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믿는다는것.
종교(宗敎)는그문자적의미가’근본을가르친다’는뜻이다.
사전에서는,
‘신(神)이나절대자의존재를인정하고일정한양식,형식을통해그를믿고숭배하고
받듦으로서심리적인평정과행복을얻으려는정신문화의한가지체계’라고설명한다.
원시종교의대표적형태의하나인애니미즘(animism)은,
사물에는영력(靈力)과생명력이함께있으며일상의여러가지현상들은그것들의
작용이라는세계관이다.
종교학자들은이애니미즘을종교의기원으로본다.
다른하나가토테미즘(totemism)으로서토템은미개사회에서부족,또는씨족과특별한
혈연관계가있다고믿어신성시(神聖視)하는동물,또는자연물을이르는말이며
토테미즘은그러한조직적형태를일겉는말이다.

학문적으로는애니미즘이나토템이즘은원시신앙으로분류,그미신적인요소들을
지적하고있으며기독교,불교,이슬람등은경전을가진고등종교로분류한다.
이에비해샤머니즘(shamanism)은원시종교의한형태로서샤먼(영적존재와교류하는
사람)이초자연적존재와의직접적인교류에의해점복(占卜),예언,병의치료등을
담당하는종교적현상으로파악한다.
미신(迷信)은,
종교적,과학적관점에서망령된것으로인정되는신앙을의미하며점복,금기,굿따위를
수반하는민속신앙이다.

우리나라의재래종교가샤머니즘임은이미학계에서정리가끝난얘기이며샤먼은곧
무당이다.
점복,금기,굿은전통적인민속신앙의대표적인형태로서오래동안우리민족의일상속에
깊이스며있는습속이기도하다.
우리가우리의전래종교인샤머니즘을심도있게통찰해야하는이유는외래종교가
토착종교로부터받는내용적영향이자칫그종교의본래적인것들을전혀다른것으로
변질시킬수있기때문이다.
불교사찰에서부적(符籍)을써주는것이그대표적인사례이며,
기독교에서한때심령대부흥회가맹위를떨친이유도그러하다.
특히교단에서이단으로출교된특정인이그교단보다더큰규모로’집단화’하는것도
그특정인이가지는샤머니즘적카리스마가한국인의종교적심성에먹혀들어갔기때문
이다.
영력이넘친다는,사자후를하는부흥강사와뜨거운부흥회는그대로’굿’이다.
규모만좀더커졌을뿐이다.

한국의기독교(특히개신교)가단시일안에기록적인성장을이루어낸것도그선교방식
의샤머니즘적채택이큰원인임을간과해서는안된다.
결과적으로는양적인성장은이루었지만기독교자체가그정체성에서왜곡된것이그
때문이다.
지금은여기에서한발더나아가종교가가지는신앙내용까지변질,기복화,물량화
됨으로서기독교아닌’다른것’이돼가고있다.
이대로간다면한국의개신교는성경,경전과는무관한,가장한국적인다른종교로
정착될것이다.
기독교의옷을입고있는’현대판샤머니즘’이그것이다.

‘예수를믿는다’는것은,
예수를믿는한인간이종교를가진다는뜻이다.
이점은아주중요하다.
한인간이종교를가진다는것은그전까지와는전혀다른인간이됨을의미하기때문이다.
기독교용어로그것은’거듭남’이며대표적인정서가가치관의변화다.
거듭남이없이는죽을때까지예배당에나가도’한번난사람’으로끝난다.
때문에예수를올바로믿기위해서는이미검증된정도를따라가야한다.
좁고험한길이그길이다.
여럿이간다고해서넓은길에들어서면그것으로끝이다.

제일중요한신앙적과제는,
내가믿는예수에대해올바로아는일이다.
예수도제대로알지못하면서예수를믿는다는것은있을수없는일이다.
예수에대해가장올바르게아는길은자기가성경을읽는방법이다.
특히공관복음(마태,마가,누가복음)을주의깊게읽어야한다.
남이읽어줘서도안되고남이얘기해주는예수만알아서도안된다.
자기가직접예수에대한기록들을제대로읽어야한다.
창세기부터계시록까지의66권을몇번씩통독하는사람들이있다.
그리고그걸자랑한다.
66권을백번읽어도’예수’에대해제대로알지못한다면그건아무소용도없다.
무서운율법주의일뿐이다.
예수를바로믿고구원받기위해서는그무엇보다도예수에대해’읽어야’한다.
인간예수를먼저만나야그다음으로나아갈수있다.

다음으로복음서를통해그분이무엇을가르쳤는지를깨달아야한다.
이때마가복음과요한복음이중요해진다.
예수는제자들이’랍비’라고부를정도로지식인이며학식이있는선생이다.
특히그분은뛰어난이야기꾼으로서공관복음에는60여개의쉽고재미난예화들로
가득차있다.
그분은자기를따르는대다수의사람들이비천한계층임을알고있었기때문에아주
쉽게,누구나알아들을수있게자기의가르침을설명하고있다.
그분의가르치심을제대로아는것,그것이예수를바로믿는첫걸음이다.
반드시그분의가르치심을자신이직접읽고깨달아야한다.

다음단계가바울사도의서신들을읽는것이다.
특히갈라디아서는필수적이다.
예수가왜그리스도인지,
왜그분을사람들이’하나님의아들’이라고부르는지,
율법과믿음의관계는어떻게설정해야하는것인지,
예수의가르치심이사람들이생활하는일상에서어떻게적용돼야하는지,
문제가생겼을때어떻게해결해야하는지,
그래서고린도전,후서는더무게를가진다.
바울은유대인이지만디아스포라가정에서태어난베냐빈지파의,당대최고의지식인이다.
그는유대교와헬레니즘에통달했고,히브리어와헬라어를완전하게구사하는,로마
시민권을가지고있는다소(터키의타르소스)태생의바리세인이었다.
그리스도에대한바울의열정은기독교를유대교에서분리해냈으며종당에는
그그리스도를위해순교까지했다.
바울사도의귀한서신들은우리가예수를바르게믿을수있는거의유일한길라잡이
이기도하다.

예수를바르게,제대로믿고있다면,
그신앙은자기의’일상’안에살아있어야한다.
그래서자기의신앙은자기가점검할수있다.
예배당문을기준할때,
살아있는신앙은그안과밖에서똑같아야한다.
조금이라도차이가난다면그이중성은거짓이며죄악이며위선이다.
하나님께서가장가증하게보시는게바로그위선이다.

개신교신도가천만에육박해있어도우리사회에서그영향력이없는것은그들의
신앙이일상-사회안에없는’죽은신앙’이기때문이다.
예배당숫자가아무리많아도,교인수가천만에이르러도죽은믿음으로는살아있는
사회에영향을끼칠수가없다.
사람사는모든곳에서기능하지못하는종교는그래서이미죽은종교다.
일상안에없는것은거짓이기때문에자기의믿음이일상에있는지없는지를계속
살펴봐야한다.
부족한것은보완할수있지만없는것은어찌해볼도리가없다.

교회의본래뜻은’부르심을받은사람들-에클레시아’다.
따라서예배당은교회가아니다.
그건교회가최소한의형식으로예배드리는공간-장소일뿐이다.
이근본적인차이를제대로아는것은한국개신교의경우특히중요하다.
그것을혼동하거나착각하는데서오는부작용이너무크기때문이다.
예배형식은신앙을나타내기위한,신앙내용을담는최소한의그릇이다.
여기서’최소한’이라고강조하는것은형식이승하면내용이쇠하기때문이다.
지금한국개신교의가장큰위기는형식이너무승한나머지내용이쇠잔해진것이다.
그래서내가예배당에가는이유가성경적으로분명해야한다.
그것이신앙외적인것들,즉형식과관계되는것이라면아주잘못된것이다.
주일하루를종일예배당에매달려있는교인들대부분이그근본에서잘못된신앙을
가지고있다.
제대로몰라서생긴왜곡이다.
그런사람들일수록일상안에서는신앙이없다.
가사를제대로돌보지않는광신이그것이며’기도원’을찾아다니는부류가그들이다.
따로기도원이필요하다는것은그신앙이일상에없다는반증이다.

예수를믿는다는것은,
그분을제대로알고,그가르치심에깊이감동,승복하고,
그분의마음을품고그분의가르치심에따라성실하고정직하게사는것이다.
그리고그보상은하나님이주시는은총의선물인데우리는그것을’구원’이라고부른다.
그이상도그이하도아니다.
그분이원하시는게그런삶이다.
그런사람들이크리스챤이다.
그리스도라하는분을따르는사람들이라는뜻이다.
그리고이아름다운명칭은내가부르심을받은사람이라는증거이기도하다.
내가바로에클레시아-교회이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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