조판서를역임하였다.

이밖에임득명(林得明)은시·서·화에능해삼절(三絶)로일컬어졌다.

그밖의나주임씨인물로는인조반정에공을세워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에책록되고

9군의목사와부사를지낸임타가있다.

또한이괄(李适)의난에의병을일으켰던

임게,안산군수와장성부사를지내며

선정을베푼임세량(林世良),첨지중추부사임유의아들로

‘창계집(滄溪集)’을저술한임영(林泳),‘동사회강(東史會綱)’과

‘노촌집(老村集)’을저술한임상덕(林象德)등이유명하다.

또임한수(林翰洙)는철종때강원도와

함경도관찰사를지내고기로소(耆老所)에들어갔으며,

구한말에는절충장군(折衝將軍)이었던임영준(林英儁)이있으며,

그의아들임창택(林昌澤)이백운동에은거하며

후진양성에전력하고,저서로‘숭악집(崧岳集)’을남겼다.

3대효자비경남창원의나주임씨3대효자비는조선조에나주임씨문중에서

3대에걸쳐극진한효자가나와이를기리는비를나란히세웠다.

◆나주임씨근현대인물

나주임씨근현대인물로는

청송출신의의병장임용상(林龍相)과

해방후외무부장관을지낸임병직(林炳稷)을들수있다.

임용상은을사조약이체결되자

의병을모아동해창의군을조직하고

청송,영천등지에서일본군과격렬한전투를전개하였다.

1909년일본군과교전하다체포되어

징역3년형을선고받고복역했다.

출옥후신남의진을재정비하고청송과의성등지에서

일본군수비대를공격하였으나,안평전투에서다시체포되어

징역10년형을선고받았다.건국훈장독립장이추서되었다.

임병직은충남부여에서출생하고,

미국으로건너가오하이오·디킨슨대학교에서수학하였다.

이승만이상해임시정부초대대통령이되었을때,비서로재직하였다.

1919년에는필라델피아에서서재필,조병옥등과함께

한인연합대회를열어만세운동을전개하였다.

광복후외무부장관에기용되었으며,

1951년유엔대사가되어한국의국제적지위향상에공헌하였다.

건국훈장대한민국장이추서되었다.

나주임씨현대인물로는

노무현정권에서국회의장을지낸

임채정(林采正)씨와영화감독임권택씨를꼽을수있다.

임채정전의장은나주에서태어나

고대법대를나오고동아일보기자로재직했다.

동아투위상임위원,민주언론운동연합사무처장으로있다가

1988년문동환,박영숙등과함께평민당에입당하였다.

그후14∼17대국회의원으로국회의장을지냈다.

임권택영화감독은영화계의거장이다.

전남장성에서태어났으며,광주숭일고를중퇴하고

1956년신생영화사영화제작부에입사하였다.

‘두만강아잘있거라’로감독에데뷔하였으며,

1988년엔‘씨받이’로아시아·태평양영화제에서감독상,작품상을받았다.

1989년엔‘아다다’로몬트리올영화제,

‘아제아제바라아제’로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초청되었다.

1993년‘서편제’로상하이국제영화제감독상을수상했다.

또,2002년에는조선후기화가장승업의일대기를그린

‘취화선’으로칸영화제감독상을받았다.

1993년에는칸영화제에서‘임권택주간’이설정되기도하였다.

임권택감독임권택감독이만든수많은

영화들이국제영화제에서수상하였으며,

그중서편제는한국의자연을영상으로담은

영상미학의백미로꼽힌다.칸영화제에서

임권택주간을마련할정도로

한국영화계의거장이다.

그외나주임씨현대인물로는

국회의원으로임갑수,임종기,임인채,임덕규,

임재정,임채홍,임인규,임무웅등이있다.

정관계인물로는임종린(해군중장·한미연합해군사령관),

임동원(전통일원장관·국정원장),임인택(건설교통부장관),

임춘성(전북지사),임채진(전검찰총장),임채민(전국무총리실장),

임종옥(부장판사),임광규(변호사),임종선(부장판사,변호사),

임석무(법무부차관)등이있다.

학계에서는임정규(성균관대교수),임종철(서울대교수),

임원택(서울대교수),임채원(숙명여대교수),임광택(전남대법대학장),

임인택(이학박사,조선대교수),임채균(의학박사)등이있다.

또재계에서는임광행(보해소주회장)씨가있으며,

언론및문화예술계에선임광순(신민주전선편집위원장),

임현기(서예가·국전초대작가),임홍규(서예가),

임승택(서양화가)씨가있고,탤런트임채무씨가있다.

"뿌리를찾아서…나주임씨(羅州林氏)"

"아름다운금성의푸른빛석양"

해석2015.05.2106:34 http://blog.daum.net/hdjmgctk/525

http://earth-chronicles.ru/news/2015-05-20-79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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