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의 자리.
오래전로마에갔을때,
마침아주오래된돌길을보수하는현장을지나가게됐다.
로마는주전8세기경에형성되기시작한오래된도시로돌을깔아만든도로가많다.
보수하는면적이컸고공사인부도여러명투입돼있었다.
자세히관찰해보니그돌길은사각형의표면지름이약15cm,높이가약25cm의
역삼각형의돌들을촘촘히박아만든것이었으며보수작업은그역삼각형의돌들을
교체하는것이었다.
나는공사책임자를만나왜돌들을교체하느냐고물었고그대답은돌들의표면이
닳았기때문이라고했다.
설명을들어보니돌의표면이1cm정도닳아부분적으로도로가함몰되었기때문에
새돌로바꾸는것이며그돌이1cm닳는데는약100년이걸린다고했다.
그러니까돌을깐지100년만에보수-교체작업을하고있는것이다.

과거로마가점령했던지역들을여행해보면그들이돌로축조한구조물들이많이
남아있는것을볼수있다.
성채,원형극장,목용탕,수로,신전,도로등이그것이다.
지금그축조물들은낡고허무러진것이대부분이다.
풍화작용(風化作用)때문이다.
풍화는지표의바위나돌이공기,물,온도의작용으로차츰부서지는현상을이르는
말이다.
예나지금이나돌은우리주변에서가장단단한물질이며사람들은이돌을이용,
가장오래보전하려는물건을만들었다.
기자의피라밋과스핑크스,
룩소의카르낙신전,
아테네의파르테논신전등은그대표적인구조물들일것이다.
우리가쉽게볼수있는무덤의비석들도마찬가지다.
그러나그구조물들도지금은풍화작용으로본래의모습을지니지못하고있다.
돌도변하는게땅의한계다.
이땅위에영원불변의물질은없다는얘기다.

세계에서제일큰사막은’사하라’다.
서로는대서양연안에서부터동쪽은나일강계곡까지약5000km,
북은지중해연안의아틀라스산맥에서남쪽은니제르강,차드호부근까지1500-
1800km,실로그넓이는아프리카대륙의4분의1을차지하는정도다.
그’사하라’가본래는울창한삼림이였었다면믿을수있을까,
그러나그건사실이다.
땅도그런엄청난변화를일으킨다.

그래서,
이땅위에’불변’의것은없다.
모든것이가변적이고예측불허다.
‘열길물속은알아도한길사람속은알수없다.’라는격언은인간의불안전성을가장
잘표현하고있다.
인간의변화무쌍한감정의세계는그가변성에서대단히두드러진다.
이렇게모든것이변하고내일을예측할수없는불안전한환경은인간으로하여금
‘불변의것-절대적인것’을희구하는염원을가지게했으며그런심정적인욕구는
종교의탄생을가져오게된다.
가장저급한수준의종교가미신-샤머니즘이다.
지구상에존재했던모든원시부족중미신없이생활한부족은없다.
(지금도부분적으로는남아있다.)
그리고인간의진화와인지(人智)의발달은드디어고등종교를탄생시켰다.

세계3대종교인유대교,기독교,이슬람은’아브라함’이라는공통되는신앙의조상을
가지고있다.
세가지종교는똑같이사막이그고향이다.
‘아무것도없는곳-사하라’가그곳이다.
신을의지하지않고는생존할수없는조건에서탄생된고등종교인것이다.
고등종교의가장큰특징은’경전’이있는점이다.
미신과구분되는가장큰특징이그것이다.
믿음의조상아브라함은갈대아(메소포타미아지역의수메르문명권)의우르출신이며
그가하나님의부르심을받고하란으로떠난것이주전2000년경이다.
직립원인(直立猿人)에서현생인류까지의500만년에비하면주전2000년은바로
어제의일이다.
인간이자기를깨닫고자기의신(神)을발견할것은바로어제의사건인것이다.

유대교와기독교에서불변의것,절대적인존재는아브라함을부르신하나님이다.
이슬람에서는’알라’라고부른다.
그절대자이신하나님께서자기를밝히드러내는장면이출애굽기3장에상세히묘사돼
있다.
이스라엘의탄식을들으신하나님께서는미디안에서양을치고있던모세를불러
자기백성에게가라고명령하신다.
그때모세는떨리는목소리로당신은누구냐고묻는다.
나는스스로있는자다-개역.
나는스스로있는나다-표준새번역.
나는스스로존재하는자이다-현대인의성경.
나는곧나다-공동.
IamthatIam-KJV.
Iam-CEV.(3장14절.)

하나님의이름을표기한,
자음으로이루어진히브리어4글자를유대교에서는
‘아도나이-주’,또는’엘로힘-하나님’으로읽어왔다.
그분의거룩한이름을직접부를수가없었기때문이다.
같은이름을70인역과신약에서는’퀴리오스-주’라고불렀으며
16세기이래이이름을’여호와’로부르기시작했으나’야훼’가원래발음에더
가깝다.
지금은대다수의번역이오랜전통에따라’주-主’로부르고있다.
결국하나님은’스스로계신분’으로그이름은’야훼’이신것이다.
스스로계신,나는나인그분은피조물이아니다.
오히려창조주이신절대적인존재다.
모든것이가변적인땅위에서,비로서사람들은’불변의절대적인기준’을
가지게되었다.

절대적인것,
그불변하는존재에접근하는길은언제나두가지다.
인간의속성이그러하기때문이다.
감성적(感性的)인접근이그하나다.
감성은느낌을받아들이는기질을말한다.
감성은역동적이고뜨거우며그지속성은아주짧다.
열광,자기도취,카타르시스의세계가그것이다.
심령대부흥회에알맞는기질들이다.
일단’뜨거웠던’장소를떠나면전혀변하지않은본래의자기로급속히돌아간다.
감성만으로는회심(回心-metanoia)이되지않기때문이다.
그일상안에는신앙의흔적도없다.
예배당안과밖이판이하게다른것이다.
이런신앙은가장중요한내면화(內面化)의과정이없기때문에끝까지겉도는,
주변부로마감하게되는경우가허다하다.
대신이런부류들이종교에입히는훼손은크다.
미신화,기복화,열광주의와자기도취가그것이며기독교무당과굿예배는이들때문에
생기게된다.
이는왜곡과변질이고사이비,이단도같은것이다.
감성적인기질이태생적이듯그행태도변하지않는다.

다른한쪽은,
감성적인뜨거운체험을이성(理性)을통해정리,내면화(內面化)하는경우다.
그신앙은’신앙고백’을통해확고해진것이며모든사고방식과행동양식은
그신앙고백에맞춰변한다.
진정한회심(回心-metanoia)이그것이다.
가변적인것으로가득찬세상안에서불변의것,절대적인기준에자기를연결한
지혜롭고현명한,선택된사람들이다.
세상을더밝게하는것도,세상의부패를막는것도빛과소금같은그들이다.
상대적으로그숫자가적을수밖에없다.

종교(宗敎)는,
‘근본을가르친다’는의미의말이다.
근본이무엇인가,뿌리다.
근본만바로잡으면나머지일들은따라서바른길로갈수있다.
그래서종교의가르침을진리(眞理-참된도리,바른이치)라고한다.
그것이종교의기능이며종교의자리다.

의,식,주(衣,食,住)-물질로만사는본능적인삶이있고,
학문과철학의세계를사는정신적인삶이있고,
종교를통해구원받는영적인삶이있다.
따라서,
본능대로만사는동물적인인간이있고,
정신으로사는이성적인인간이있고,
영혼의삶을사는종교적인간이있다.

종교는,
땅위에사는인간이도달할수있는최고의영적수준이다.
비로서인간은자기를알고,신(神)을알고,’구원’이무엇인지깨닫게된다.
그리고그선택은각자의기질적문제로귀결된다.
구원받는인간과버려지는인간이있는이유가바로거기에있다.
이구분에대한주님의답변은,
‘하나님만이아신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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