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도무지 모른다.
‘주님,우리가주님의이름으로예언을하고,
주님의이름으로마귀를쫒아내고,또주님의이름으로많은기적을행하지
않았읍니까.’
사실,예언과마귀를쫒아내는일과,기적들은보통의신앙심으로는이루어내기
어려운일들이다.
모두가그런수준에가있기를열망하지만결코쉬운일이아니다.
그만큼그런능력들은크게칭찬받아마땅하고큰상급을받아야한다.
그런데주께서는바로그렇게말하는자들을향해,
‘악한일을일삼는자들아나에게서물러가라나는너희를도무지알지못한다.’고했다.
정말놀라운,뜻밖의말씀이다.
칭찬과보상을기대했던자들이한순간에악을일삼는자들이되어철퇴를맞은것이다.
그이유는이단락의앞부분에제시되어있다.
‘나더러주님,주님하고부른다고다하늘나라에들어가는것이아니다.’

예수를주님으로부르는사람들이크리스챤이다.
그중에는더큰소리로더자주주님을부르는사람들이따로있다.
겉으로봐서는그들의신앙을따를자가없을정도다.
강단의사자후와팔을뻗치고절규하는아멘,
5분에한번씩내려지는축복과이에화답하는아멘,
그거창한군중집회는어떤경고도비집고들어갈틈이없다.
그리고그들은외친것이다.
우리가주님의이름으로예언을하고,마귀를쫒아내고,기적을행했노라고.
그런데도주께서는’나는너를도무지모른다’고단호히대답하신다.
그이유는,
‘하늘에계신내아버지의뜻을실천하지않았기때문이다.’
마태7장21-23절의내용이다.
‘행함이없는믿음은그자체가죽은것’이다.야고보2:17.
왜행함이없었을까.
성경적의미의’신앙-믿음’이없었기때문이다.
그들은자기도취와값싼흥분을믿음과은혜로착각하고있었기때문이다.
사실은’굿’을했는데,
예언을하고,마귀를쫒아내고,기적을행한것으로착각한것이다.
그렇게가르쳤고,그렇게배웠고,함께그렇게된것이다.

마태복음25장31-46절은,
마태만이수집한자료다.
이단락을’최후의심판’이라고부른다.
양(羊)으로분류되어임금의오른쪽에자리잡은사람들에게임금이말한다.
‘너희는내아버지의축복을받은사람들이다.
내가굶주렸을때에먹을것을주었고,
목말랐을때에마실것을주었고,
나그네되었을때따뜻하게맞이했다.
헐벗었을때에입을것을주었으며,
병들었을때에돌보아주었고,
감옥에갇혔을때찾아주었다.’
그때구원받은사람들이대답한다.
‘우리가언제그랬읍니까?.’
이들은자기들의선행에대해기억도못하고있다.
한편,염소로분류되어외편에자리잡은사람들은,
‘주께서언제그런일을당하셨읍니까.’하고묻는다.
그럴기회가없었다는항변이다.
그들은오직예수에게만그렇게하려고벼르고있던사람들이다.
그들이들은대답은,
‘저주받은자들아나에게서떠나악마와그졸도들을가두려고준비한영원한불속에
들어가라.’
양은하나님의뜻-말씀을일상안에서실천한사람들이고,
염소는비일상적인신앙이었기때문에일상안에서실천이있을수없었다.
이름은같은크리스챤이지만전혀다른두세계로나위어져있었던것이다.

왜이런일이생겼을까.
왜이렇게무서운차이가발생한것일까.
양들에게는믿음이있었고염소들에게는믿음이없었기때문이다.
이때의’믿음’은기독교의경전인’성경’이요구하는믿음이기준이된다.
참믿음은일상안에서선을실천했지만거짓믿음은일상밖에서인간적명분과욕망에
집착했기때문이다.
일상에없는것은거짓이며비일상적인믿음은’미신’이다.
기복신앙과광신이바로그런것이다.
가장큰특징은’미신’에는아가페-기독교의’사랑’이없다.
실천할수있는기능자체가없는것이다.
주께서그들을향해
‘나는너를도무지모른다.’고하신말씀이바로그뜻이다.
예수와무관한,예수없는,간판만의기독교신앙을가졌기때문이다.
그들이염소로분류되어거부당한것은지극히당연한귀결이다.

지난11월30일.
기독교백주년기념관에서’목회와사회학연구소’와’일상과초월’의공도주최로
최근10년간카톨릭신자가급증한원인을분석하는포럼이있었다.
지난5월에발표된통계청자료에의하면카톨릭신자는1995년의295만명에서
2005년에는221만6천명이늘어난516만6천명이되었다.
실로놀라운증가가아닐수없다.
반면개신교는876만명에서861만명으로15만명이감소했다.
아마도이역전은한국개신교100년역사에서처음있는일일것이다.
이역전은현실인동시에매우상징적인일이기도하다.

오경환신부는그주제발표에서카톨릭신자의증가요인으로,
-민주화와인권증진과정에서카톨릭의긍정적역할,
-사회봉사와사회복지분야에서의헌신.
-타종교에대한개방적이고관용적인자세를꼽았다.
한편박영신교수는개신교가침체국면을면하지못하고있는것은
-종교로서의성스러움을잃어버리고물질주의와경제지상주의와궤(軌)를
같이하고있는점을지적했다.
이들의주제발표가완전한것은아니라해도문제의핵심을드러내는데는전혀문제가
없을정도로충실한것이다.
그것은이문제에관심을가지고있는보통사람들의생각과크게틀린것이아니기
때문이다.
단지이들이그생각들을전문가의입장에서학문적으로정리,발표한것이다.

민주화와인권,사회봉사와복지,개방과관용의자세는모두가긍정적인기능이다.
사회공동체안에서의종교의순기능이제대로그역할을한것이다.
그것이폭발적인신자의증가로나타난것이이를증명하고있다.
다른하나는개신교에서카톨릭으로옮겨간사람들이
‘성당은조용하고성스럽다’고말하는점이며이는종교본연의’경건’이있다는
의미다.
여기에는카톨릭이가지는하향식조직과전통,미사가가지는염격한’형식의틀’이
종교의변질을막는구실을한것은더말할것도없다.
또유럽에서전래된교회답게보수적인입장을견지한것도다른요인이될수있다.
앞으로도카톨릭은지금과크게달라지지않을것이다.
교황을정점으로하는견고한피라밋구조를가지고있기때문이다.

개신교의침체와교인의감소에서가장먼저지적된이유가
‘종교로서의성스러움을잃어버렷다.’는것이다.
종교와세상을극단적으로분류하는표현이성(聖)과속(俗)이다.
따라서성스러움-거룩함과경건을상실했다면이미종교는아니다.
문제의핵심이바로여기에있다.
그외형적규모가아무리커도성(聖)이없다면그건속(俗)이다.
단지세상의인간잡단일뿐이다.
여기에더해,
‘물질주의와경제지상주의와궤를같이하고있다.’면종교와는거리가먼,단지
인간의기업화된집단이라는뜻이된다.
카톨릭으로옮겨간이들의지적을더들어보자.
‘교회는화려하고활기차지만시끄럽고가볍다.’
시끄럽다는것은경건이없기때문이고가벼운것은종교가아니기에그안에내용적
무게를가질수없기때문이다.
박영신교수의지적은오늘날한국개신교가직면한심각한문제의정곡을찌르고
있다.
한국의개신교는성(聖)을상실했기때문에’예수그리스도의몸된교회’는될수없다.

사교(邪敎)라는말이있다.
그릇된교리로사회에해를미치는종교로서사종(邪宗)이라고도한다.
인간이하나님을믿고그말씀에순종하는삶을사는것이아니라자기의이익과
욕심을위해종교를수단화할때그것은사교가된다.
기독교의미신화-기복화가바로그것이다.
우리민족의고유한종교성이여기에가세,’예수무당’을만들어낸것이좋은본보기다.
본래우리의전통종교가’샤머니즘’이기때문이다.
여기에는한국개신교의상향식조직과지나친개교회주의,계속된교회분열과무허가
불법신학교의증가,여기에서배출되는함양미달의목회자들,그리고수요와공급이
맞지않는목회자과잉공급이교회의변질을가져온직접적인원인들이된다.
넘쳐나는저질목회자들은무서운경쟁에서살아남기위해못하는일이없다.
교인의확보를위해서라면수단방법을가리지않다보니인간에게’영합’하는속(俗)
된집단을만들어내게되는것이다.
한가지를더하자면미국산(양키버전)싸구려복음주의가그것이다.

한국의개신교가성스러움을잃어버린또하나의신앙적인이유가있다.
‘스스로속이지말라
하나님은만홀(漫忽)히여김을받지아니하시나니사람이무엇으로심든지그대로
거두리라자기의육체를위하여심는자는육체로부터썪어진것을거두고성령을
위하여심는자는성령으로부터영생을거두리라.’갈라디아6:7-8개역.
하나님을만홀히여긴것이다.
만홀이는mukterisou-mocked-비웃고업신여기고조롱한다는뜻이다.
하나님의말씀에순종하고그말씀에따라그분을믿은것이아니라자기멋대로,
자기가하고싶은대로,자기식대로하나님을믿은것이다.
이보다더큰죄는없다.
성령을거스린죄가여기에해당된다.
그보응이,그심판이,
‘나는너를도무지모른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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