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년이아닌,수십년전의사진이라면더더욱그렇다.
오래된사진속의’나’는지금의나와는아주다른순수한모습을간직하고있다.
그사진은세월의흐름을실감하게해주며지금의내가그때의나와얼마나다르게
변했는지도알게해준다.
그래서오래된옛사진을꺼내보는것은말하자면하나의반추(反芻)라고할수있다.
그렇게함으로서과거가현재와연결돼있는현실을이해하게된다.
과거가없는현재가있을수없다는당위도알아지게된다.
그건하나의깨달음이기도하다.
미북장로교회목사언더우드(HoraceGrantUnderwood1859-1916)와
미감리교목사인아펜젤러(HenryGerhartAppenzeller1858-1920)가제물포를통해
조선땅을밟은것이1885년4월5일,지금으로부터121년전의일이다.
그들의선교는크게결실하여지금한국의개신교는세계적인교회로성장했다.
특히한국개신교의빠른성장은세계교회가연구하는과제이기도하다.
개신교의옛사진을보면지금과는아주다른교회의모습을볼수있다.
그사진들을통해그때조선에서의교회의기능과역할을읽을수있다.
그리고그기능과역할은오늘날교회의큰바탕이었음도알게된다.
여기에는미국선교사들이가지고온것이성경뿐아니라선진서양문물(西洋文物)도
포함되어있었으며그것들은복음을전하는데유용한도구가되었던점도알수있다.
크게봐서선교사들이가지고온복음과서구의문물은조선의근대화에아주큰
영향을끼쳤다.
우리는교회의옛사진들을통해그러한사실을확인할수있으며왜그때의교회가
우리사회공동체에서선구적인자리에있었는지를이해하게된다.
장로교를기준할때,
장로,권사,안수집사는항존직(恒存職)이다.
그런데이항존직의임명은선거를거치게된다.
말하자면교인들이이를위해’투표’를하는것이다.
교회의’선거’는우리사회에서는가장앞선민주주의방식에의한선출이었고
교인들에게는민주주의를몸으로체험하는제도였다.
교회의민주적인선거방법은사실상이땅에서실시된초기의선거였으며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정치체제를채택,운영하는데커다란디딤돌이된것이사실이다.
과거에있었던온갖부정선거들은교회에서는없던일이다.
그만큼교회는정치적으로도앞서있었다.
특히6.25전쟁직후.
대부분의고아원과모자원(母子院)은교회가운영했다.
대량으로발생된전쟁고아와미망인들은달리그몸을의탁할시설이없었다.
빈약한국가재정은이들을감당할수없었으며교회이외에이들을수용할수있는
기관도없을때였다.
그때의교회는똑같이어여웠지만이들을거두어들였고주변의가난한자들을책임
졌다.
지금도무료급식소운영에서기독교가차지하는비율은타의추종을불허한다.
고종(高宗)임금은,
민영익의생명을구한시의(侍醫)알렌선교사에게제동에있던홍영식의저택을하사,
병원을개설하게했으며광혜원(廣惠院)이란이름까지지어줬다.
나중에제중원(濟衆院)으로개칭된이병원은한국에세워진최초의현대식병원이다.
그것이1885년4월의일이었으며1886년제중원은의학교육부를부설하여한국최초의
현대의학교육을시작했다.
1900년,이교육기관에미국인L.H.세브란스가거액을기부,지금의세브란스병원의
기초를놓았다.
개신교와함께이땅에들어온현대의학과병원이우리사회에기여한공로는필설로는
다설명할수없는넓이와깊이를가진다.
그리고지금도마찬가지다.
배재학당은,
1885년8월선교사H.G.아펜젤라가세운우리나라최초의근대식중,고교육기관으로
오늘의배재중,고등학교의전신이다.
지금의이화여자대학교는,
1886년미국인선교사스크랜튼부인에의해설립됐으며
1887년명성황후로부터’이화학당(梨花學堂)’이라는교명을하사받았다.
대학과정(전문학교)은1910년에시작했다.
연세대학교는,
1915년선교사언더우드가경신학교(敬新學校)를세우고여기에대학부를설치한것이
그시초다.
1923년연희전문학교로개칭됐으며1946년8월연희대학교로승격됐다.
1957년1월,세브란스의과대학을병합,교명을연세대학교로바꿨다.
작고하신내자당께서는1919년생으로구세대에속하는분이었지만한글을읽고쓰는
일에불편이없었다.
그분은’성경학교’출신으로교회에서한글을배웠다.
조선의개신교는문맹퇴치에있어지대한공헌을했다.
특히울타리안에갇혀있던아녀자들에게한글을교육시킨것은한국근대와의커다란
촉매라고할수있다.
우리나라가세계적으로문맹율이낮고문해율이높은것은교회와교회가세운교육기관
의놀라운기능에힘입은바크다.
내가최초로접한서양물건은’풍금’이었다.
어머니를따라다녔던예배당에그풍금이있었고의자없이마루에방석을깔고앉아
예배드리던시절나는풍금을가까이볼수있는앞자리에앉곤했다.
그것은내게있어너무나신기한물건이었다.
그나무상자안에서아름다운소리가나온다는것은흡사마술같았다.
지금내가organ음악을가장좋아하는이유도따지고보면그풍금때문일것이다.
한국의서양음악은,
교회의종교음악없이는설명이안된다.
보통사람들손에악보가들려지고풍금소리에맞춰노래를불렀다는것은한국근대화
과정에서획기적인사건이라할수있다.
1919년3월1일,
기미독립운동에서한국이독립국임을만방에선포한글이’독립선언서’다.
일제하에서이선언서에죽기를각오하고서명한민족대표는33인이었고
그중목사와장로가16명이었다.
당시교회의수준과위치를알게해주는소중한자료가아닐수없다.
옛사진의이부분만들춰봐도,
한국의교회는조국근대화에있어가장영향력이큰조직이었다.
그때의교회는시대를앞서가는향도였으며서양의문물을흡수,사회에전하는촉매
였다.
기독교자체가선진국에서들어온외래종교였으며그신앙내용과예배형식,교회건물
등은근대화의상징이기도했다.
그렇게교회는한시대와사회공동체를앞서나가는놀라운기능과조직력을가지고
있었다.
지금의한국교회는,
어떤면으로도사회보다앞서있는부분이없다.
오히려뒤떨어져있는측면이더많다.
과학과기술,정보의전달수단에서사회가교회를앞섰기때문이다.
그리고그건당연한귀결이다.
문물이전달되는통로가과학의수단을이용하는것이현대이기때문이다.
개체교회의예배당건물을아무리키워도정부종합청사처럼될수는없고,
교인의숫자를아무리늘려도군대의수준에이를수없다.
아무리헌금을강요해도은행의규모를따라가지못한다.
온갖이벤트로승부를걸어도흥행업체를이길수는없다.
가장큰이유는,
교회는그본질이보이는것이아니기때문이다.
비록선교초기에근대화의기능을담당했다하더라도그것을요구하던시대가지나가면
그기능은없어지는것이다.
왜냐하면교회의본질은그런기능이아니기때문이다.
그것들은어디까지나부차적인것이다.
그런데도지금까지’보이는기능’으로세상과’경쟁’하려고하는것은자기가누구인지
모르는어리석음때문이다.
교회의자기정체성은’진리안에있는존재’다.
성경의모든내용은세상과경쟁하지않는다.
세상도교회의정체성과경쟁하지않는다.
그본질에서전혀다른차원의문제이기때문이다.
교회의사명은세상의구원이지세상과의보이는경쟁은아니다.
이착각과잘못을빨리깨달아야한다.
주께서부활하신후,
베드로에게세번’네가나를사랑하느냐’하고물으셨다.
베드로가’내가주를사랑하는줄주께서아시나이다’하고대답했을때,
‘내어린양을먹이라’고세번이나당부하신다.요한21:15-17.
양을먹이라는것은무슨뜻일까.
그하나가bosko-feed,로서가축을친다,먹인다의뜻이며,
다른하나는poimaino-shehperd,로서먹이는일뿐아니라돌보고감시하는것까지
포함하는단어다.
목사가하는일을목회(牧會),또는목양(牧羊)이라고하는근거가바로이말씀이다.
그래서목사는현대의목동이다.
한사람의목동이돌볼수있는양의숫자는얼마나될까.
아무리많아도기백마리수준이다.
기천,기만이모이는교회를목회,목양이라고할수없는성경적인근거가그렇다.
그건교회가아니라보이는것으로세상과경쟁하는인간집단일뿐이다.
오늘한국개신교의가장큰병폐가바로그점이다.
자기정체성(종교의신비)을상실하고본질에서떠난교회를’에클레시아’라고
부를수없는소이도그것이다.
한번원칙을어기면헤어날수없기때문이다.
그래서그런교회들은결코’주님의몸된교회’는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