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와 구원.
은혜(恩惠)와구원(救援)은기독교신앙을설명하는핵심용어이며사용빈도가가장
높은키워드다.
나는지금까지오래동안그신앙이진지해보이는교인들에게집요하리만치은혜와
구원이무엇인가를질문해왔다.
정말놀랜것은,
아직까지이신앙적핵심내용에대해제대로설명하는교인을만나보지못했다는점이다.
알기는아는것같은데설명은못했다.
이런현상은,
한국의개신교가보이는크기에비해그내용이어느정도로빈약한가를보여주는
대표적인사례가아닐수없다.
개신교전래100년의역사와그규모에걸맞지않는가슴아픈현주소가그렇다.
교회에서사용하는은혜와구원은우리말의단어가가지는사전적의미이상의종교-
신학적인깊은뜻이있다.
두단어는교인들의구원된삶과직결되는의미심장한내용이있음에도불구하고
그것을제대로설명하는교인이없다는것은신앙적인위기로볼수도있다.
한국의개신교가보이는규모에비해내실을다지지못한취약성과함께오늘의교회가
가지고있는반신앙적이고비신앙적인요소들이우리가알고있는수준보다더깊고
크다는반증도된다.

신앙생활의궁극적인목표가은혜와구원에있는이상이문제는반드시해결해야할
시급한숙제이기도하다.
종교-신앙생활이신학(神學)이라는학문분야를필요로하는소이도거기에있다.
공부하지않는신앙이경전의내용과다른것이되는이유도마찬가지다.
‘굿같은예배’로는결코도달할수없는높은언덕이그렇다.
은혜와구원을제대로알기위해서는사유(思惟)의과정을거쳐깨달음에이르러야
하는데그중요한과정들은반드시’조용한환경’을필요로한다.
소란과소음속에서깨달음은얻을수없기때문이다.
혼자서자기가자기를대면하는조용한자기성찰의시간없이은혜와구원은알아지지
않는다.
신앙은내면화(內面化)에서비로서결실하기때문이다.

신앙생활에서의은혜는,
주관적체험의방법으로설명하는것이효과적이다.
성격이기록하고있는은혜라는헬라어단어는karis다.
하나님이인간에게베푸시는사랑이그한가지다.
즉인간이하나님으로부터받는선물이은혜다.
그리고은총(恩寵)은karisma다.
인간이받는은혜를다르게이르는말이다.
하나님의특별하신사랑을그렇게부른다.
이중요한두단어의어근(語根)이kara이며그뜻은’기쁨’이다.
은혜는그의미에서이어근으로설명하는것이가장적절한방법이다.

신앙적으로느끼는’기쁨’은세속적인의미와는너무다른것이기때문에,
너무나역설적이기때문에종교적이다.
예를들어이웃을돕기위해내것을내어주고,결과적으로그것은내게’손실’인데도
마음은오히려기쁜것,그게kara다.
다른사람에게높고좋은자리를내어주고나는스스로낮은자리에앉았지만오히려
그사실이더기쁠때,그게kara다.
그것은예수의마음을닮은자만이가지는아주특이한기쁨이다.
성경말씀을공부하면서어떤깨달음에이르렀을때,
설교말씀을듣다가가슴속으로기쁨을느낄때,
성가대의찬양을듣거나내가찬송을부르면서기쁨을느낄때그건모두kara다.
그래서은혜는기쁨이다.
그기쁨은세상어떤것에도근거하지않는신앙적기쁨이다.
이기쁨은값싼흥분이나감상,감동과는전혀다른것이다.
많은사람들이그게은혜인줄잘못알고있다.
신앙적인기쁨은어떤경지에이르러서야비로서체험할수있는신비한세계다.
은혜가신앙적기쁨인이유가거기에있다.

우리의구원은신앙생활의최종적인목표다.
구원을의미하는헬라어는soteria다.
위험이나임박한죽음으로부터구출한다는의미다.
구원의문제는주님의말씀으로설명하는것이가장선명하고자연스럽다.
‘여리고’는인간이만든가장오래된도시다.
이여리고를무대로삭개오와예수가보여주는극적인장면은누가만이기록하고있다.
(19:2-10)
이곳에는세관장(chief,taxcollector)삭개오가살고있었는데이곳을지나시던
주께서는자청해서삭개오의집에들어가셨다.
로마는그식민지에대해경쟁입찰방식으로세금을징수했다.
따라서한지역을낙찰받은징수업자는현지인을고용,로마군의지원을받으며세금을
징수하게되는데그과정에서토색(討索)질이자심했다.
하나의근거로,
삭개오는자기가납세자들을속여징수한세금에대해네배로갚아주겠다고했다.
당시관행이도둑질한물건에대해서는네배로갚았으며,다른의미에서는네배에
가까운토색질이있었다는얘기다.

삭개오와같은당시의세리는모든유대인의멸시를받았으며배제의대상이었다.
재산은많았지만인간적인대우는받지못한것이다.
그런삭개오의집에주께서들어가신것은삭개오로서는감당하기어려운영광이었다.
자기가가진재산의반을가난한자들에게나누어주고토색질한것은네배로갚겠다는
삭개오의태도는예수때문에일어난,글자그대로의’변화’다.
사람이달라진것이다.
그것은그누구도예기치못했던사건이다.
‘주예수내맘에들어와계신후변하여새사람되고.’
찬송가208장의가사가그뜻이다.
‘물밀듯내맘에기쁨이넘침은주예수내맘에오심.’
기쁨이변화로이어지는이체험이바로구원이다.
삭개오의놀라운변화를지켜보신주께서는
‘오늘이집은구원을얻었다.’고선포하신다.(9절)

변화가구원인것이다.
변화가무엇인가.전과는다른사람이되는것이변화다.
겉은같은사람이지만그속은딴사람이되는것이다.
그래서은혜와구원은같은뿌리의서로다른열매다.
똑같이평생예수믿어도변화가없는믿음은거짓신앙이다.
기쁨-kara없이구원-soteria은없다.
삭개오의기쁨은예수가자기를인간적으로인정해준,아브라함의자손,같은유대인
으로인정해준조건없는사랑이었다.
그사랑의기쁨이삭개오를변화시킨것이고구원받게한것이다.
잃어버렸던자를찾으시는주님의역사가삭개오를구원하신것이다.
이제한가지더살펴봐야할대목이있다.
삭개오는이미소문을통해예수를알고있었다.
여리고를지나가는그분을보기위해무화과나무에올라갔고드디어예수의눈에
뜨인것이다.
삭개오는예수가찾기전에먼저그분에게나아갔다.
키가작은그는예수를보기위해나무에올라가는적극성을보여주고있다.
한인간이구원을얻기위해그자세가어떠해야하는지를알게해주는대목이다.

은밀한신앙적기쁨을맛보는것도,
그기쁨을통해변화하는것도우리에게주신구원의길이다.
여기에는전혀차별이없다.
오히려차별을만드는것은인간들이다.
모두에게열려있는그정도(正道)로들어서는사람이있고,
그옳은길을옆에두고딴길,멸망의길로들어서는많은사람들이있다.
‘좁은문으로들어가거라.
멸망에이르는문은크고또그길이넓어서그리고가는사람이많지만생명에이르는
문은좁고또그길이험해서그리고찾아드는사람이적다.’마태7:13-14.공동.
결국선택의기준은’어려운쪽’이다.
그것도자발적으로그렇게해야한다.
누가그렇게할수있는가.
‘은밀한기쁨’을맛본사람들이다.
‘네가하나님의나라에가깝도다.’주께서하신말씀의뜻이그것이다.
은혜와구원은각각다르게쓰이는말이아니다.
은혜와구원은하나로연결되는통로이기때문이다.
성경이사용하고있는은혜와구원에대해바로아는것,그것이바른신앙생활의첫번째
조건이다.
우리가구원에이르는길이그안에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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