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에 체류기- 1.
1996년9월12일,목요일.
오전11시,에어프랑스287편이드디어김포공항을이륙했다.
비행기가고도를잡는동안나는눈을감은채지나간6개월여의준비기간을되새겼다.

그동안우리부부는수십번빠리에갔었지만언제나다른곳을가기위한경유지였다.
짧게는당일로,길어야1박2일정도의빠듯한일정으로그저빠리의겉모습을이곳저곳
구경했을뿐이다.
때문에마음속깊은곳에는언젠가는이매력적인도시에장기체류해봐야한다는강한
욕구가자리잡고있었다.
뜻이있는곳에길이있는법.
결국전문여행안내책자에서빠리의프랑스인가정의민박을알선하는프랑스인단체가
있는것을발견했고두가지클라스중A클라스쪽에신청을했다.
조건은중산층프랑스인가정일것과영어소통이가능한집을알선해달라는것이었고
기간은한달,아침과저녁식사,그리고우리부부만사용하는별도의방을배정해줄것을
요구했다.
한달체류비용은소개료와함께꽤비싼편이었지만나는기꺼이이를지불했고곧구체적인
준비에착수했다.
사실,우리부부는단둘이서세계어느곳이든여행할수있을정도의캐리어는이미가지고
있었다.
단지장기체류에필요한물품과현지에서쓸프랑화를환전하는일이었다.
오히려더긴요한준비는,
빠리에대한지정학적,문화적,역사적인공부였다.
그리고일단빠리에서의모든이동은지하철을이용하기로했기때문에그노선도와함께
할인탑승권구입,탑승요령,환승등가장중요한교통편을공부하고지하철지도를펴놓고
도상연습을해보는일이었다.

그러나무엇보다도크게마음설레이는일은빠리의프랑스인가정에서한달간민박한다는
여행형태가주는의외성과그기대감이었다.
우리는지하철을타고두발로걸어다니면서인간이건설한최고의문화도시를답사할것이다.
그리고그들이왜세계최고수준의문화적인삶을누리고있는지를알아내야했다.
다른하나는민박을통해중산층프랑스인가정의안을드려다보고싶었다.
정말그들은어떻게살고있는것일까.
그건함께살아보지않으면알수가없는일이며이제그런모험이시작된것이다.
나의안식년여행은그렇게시작되었다.

13시간15분의긴비행끝에287편은빠리의드골공항에착륙했다.
공항에는우리가픽업을부탁했던이철호씨가차를가지고나와있었다.
공항을떠나30여분을주행한후차는빠리의제17구빌리에30번지에도착했다.
이지역은빠리의고급주택가로서우리가보통빠리를여행할때볼수있는구시가지의
돌로지은길다란5층집이다.
이철호씨에의하면(그는7년째빠리에살고있다)180년이상된이집은비록낡아보이는
돌집이지만아파트에사는빠리쟝들이입주해서살기를선망하는대단히좋은주택이라는
것이다.
미리받아가지고있던번호대로대문자물쇠의숫자를눌러문을열고들어서니옛날마차를
두었던공간이나타났고다시일층출입문의초인종을눌러야했다.
문을열고나타난프랑스인부인은스페인계로보이는전형적인프랑스여인으로인상이
좋았다.
마담은자기를[에리코]라고소개했고곧우리를두개의육중한이중창문이있는큰길가쪽의
커다란방으로안내했다.
방은낡은것이었고인상적인것은높은천정과귀퉁이에바로크식장식이붙어있는
점이었다.바닥은아주오래된나무마루였다.
이철호씨는방을둘러보더니꽤좋은방이라는것이다.
빠리의기준에서는그럴지몰라도새로지은아파트에서살던우리눈으로볼때그말은
수긍할수가없었다.
오래된집의낡은방이었을뿐이다.
그러나지나면서보니우리방에놓여있는책상과두개의의자등집기는역시오래된것으로
정말탐나는물건들이었다.
그리고옷장하나와똑같이오래된2인용나무침대가한쪽벽에붙여져놓여있었다.
옛집이라조명상태가나빠낮에도어두운,그런방이었다.

그래도우리의짐을풀어정리해놓으니방의분위기는상당히바뀌었다.
역시방은사람이살고있어야삶의분위기가살아나는것이다.
이제우리부부는이고풍스러운방에서한달간프랑스인들과같이살게된것이다.
저녁7시,
마담이우리방을노크했고,문을여니저녁식사가준비됐으니식당-부엌으로오라는것이다.
그후마담은매일저녁7시면어김없이우리방을노크했다.
어둡고침침한긴복도끝에부엌이있었고,식탁에는6인분의식사가준비되어있었다.
약간좁은부엌은온통노랑색으로칠해져있었으며식탁위의식기,포크와나이프,숟갈모두가
마담의시어머니가쓰던전세대의물건들이었다.
크고무거웠지만정감이가는것들이었다.
마담과두아들,매튜와세바스챤,그리고어제도착했다는또한사람의민박손님인일본인
처녀도모꼬(朋子)양과그리고우리부부였다.
남편과는오래전에사별한것같았다.
14살된,놀랍도록아름다운금발을가진세바스챤이바게뜨를썰어나눠줬고이어냉장고에서
꺼낸차게한샐러드를먹었다.
바게뜨에는뻐터와잼을발라먹었다.그리고냉수를마셨고,
오븐에데운감자와고기로만든요리를먹었다.말하자면그게메인디쉬였다.
그리고디저트는껍질을벗긴복숭아였다.
그게전부였다.
부족한것은아니었지만생각보다는검소하고소박한저녁식사였다.
비로소우리는우리가얼마나잘먹고사는지를실감할수있었고우리들이얼마나좋은집에서
고급품을쓰며사는지를알수있었다.
이철호씨에의하면최근계속되고있는실업율증가와파업으로빠리쟝들의심성이많이거칠어
졌고살기도퍽힘들어졌다고했다.

일본인처녀도모꼬양은서른한살의호주출신으로영어가능숙했다.
그녀는직장에서9일간의휴가를얻어마담에리코의집에민박하게됐다고했다.
그녀는우리부부가한국인이라는사실에약간놀랜것같았고내가대학교수인줄알았다고
했으며마담도자기집에민박한일본인은많았지만한국인은처음이라고했다.
나는식사도중마담에게뜨거운마실것을주문했고,마담은뜨거운티를만들어줬다.

나무로된더불베드는,
정말고풍스러운장식을한아주오래된것이었고평균의프랑스인보다키가큰내게는
그길이가약간짧은편이어서익숙해지기까지는조곰불편했다.
생각보다9월의빠리는추웠고그때문에더덮을담요를갖다달라고했다.
마담의큰딸과동거한다는,마음씨좋아보이는청년이(무어인같았다)다낡아빠진전기히터를
갖다놓았는데열이잘나지않아큰도움이될것같지는않았다.
나는,
낯선침대에누워생각했다.
송아지만한세퍼트와검은고양이를함께기르는이전형적인프랑스인가정에서이제부터
무엇인가를알아내야한다.
그들의장점과약점을모두알아내야하는것이다.
이호철씨가그랬다.
[빠리의9월은단체여행객은뚝끊어지고이제부터진짜여행가들이오는계절]이라고.
사실우리는진짜여행을하기위해이비수기에빠리에온것이아닌가.
호텔을피해프랑스인중류가정에민박을정한것도프랑스를제대로이해하기위한방편이었다.
이제내일부터하루하루를소중히쓰면서빠리를알아나가야한다.
일층의길가쪽방임으로늦은밤인데도빠르게질주하는차량들의소리가크게들린다.
아내는벌써깊이잠들었지만나는이생각,저생각을하면서뒤척였다.
빌리에에서의장기체류는그렇게시작되고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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