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를 가진다는것.
한인간이진지한의미에서종교를가진다는것은그삶의근간(根幹)이바뀌는변화를
의미한다.
가치관이바뀌고추구하는것이바뀌게된다.
따라서일상에서의삶의모습이바뀐다.
말하자면그깊은속으로부터딴사람이되는것이다.
성경에서’거듭난다’는말이그뜻이다.
종교적인용어로는회개,회심이라고하며더직접적인표현으로는전향(轉向-metanoia
-가던방향을바꾸는것)이라고한다.

교회에다니는사람은많지만,
전향-거듭난사람은많지않다.
한인간이신앙을가지는것이무엇을의미하는지잘모르기때문이며더큰이유는
그렇게되기위해서는기득권전체를버려야하기때문이다.
이세상에태어나는애기들은완전히빈손으로세상에온다.
전향-거듭남,회개,회심이바로그러한마음의상태를전제로하며신학적용어로는
그것을자기부정(自己否定)이라고한다.
지금까지의자기,세상의온갖것으로설명되는자기는죽고새로태어나야하기때문이다.
이것은결코쉬운일도,아무나할수있는일도아니다.
과연예배당안에는그런사람들이몇명이나있을까.
지극히적은숫자일것은말할것도없다.
거듭난다는것은이미가지고있는것들을버리지않고는이루어질수없는일이기때문에
그만큼성사되기가어렵다.
물과성령으로거듭나야한다는성경말씀은거듭나는일이인간의자기힘만으로는
어렵다는뜻이함축돼있다.

죽음의수용소에서살아남은한유대인이남긴글이있다.
그가수용소에끌려가서몸에지닌모든것을벗어놓고알몸이되어샤워장에들어갔던
체험의기록이다.
‘샤워할차례가돌아오기를기다리고있는우리들의모습은그야말로벌거숭이었다.
우리가가진것이라고는털마저깡그리깎여나간알몸둥이라는비애가,우리는문자
그대로알몸으로남은존재라는뼈아픈자각이가슴을후비고들어왔다.
지금의나를예전의내모습과이어주는외형상의연결고리는아무것도없었다.’
이름도,주민등록번호도,가족도,주소도,이웃도,
직장과직함도,그가세상에존재하는보이는흔적이모두사라진것이다.
알몸으로남은그는세상에대해’존재하지않는존재’가된것이다.
세상과의연결고리가모두없어졌기때문이다.
세상에대해죽었다는뜻이그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안에서다시새롭게살아나는것,그것이거듭남이다.
그유대인의경우는나치의유대인말살정책이라는동기가있어만들어진결과지만
지금은전적으로개인의자발적인동기에의해서만이루어질수있는일이다.
그래서어려운것이다.
하나라도더차지하기위해혈안이되어경쟁하는시대에스스로모든기득권을포기
한다는것은그것들을대체할수있는크고절대적인가치관과목표가없이는불가능
하다.

일찌기바울사도는이어려운문제에대해신앙적인설명을하고있다.
‘우리는보이는것에눈길을돌리지않고보이지않는것에눈길을돌립니다.
보이는것은잠시뿐이지만보이지않는것은영원하기때문입니다.’고후4:18공동.
이본문에서,
‘눈길을돌린다’는것은,
blepomena-본다,주의깊게살피고생각한다,깨닫는다의뜻이다.
보이는것과보이지않는것,
그것은근본적으로질료(質料)의차이다.
보이지는않지만존재하는것,
이땅위에그것을설명하는방법은없다.
땅위의것이아니기때문이다.
주께서니고데모에게’바람’으로그것을설명하신이유가거기에있다.
보이지않는것에눈길을돌린다는것은이미보이지않게존재하는것을알고,믿는
믿음이있기때문이다.
그것이영원하다는것을믿기때문에보이는것들을포기할수있다.
‘잠시’를포기하는대신’영원한것’을얻을수있다는믿음이그것이다.

더큰예배당,
넘쳐나는교인숫자.
어마어마한헌금액수,
유명한목사.
더큰파이프오르간,오케스트라,
더큰성가대와유명지휘자.
오늘날교회들은이렇게’보이는것’을위해피나는경쟁을하고있으며그것을교회성장
목회성공이라고한다.
이미그자체가교회의존재목적이되고말았다.
각종이벤트가난무하는이유가그것이다.
신앙이라는내용을담기위해보이는형식이필요한것은사실이다.
그러나그것자체가목적은아닌것이며거기에’구원’은없다.
보이는것은보이는역할로끝나는것이다.
잠시보이다가없어지는것을추구하는것이아니라영원한생명을추구한다면
보이는것이아니라보이지않는것에눈길을돌려야한다.

참으로신비한것은,
세상과나를연결하는모든연결고리가끊어지지않고는그영원한것은보이지
않는다는사실이다.
자발적인자기부정없이전향-거듭남은이루어지지않는다.
거듭났다고해서머리에뿔이나는것은아니다.
겉모습은그대로다.
변한것은속사람이기때문이다.
보이는형식을통해보이지않는내용을추구하는것이신앙생활이다.
따라서형식에서끝나면내용에는접근조차도못하고만다.
거개의크리스챤이그렇다.
보이는것에눈길을주고있는동안보이지않는것은지나가고만다.

보이지않는것을볼수있는영적인눈이곧신앙의눈이다.
그눈이있어야비로서영원한것을볼수있다.
영원한것은땅위의것이아니다.
때문에땅위의것에서자유로울수있어야비로서그것이보인다.
지금의한국개신교회들은이점을가르치지않는다.
기복(祈福)이요구하는축복(祝福)만양산(量産)하고있을뿐이다.
더위험한것은그렇게길들여진교인들은기복과축복만이기독교의전부로알고
종교의본질에는가까이가보지도못하는사실이다.
기복과축복은샤마니즘적인요소가더강한종교의한부분일뿐이다.
그것이전체가돼버린게지금의한국개신교다.

보이는것들속에살면서도영원한세계를추구하는것이신앙생활이다.
인간의온작욕망은보이는것을추구하는본능적인기능이다.
가지고도더가지려고하는그본능은바다로도채울수없다고한다.
그욕망을스스로극복하는일은가장어려운인간의과제이기도하다.
그래서진심으로보이지않는것을추구하는심령은’보혜사’의도움을받는다.
물과성령을통해거듭나는것이다.
나는과연어떤수준의크리스챤인가.
그대답은기득권에대한자기의정직한태도로설명된다.
버릴수있는자와버릴수없는자로갈린다.
그것이곧’구원’의기준이다.

‘나는분명히말한다.
부자는하늘나라에들어가기가어렵다.
거듭말하지만부자가하나님의나라에들어가는것보다는낙타가바늘귀로빠져
나가는것이더쉬울것이다.’마태19:23-24.공동.
여기에서부자는세상것을많이가지고있는자다.
그것을가지고이세상에서행복하게사는것과하나님의나라에들어가는것,즉
구원은어느한쪽의선택의문제이지두가지모두를가질수는없다는경고의말씀이다.
그것이하늘의법칙이다.
사실탐욕스러운마음은부자보다더나쁜조건이된다.
수사(修士)의방과스님들의거처는인간의가능성을보여주는땅위의표식들이다.
한인간이진정한의미에서종교를가진다는것은그만큼어렵고도깊은의미가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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