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붐비는도심의거리에서한남자가약1분동안그자리에서서하늘을
쳐다봤다.
대부분의행인들은별관심을가지지않고그남자를지나쳤지만4퍼센트정도의
사람들이잠시멈춰서서그남자처럼하늘을쳐다봤다.
다섯명이서서하늘을쳐바봤을때는약18퍼센트의행인들이함께하늘을쳐다봤고
15명이되자거의40퍼센트의사람들이서서하늘을쳐다봤다.
사람의어떤행동이다른사람들에게미치는영향을연구하는사회심리학자들의
실험이그렇게진행된것이다.
이실험은사람들이비판없이다수의행동이나의견은옳다고생각하는성향이
있음을알아내려는것이었다.
간선도로에있는횡단보도의경우,
빨간불이켜져있지만길에통과하는차량이없자한두사람이그횡단보도를건너간다.
그러나그숫자가많아지면너도나도합세,빨간불이켜져있지만이를무시하고
무단횡단을감행한다.
법을어기는일도여럿이함께하면따라하게되는것이다.
앞의실험은다수의행동에대해비판없이따라가는경우이고뒤의경우는나쁜일인줄
알지만여럿이함께어기고있으니슬쩍편승하는케이스다.
다른사람들의행동에따라옳고그름을결정하는것을’사회적증거(socialproof)현상’
이라고한다.
말하자면사회적증거에따라행동하면실수할확율이줄어든다는판단때문에많은
사람들은다수의행동을따라하게된다.
긴줄에서는것이안전하다는생각과같은이치다.
소속교단으로부터사이비,이단판정을받고출교된교회가있다.
말하자면파문된것이다.
그러나그교회는이에불복,스스로총회를만들고신학교까지운영하며교세를키우고
있다.
그예배형식과내용이’굿’을좋아하는사람들의성향에맞았고,많이모이기때문에
사회적증거현상에따라계속사람들이모여든것이다.
여럿이가는길이옳고안전하다는생각에서줄을서는것이다.
‘좁은문으로들어가라.
멸망에이르는문은크고또그길이넓어서그리로가는사람이많지만
생명에이르는문은좁고또그길이험해서그리고찾아드는사람이적다.’
마태7:13-14.공동.
주께서는세례요한을’위대한선지자’로존경했다.
세례요한이죽임을당한후상당수의그의제자들이예수의제자가되었다.
두사람의가장큰공통점은,
세상을역류(逆流-거스려흐름)한삶이다.
요한은광야의외치는자의’소리’였고,
주께서는십자가를피하지않음으로자기의정체성을지켰다.
그들의삶은많은사람들이가는방향과는정반대였다.
넓고편안한길을두고좁고험한길을택한것이다.
본문은그렇게하는이유를구체적으로설명하고있다.
넓고편한길의끝은멸망이고좁고험한길의끝은구원이다.
좁은문,험한길을택하라는권고의뜻이그것이다.
어떤면에서신앙생활은세습(世習)에대해역류,역행하는삶이다.
많은사람들이가는길을따라가지않는삶의양식이다.
말하자면자발적으로좁은문,험한길을택한삶이다.
여기에는,
아흔아홉사람이옳다고해도그른것은그른것이고
한사람이외쳐도옳은것은옳다는판단과신념이있어야한다.
그리고그신념과확신은냄비바닥같은약팍한흥분이아니라긴사유(思惟)를
거친결론이기도하다.
스스로좁은문험한길을택하기위해서는그끝에대한확신이있어야한다.
구원에길에대한믿음이있어야한다.
그건어디에서오는것일까.
예수와부딛친체험이없으면그런확신은가지기가어렵다.
그건예수에게’승복’하는자만이가지는확신이다.
승복한다는것은무엇인가.
그를알고,그의말씀을이해하고동의한다는의미다.
그가르치심을따라살겠다는결단이다.
그래서스스로좁은문을택한자들은’성경’을공부하는사람들이다.
‘예수에대해’아는것이아니라
‘예수’를알기위해노력하는사람들이다.
예수를만나는길이성경안에있다는것을체험으로알고있는사람들이다.
싸구려신앙으로는도달할수없는다른차원의세계가그것이다.
넓고,크고,편한길은싸기때문에사람들이몰린다.
그러나좁고험한길은비싸기때문에그리고찾아드는사람이적다고했다.
공관복음서들을자세히읽어보면,
이복음서를기록한초대교회사람들의눈물나는노력을엿볼수있다.
수많은재래종교의우상들과경합했던시대,
자기들이섬기는예수가그들의우상들보다절대적인우위에있어여했기에그들은
인간예수에게수많은신화적수식어를입혀그를설명해야했다.
세월이흐르면서인간예수보다는그리스도예수로서의온갖수식이여기에더해져
예수의신격화는극에달하게된다.
그건피할수없는모든종교의속성이기도하다.
그러나,
공관복음서들을잘읽어보면인간예수의살아있는음성을들을수있다.
60개가넘는그분의예화들은인간예수를만날수있는통로들이다.
그통로를통해먼저인간예수를만나야한다.
그분과부딛쳐넘어지는사건은그다음에일어난다.
그리고그사건을겪은자만이스스로좁은문을택할수있다.
그리스도예수이전에나사렛예수를먼저만나야하는것이다.
세습(世習)을역류하는사람들은,
자기가받은탈란트대로기능한다.
일상안에서크리스챤으로사는것이다.
그들의역할이사회공동체에서순기능이되는것은지잔해서어려운쪽을선택하기
때문이다.
그어려운쪽은한사회공동체가가지고있는취약점들이다.
모두가기피하는그약점,어려운쪽을선택해서감당하는사람들이이시대의살아있는
크리스챤들이다.
그들은너무나조용하기때문에알려지지않는다.
오른손이하는일을왼손도모르는사람들이다.
언제나크고,넓고,쉬운길을가는사람들이좁고험한길을택한사람들보다는
압도적으로많은게세상이다.
가장큰이유는,
대부분의사람들은많은사람들이가는길을따라가기때문이다.
그끝이무엇인지,그길을가는자기의목적이무엇인지모르는사람들이다.
‘예수에대해서’는귀동냥을통해많이알지만,
정작’예수’에대해서는아는게없다.
그를만난적이없기때문이다.
따라서도착하는끝도서로다르다.
한쪽은멸망이고다른한쪽은구원이다.
‘좁은문으로들어가라’는주님의말씀은말하자면길을안내하는경고의말씀이다.
들을귀가있는자는알아듣지만그귀가없는자는알아듣지못한다.
이태생적인차이는어디에서오는것일까.
인간이그대답을할수없기때문에믿음의신비한세계가있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