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든 사람들.
사람을매장(埋葬)하는방법을보면그지역의풍토(風土)를알수있다.
돌무덤은,무엇보다도흙보다는돌이많기때문에생긴하나의습속(習俗)이라고
할수있다.
시나이반도와팔레스타인의유다광야를여행해보면돌이얼마나많은지를실감
할수있다.
낮과밤의기온차로갈라닌,흡사칼날같이날카로운돌들도많고옛날그돌들은
할례의도구로쓰여졌을것이다.
죄인을돌로쳐죽이는방법은처벌과함께무덤까지만드는효율성이있다.
시나이에있는세계최고의캐더린수도원의몽크(수도사)들은풍장(風葬)을한다.
높고뜨거운바위산위에시신이뼈만남을때까지두는것이다.
나중에수습한뼈들이큰방에가득한것을본일이있다.
물론부드러운흙이많은우리들은땅에묻는것이기본이다.
거기에아름다운봉분까지만든다.
화장은본래의우리방법은아니다.

요한복음8장1-11절까지의’간음한여인’에대한기사는그연관성으로볼때
누가복음21장38절의연결부분으로보는게자연스럽다.
오래된요한복음사본에는이부분이없는것이더그런생각을가지게한다.
요한복음에만있는이유명한일화는공관복음이기록되던싯점에서는채택되지
않았던내용이다.
‘간음’의종교적의미는’배교(背敎)’다.
초대교회의시작은거의가유대인크리스챤들이었고나중에이들중상당수가
회당으로돌아갔다.

시일이지나교회가자리를잡게되자그중다수가다시교회로돌아오려고했고
이때이들,간음한자들을수용하는문제를놓고교회공동체가찬성과반대로
갈라질수도있는위기에처했다.
요한복음의본문,간음한여자의부분을읽어보면,
공관복음에서채택되지않았던일화가요한복음에채택된것은그들을수용하자는
의견이공동체의공식입장이었음을쉽게짐작할수있다.
주께서도그간음한여자를용서하셨고교회가돌아오는그들을받아들이는것은
합당하다는입장이다.

사람에게는’피’를보고싶어하는욕망이있다.
인간은동물보다훨씬더잔인하다.
동물은먹이를얻으려는본능적인행동이지만인간은’피’를보려는의도적인
잔인성이있다.
이제군중은간음하다현장에서잡힌’현행범’을잡아놓고그손에돌을든것이다.
여기에그여자를죽여피를볼수있는명분까지주어졌다.
‘모세의법에는이런죄를범한여자를돌로쳐죽이라고했다’가그것이다.
이스라엘에게있어모세의법은모든법의모체다.
누군가가먼저돌을던지면모두가돌을던져피를볼수있는정황이다.
그리고돌로그여자를쳐죽여도그어떤개인도책임이없다.
무리가함께던지는것이기때문이다.

바로익명성(匿名性)이그것이다.
익명은자기의이름을숨기는것이다.
돌을던져사람을죽여도처벌이없다.
여럿이돌을던졌기때문에책임도자책감도없다.
인간은,익명성뒤에숨어못하는짓이없다.
그래서익명성과군중심리는폭풍보다더무섭다.
그러나,
폭풍같은익명성의사악함에대해주께서는단한마디말씀으로무리들을돌려
세웠다.
‘너희중에누구든지죄없는사람이먼저저여자를돌로쳐라.’
이제돌을그손에든사람들은자기가누구인지를드러내야했다.
여자에게돌을던지는책임도져야하는것이다.
익명성의사악한힘이사라지기때문이다.
이본문이예로부터지금까지유명한것은그놀라운반전(反轉)때문이다.
그누구도예측하지못했던놀라운일이일어난것이다.
그리고그여자는용서를받는다.

기독교신앙은,
익명성에묻혀그손에돌을들면안되는신앙내용을가지고있다.
그게누구든,크리스챤이라면하나님과1대1의관계에놓이게된다.
혈육이라해도신앙과구원은대신할수없다.
기독교문명권에서’개성적인간’이형성되는이유가거기에있다.
극단적개인주의의폐해까지포함하는’개인’은철저히익명성이거부된존재다.
크리스챤은언제어디서무엇을하든그개인을하나님이지켜보신다는믿음에서
출발한다.
그분은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기때문이다.
교회가공동체로서의형식을가지고있다해도그것은예배를함께드리는의전적
(儀典的)의미가더큰것이며친교가포함된다.
결국신앙은한개인과하나님의문제다.
집단,집체화의위험은그렇게큰것이다.

교회공동체가적정규모를넘어지나치게커지면교인들은익명성속에함몰된다.
장로가자기교회집사를알아보지못하는촌극이그래서벌어진다.
크리스챤이익명성에묻혀교회생활을하고있다면그보다더큰위험은없다.
자기도모르는사이에그누군가를정죄(定罪)하기위해손에돌을들수있기때문이다.
스스로’죄없는자’로착각할수있다.
지금개신교교회들은충분히그럴수있는물리적환경이조성돼있다.

바울사도는극적인전향을한후,
아라바사막에서3년을지냈다고했다.
그는그곳에서무엇을했을까.
하나님앞에1대1로서서자기의신앙적정체성을확립한것이다.
그정체성이없었다면그는누구에게도그리스도를전할수없었을것이다.
결국그는그그리스도를위해순교까지했다.
그3년동안바울은’개인’이었다.
수도원에있었다해도’개인’이었다.
종교에서신앙적조건으로서의환경은,그래서’침묵’이다.
조용하다는것이다.
침묵한다는것,그것은신의목소리를듣는첫번째조건이다.
본래교회-에클레시아는정말조용한곳이었다.
근자교회를떠나는사람들이이구동성으로하는말은,
‘교회가소란스럽고시끄럽다’는것이다.
집단화,집체화의결과가그것이다.

하지말아야될일을몰래하는사람들이있다.
보는사람이없으니자기가드러나지않기때문이다.
한편혼자일때는왜소하고허약한사람이익명성에묻히면돌변한다.
평소의적대적생각들이익명성안에서폭발하기때문이다.
따라서전혀딴사람이되어엄청난일을저지른다.
익명성과군중심리는그렇게무서운것이다.
‘죄없는자가먼저돌로치라’는말씀에나이많은사람들이먼저물러가기시작
했다.
말씀의의미를깨달았기때문이다.
나이값이그것이다.

크리스챤은그누구라도,
‘간음한여인’을정죄할자격이없다.
똑같이구원받아야할존재이기때문이다.
차이가있다면그여자의죄는드러났고내죄는사람들에게감추어져있을뿐이다.
그러나하나님앞에서,
그불꽃같은눈앞에서는같은죄인이다.
누가무엇으로그분을속일수있겠는가.
그래서우리모두는교회의집단화,집체화에휩쓸리지말아야한다.
그익명성에함몰되면하나님앞에서혼자서야하는자리를잃게된다.
그건얼마나무서운일인가.
신앙은끝까지나와하나님의관계다.
예수를그리스도로고백하는길만이유일한통로일뿐이다.

무서운것은개신교회의물량화와소란스러움이자리를잡아가는추세다.
그게관행이되면주의몸된교회는그어디에서도경건과엄숙함을찾을수없게
된다.
‘종교적’이라는것은세상과다르다는뜻이다.
산중불교라는비난도있었지만당초불교사찰들이산에자리를잡은것은
사바(娑婆)와의간격을가져야했기때문이다.
그게종교다.
아직도내손에돌을들고있다면이제그것을버려야한다.
익명성과군중을떠나혼자하나님앞에서는소중한장소로돌아가야한다.
‘골방에들어가문을닫고은밀한중에보시는네아버지께기도하라.’
혼자서하나님을만나야한다는우리주님의가르치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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