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른새벽,
시어머니는장독대에정한수한그릇을올려놓고두손을비비면서기도한다.
‘비나이다비나이다신령님께비나이다
우리며느리에게아들하나점지해주시기를비나이다.’
때로는신령님대신삼신할미에게빌기도한다.
삼신할머니는삼신을흔히일컫는말로민속신앙에서아기를점지한다는세신령
이다.
점지는신불(神佛)이사람에게자식을가지게해주는일이며신령(神靈)은민간에서
풍습으로섬기는모든초월적존재-神을이르는말이다.
이시어머니가기독교인이되연그신앙은어떤것일까.
대개의경우삼신할미자리에예수가들어서는것뿐크게달라지는것은없다.
거개가그렇다.

아주오래동안나는그게누구든조금이라도속내를주고받는사이가되면늘같은
질문을해봤다.
‘은혜는무엇이며구원은무엇인가.’
기독교인의가정에서태어난모태교인이라해도이질문에제대로된대답을하지
못했다.
빌립보서3장8절에보면,
아주생소한단어하나가나온다.
사도바울은자기가인간적으로자랑할수있는모든조건을한가지이유때문에모두
배설물로여긴다고했다.
그게그리스도를아는’지식’이다.
그리스도를믿는신앙이아니라그를아는지식-gnouseous-knowledge,이라고했다.

예수에대한’지식’없이는결코그를제대로믿을수없다.
신앙이란그렇게간단한것이아니기때문이다.
예수는삼신할미자리에대체할수있는존재가아니다.
대체할수있는예수라면신령님의다른이름일뿐이다.
지금거개의개신교교인들은’그리스도를아는지식’에서크게부족한사람들이다.
권위주의적이고게으르고무지한교역자들이제대로공부시키지않은책임도크지만
예수를아는지식에갈급해하지않는교인들의책임도똑같이크다.
예수는사람들에게자식을점지해주는민간신앙의신령이아니다.
그러나너무나많은교인들이그를그자리에대체해놓고그것이신앙인줄알고있다.

절에다닌다는분들이많다.
나는그때마다같은질문을해봤다.
‘불교란무엇인가,싯달타에대해아는가.’
기독교인들과똑같이불자들역시이질문에딸부러지게대답하는이를아직은만나
보지못했다.
절에서부적을써줘도그걸받아가기에급급하지그게사찰에서할일이아니라는
것을지적하는불자는많지않다.
년전부석사에갔을때,아들의입시를위해일천배를드리는불자를본일이있다.
보살한분은,
삼천배를드린후앰블런스에실려가는불자도있다는얘기를해줬다.
대자대비(大慈大悲)는중생의기쁨과슬픔을함께한다는부처님의큰가르치심이다.
그분께서는일천배나삼천배보다는대자대비를깨달아알고이를실천하는불자들을
더원하실것이다.
그게발복(發福)의기원보다더중요하기때문이다.

인간이죽음을두려워하는것은,
익숙한것들과의이별이두렵고죽은다음의세계를전혀모르기때문이다.
모른다는것은공포다.
그리고자기가피할수없이그공포속으로들어가야한다는것은심각한일이아닐수
없다.
인간의내세관(來世觀)이그렇게생긴것이며사후세계에대해그근본적인대답을
주는게종교다.
말하자면인간이종교-신앙생활을가진다는것은내세관에서사후세계의존재를믿는
다는뜻이기도하다.
종교이외의어떤사유체계도내세에대해설명하지않는다.
오직사후세계에가기위해,
‘예수믿고천당’에서명한교인들이많다.
목적이천당이기때문에지금살고있는일상안에서의믿음은큰의미를가지지않는다.
교회에등록하고출석하는이유가천당이기때문에일상에없는죽은믿음,행함이
없는죽은믿음이되는것이다.
이런신앙생활을하는교인들도생각보다많다.

연봉이수억에서수십억원정도라면대단한직장이아닐수없다.
펀드메니저나에널리스트들이그들이다.
주변에서모두부러워하는고액전문직들이다.
그러나,
그들은,심장내과전문의에게심장병치료를받고있다.
순간의판단이천문학적인금액을벌수도,잃을수도있기때문이다.
심장병이생기는건당연하다.
숨이막히는부담때문이다.
수면제를복용하지않으면잠을이루지못하는사람들도그들이다.

불안(不安)은현대인이앓고있는대표적인질병이다.
정말불안하지않은사람은없다.
불안의이유와대상은달라도마찬가지다.
현대는구조적으로불안한시대다.
앞으로불안의요인들은사회발전과함께증가할것이다.
요가나템플스테이같은프로그램은그런수요가부른공급이다.
인간이마음의평안을갈구한역사는길다.
사바세계를떠나산중이나사막으로나간이유가거기에있다.

당신은왜종교를가지는가.
그대답중’마음의평안을위해’라는대답은큰비중을차지한다.
이염원은결코빈말이아니다.
불안을극복할수있다면,불안에서해방될수있다면,
그래서마음의평온과평화를가질수있다면지푸라기라도잡고싶은게현대인이다.
예수는평화를주시는분이다.
그분께서직접하신말씀이다.
그분을통해마음의평화를원하는사람이라면반드시알고있어야할사실이한가지
있다.
먼저,고통을겪어야한다.
이미가지고있는모든것을’배설물’처럼버리는아픈절차를통과해야한다.
그것없이,
내것은모두챙겨든체’마음의평화’를원한다면그건가장이기적인행돌일뿐이다.
기독교신앙은결코그런것이아니다.
그런믿음으로는’평화’를얻을수없다.
신학용어로는metanoia-전향(轉向)이선행돼야한다.
보통은’회개’로잘알려진코이네희랍어다.

몇년전,
극성스러운사진,카메라기자들덕분에우리는특별한장면을볼수있었다.
틈새로촬영한그장면은바로휴거(携擧)를기다리는광신(狂信)의장소였다.
남여모두가흰소복을차림으로두팔을하늘로뻗고울부짖으며한편으로는
겅중겅중뛰고있는광란의모습들이었다.
물론휴거는일어나지않았고지금그들의그후소식은알길이없다.
광신자(狂信者),
이성을잃고어떤사람이나종교에지나치게심취해있는사람을이르는말이며
광신도라고도한다.
광신은모든종교의역사만큼이나오래된병적신앙행태다.
그리고앞으로도광신자는존재할것이다.
그것은인간이가지는성향(性向)의한가지이기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그런기질적인간이따로있다는것이우리가할수있는설명의전부다.

내친구중에고등교육을받은크리스챤이한사람있다.
그가예수를믿기까지는아주긴시간이걸렸고,일단신앙을가진이후에는가장
바람직한신앙생활을영위하고있다.
조용하지만단호하고,이세상에그가예수보다더사랑하는것은없다.
일상안에서그가보여주는신앙생활은다른이들의본이될만한수준이다.
그런데,
그친구는예수의성령에의한잉태와동정녀탄생도,
베들레헴에서의출생도,이집트로의피난과귀환도믿지않는다.
기원전후의로마사와유대역사를연구한후그가내린결론이다.
초대교회가처했던’시대적정황’이그런에피소드를창작할수밖에없었던점을
이해는하지만아닌것은아니라는얘기다.
그는사도바울이설명한’영적인몸’의부활을믿는다.

그는,
자기의이성(理性)으로검증한결론에대해확고한신념을가지고있으며자기가
부정하는내용이자기의신앙에전혀걸림돌이되지않는다는분명한입장을가지고
있다.
예수를그리스도로고백하는데아무런문제도없다는것이다.
복음서에기록된그분의말씀만으로도차고넘친다는고백이다.
내가아는한그친구만큼’인간예수’를깊이연구한평신도는없다.
알면알수록더깊이사랑하게되고순종할수밖에없는게예수라고말한다.
그래서나는그친구의신앙을존중한다.
그의신앙은’그리스도를아는지식’에근거를둔확고한것이기때문이다.

당대의지식인이며헬레니즘문화를섭렵했던대학자바울이,
‘예수그리스도를아는지식’을강조한데는반드시이유가있을것이다.
기독교신앙은미신이아니다.
확고한지식의기반을가지는고등종교다.
예수를알지못하면제대로믿을수가없다.
그가누군가.
왜그리스도로고백되는지,
왜그를믿으면전향하게되는지를아는게지식이다.
그래서기독교는공부하는종교다.
기독교의경전인성경은그래서주어진책이다.
그리고그공부는자기가해야한다.
공부하는방법을배워서라도반드시자기가해야한다.
그래야그신앙이자기것이되고그때에야구원의반열에서게된다.
‘그리스도를아는지식’은그렇게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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