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신앙을가진촌부에서고위성직자인교황에이르기까지그걸아는사람은
아무도없다.
인간예수를본사람이없기때문이다.
공관복음도예수의인간적모습에대해서는단한마디도언급이없다.
복음서자체가그리스도에대한자기들대로의신앙적해설이기때문이다.
예수의신장,피부색,머리털색깔,눈동자색깔,얼굴모습,목소리등에대한
인간적인묘사는그어디에도기록이없다.
적어도살아계신나사렛예수에대한인간적인기록이나묘사는전혀없는것이
현실이다.
그런데도여러가지예수의’초상화’는참으로많은장소에걸려있다.
심지어는눈이녹는형태가예수의얼굴과닮았다고해서액자에넣어걸어두기
까지한다.
우리가한가지분명히하고넘어가야할일은지금기독교가가지고있는모든
예수에대한그림들은화가들의’상상화’라는사실이다.
그어떤화가도예수를본일은없다.
그들이그린예수의그림,초상화가강력한이미지로각인되어신자들마음속에
자리잡고있을뿐이다.
레오나르도다빈치(LeonardodaVinci1452-1519)의’최후의만찬’도그런
것이다.
밀라노의산타마리아델그라체성당의프레스코벽화로남아있는이그림은이미
충분히유명해진’상상화’다.
그그림은그림자체로서는연구될만한회화적가치를가지고있다.
특히원근법에서더그렇다.
그러나예수와그제자들의’마지막만찬’과는전혀아무상관도없는이태리식
그림일뿐이다.
건물,식탁,의상,인물배열,음식등에서그건완전히이태리식과그리스식이다.
특히예수와그제자들은유럽의백인남성들이다.
그그림에서유대적인,예루살렘인근의만찬장소에대한이미지는단하나도없다.
그리고무엇보다중요한것은’마지막만찬’이있은지1500여년이지난시차의
문제가있다.
복원은물리적으로도불가능한것이다.
이제다른예를더들어보자.
옛베네치아공화국정청이두깔레궁전이다.
그곳의수많은방에는거의방마다성모자의그림들이걸려있다.
그런데도같거나비슷한그림은하나도없다.
화가마다서로다르게그렸기때문이다.
‘상상화’는그런것이다.
시기적으로훨씬먼저그려진동방정교회의이콘(icon)화들은같은예수와그제자들
의묘사에서전혀다른그림들이다.
배경은더어둡고(등잔불에그을린이유도있을것이다.)인물들은뾰죽한인상으로
그려져있다.
이스탄불소피아사원의벽화로남아있는예수의모습은그대표적인사례일것이다.
이런예를들자면사실끝도없다.
한국에는갓을쓰고,도포를입은예수도있지않은가.
지금나사렛에있는수태고지기념교회에는교회뜰벽면에여러나라에서보내온
성모자의그림들이장식되어있다.
같은아기예수의서로다른모습은우리가인간예수에게접근하는것이얼마나어려운
일인가를깨닫게해준다.
그러나,그럼에도불구하고인간예수에게접근하는일은아주중요하다.
인간예수를알고이해함으로서그분이무슨일을했는지그게얼마나위대한위업
이었는지를제대로알수있기때문이다.
2001년3월,
영국맨체스터대학연구팀은BBC의다큐제작을위해최근예루살렘부근도로공사
장에서발견된1세기유대인들의두개골중가장대표적인형태를가진것들을골라
첨단법의학기법과컴퓨터로예수의얼굴을추정할수있는전형적인유대인의당시
얼굴을복원해냈다.
이라크의북부사원에서발견된예수상을토대로했다고한다.
그것은뭉툭한코,짙은갈색피부,짧은고수머리의,당시농부의얼굴이었다.
나는그얼굴을보자마자지금까지봐왔던그어떤예수의초상화보다도더강열한
인상을받았으며인간적인친근감을느낄수있었다.
복원된그얼굴은모든덧칠과장식을떼어버린,목소리가들릴것같은살아있는
유대인의옛얼굴이었다.
정말예수의얼굴을추정해볼만한그런얼굴이었다.
예수의직업은먼저마가가기록하고있다.
6장13절에보면,고향사람들이그를가리켜,
‘저사람은그목수가아닌가?’하고말한다.
마가를인용한마태는이질문을확대한다.(13:55)
‘저사람은그목수의아들이아닌가?’
그러니까아버지요셉도목수였다는뜻이다.
우리모두는성경이기록되던그때가아니라우리가살고있는지금의자리에서
우리의기준으로그성경을읽는다.
그래서’목수’도오늘우리가알고있는목수로이해할수밖에없다.
성경내용에왜곡이생기는이유중하나가그렇다.
목수로번역된tekton-테크톤은당시로서는목수,석수(石手),농부까지도함축하는
넓은의미의어휘로이해해야한다.
근로계층을의미하는말인것이다.
일반적인의미에서그리스-로마세계는손으로일을해야했던사람들과그렇지
않은사람들로크게나뉜다.
1%의귀족들이국토의절반을차지하고있었으며인구의대다수를차지하는농민들
은수확된농사의3분의2정도를지주들에게바쳐야했다.
소모계층인천민들바로위에인구의5%에해당하는장인(匠인)들이있었으며
목수-테크톤은바로그장인계층이었다.
그러므로예수가목수였다면그는장인계급에속했으며이계급은천민계층과농민
사이에위치하게되는것이며이는예수의사회적계급,계층을알수있는유일한
기록이기도하다.
예수가살았던작은산간마을나사렛은당시인구가적게는200명에서많게는
1.200명까지로추정되는바그런규모의마을에서목수일만으로는생계유지가될수
없는일이다.
요셉도예수도목수일,돌을다듬는일,농사를함께지으면서생계를꾸렸을것은
쉽게짐작할수있다.
그들은8명이상의대가족이었다.
인간예수는그런계층의유대인이었다.
주후300년대초,
솜씨가뛰어난장인에의해성경의장면들을담고있는대리석판이만들어졌고,
지금그일부가남아있다.
그부조(浮彫)는,
1500년후의다빈치에비해1200여년을앞선,
인간예수에대해더상세하게구체적인것을알고있는장인이다듬어낸것이다.
그대리석판은공개적인것이고많은사람들이동의할수있는조각과내용이아니면
안되었기에그만큼사실성을가지게된다.
나는이부조를찍은사진을확대경으로살펴보면서그부조에조각된예수의얼굴이
맨체스터대학연구팀이복원한고대유대인과너무나흡사한점에놀랬다.
뭉툭한코와짧은고수머리,그리고수염이그랬다.
둥근형의얼굴모습도그랬다.
주후300년대초에만들어진이부조는인간예수에대해몇가지점만은분명히설명
하고있다.
우선예수는다리가다드러나는짧은겉옷을입고있다.
그것은로마권력자들의긴겉옷이아니라그리스현자(賢者)의옷차림이다.
그리고예수는왼손에두루마리를쥐고있다.
말하자면주후300년대초에,
사람들은예수를큰가르침을주는그리스의현자같은이미지로기억하고있는것이다.
다른한가지는,
예수앞에서있는세명의제자는윗옷을입고그위에겉옷을걸치고있는데반해
예수는오른쪽어깨와팔이노출된상태에서왼쪽어깨에겉옷을걸치고있다.
이는당시잘알려져있던견유철학자(犬儒哲學者)의전형적인모습이다.
결정적인증거는없지만예수가견유학파의강한영향을받았을가능성은충분히
있다.
견유학파-Cynics는,
주전4세기에시작되어로마제국시대에크게유행했던한철학파를이르는용어다.
창시자는안티스테에스,또는그의후계자인유명한디오네게스로본다.
이들의주장은하나의철학이라기보다는생활방식으로볼수도있다.
그들은덕행을목표로했으며자족(自足)을강조,간소한식사와짧은망또,지갑,
지팡이같은단순한소지품에만족했다.
초대기독교가이학파와비슷한점이많았던것도사실이다.
마가복음10장17-22절에는,
한부자청년의구원의조건으로
‘가서가진것을다팔아가난한자들에게나누어주고그이후에나를따르라.’는
말씀이있으며,
이어25절에서는,
‘부자가하나님나라에들어가는것보다낙타가바늘귀로빠져나가는것이더쉬울것
이다.’라는말씀도있다.
물질에대한전면적인거부인것이다.
한편마가복음6장7-13절에는,
열두제자를파견하시며하신말씀이있다.
‘지팡이외에는아무것도지니지말라고하시며먹을것이나자루도가지지말고
전대에돈도지니지말며신발은신고있는것을그대로신고속옷은두벌씩껴입지
알라고분부하셨다.’
이내용들은견유학파의입장과하나도틀리지않는것들이다.
그분을견유학파의한사람으로보는견해가있는것도바로이런배경때문이다.
로마제국시대,
변방의작은마을에서목수-장인계급으로하위계층에속했던한젊은이가이세상에
끼친영향은너무나엄청난것이어서그내막을필설로는다설명할수가없다.
우리모두는그인간예수에에게접근해야한다.
그를수식하는모든단어들과그를장식하는온갖도구들을배제한후가아니면
그분은모습을드러내지않을것이다.
그래도우리는포기하지말아야한다.
우리가진실되고간절한마음을가지고있으면반드시그분은우리안에오실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