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가족.
그날어머니는중학생인나를등교시키지않은채우리삼남매와함께현관마루에
앉아그들을기다렸다.
아버지의친구인그들은아침나절세명이함께왔으며그중한분이참담한얼굴로
흰봉투를어머니에게내밀었다.
그는나도잘알고있는,아버지와가장친한분이었다.
봉투에서종이를꺼내읽은어머니는그대로기절했다.
나는사람이기절하는모습을그때처음봤다.
어머니의손에서떨어진종이는아버지의’전사통지서’였다.
9.28수복이후한달이지나도귀가하지않는아버지를기다리던우리가족은그종이
한장으로하루아침에유가족,글자그대로’남겨진가족’이되었고젊은어머니는
청상의미망인이된것이다.
비극의시작이그러했다.
그게1950년이다.

38선에서가까운그곳은본래콩을심었던아주큰밭이었다.
농사를짓지못하고있는것은수백구의시신을그곳에묻었기때문이었으며
촌노(村老)들은지휘관이었던아버지의시신을별도로매장해놓고있었다.
발굴된시신에서는아버지의낯익은회중시계와눈에익은주머니칼이나왔다.
어머니는아버지의치아를확인했다.
오랜시간의화장이끝난후뼈는유골함에담겨져흰천으로싼후내가가슴에안고
지프차에올랐다.
서울까지의비포장도로는정말먼길이었다.
그리고아버지는가족과친구들이지켜보는가운데국립묘지에안장되었다.
40대의젊은나이에자기한몸을나라를위해바친것이다.
우리들을남겨둔채.

전쟁의와중에서가장을잃은남은가족의삶은필설로는모두설명할수없는고통과
시련의연속이었으며가장참기어려운고통은먹을것이없는것이었다.
배가고프다는것,사실그건끝이었다.
그보다더절실한문제는없었다.
어머니가자주하던말씀이있다.
‘우리가족이겪은고통은소설로는다못쓴다.’
아버지의친구들이마련해준시장한귀퉁이의좌판이우리의생계수단이었고내가
학교를졸업하고직장에다닐때까지어머니는그곳에서필사적인노력으로우리들을
고등교육까지받게했다.

유가족의가난은,
세습되는것이기때문에유자녀들은커서도주변부인생을살확율이아주높다.
작전상후퇴로살아남은자들의가족은중류계층이상의생활을할수있지만목숨을
바친전사자의가족은하위계층으로몰락하는게현실이다.
일제하에서독립지사의자녀들이주변부인생이된것과친일파의가족이사회상층부
에남는것이좋은사례다.
어머니가두려워한것이바로그점이었고우리가족이그런지경에가지않기위해
혼신의힘을다해우리들을교육시켰다.

지금도내가기억하고있는미군부대의밀가루푸대는그때의가난이어떤것이었는지
잘설명해준다.
우리는미군부대에서밀가루를쏟아내고버린빈푸대를수집상으로부터싼값에사
왔고그푸대하나하나를털고또털어남은밀가루를모았다.
수제비를끊이기위해서였다.
그리고그푸대를빨아그것을안감으로쓰는양복점에다시팔았다.
탄쌀,
그탄쌀로지은밥을먹어보지못한사람은전쟁의참담함을모른다.
미곡창고의화재로탄쌀들이싼값에시중에나왔고가난한우리는그쌀을사다먹었
다.
불지도않고맛도없는그밥은그대로연명을위한악식이었다.

국가의재정이어려웠던만큼유가족에대한원호처의지원도보잘것없었다.
내가지금도분노하고있는것은,
쥐꼬리같은유가족수당을받는전쟁미망인이취업을하는경우,그수당지급은끊어
진다.
반면직업군인이제대해서취업하는경우많은급료와함께연금까지수령했다.
산자는더배를불리고죽은자의가족은가질수있는것까지박탈했다.
전사자의유가족대우를그근본에서뜯어고치고현실화한분이박정희다.
그분은’유가족’이무엇인지그깊은의미를아는사람이었다.
죽은자의가족을돌보지않으면나라를위해죽을자가없다는함수를아는분이었다.

군복무를마치고복교한대학교에서의마지막학기,
등록금을마련할길이막막했다.
어머니는좌불안석이었다.
그때,운수업을하고있는옆집의아저씨가나를불렀다.
그분들은참으로오래동안우리들을물심양면으로도와주신분들이다.
그분을나를앉게한후,
‘자네형제들은사막에갖다놔도살아갈수있는사람들이야.마지막등록금은내가
주겠네,학교를졸업해야취직이되고자네가취직해야자네네집이일어서는거야.’
나는그렇게대학을졸업했다.
나는평생을통해그분의은혜를잊지않고있다.
그분의존함이심영섭씨다.

저녁식사가끝난후,
설거지를마치고방에들어오신어머니앞에나는무릎을꿇고앉았다.
그리고어머니에게봉투를건네드렸다.
‘어머니,첫월급입니다.’
그봉투를받는어머니의손이떨렸고,가장깊은곳에서시작된오열로이어졌다.
나는어머니의그피나는눈물이가지는의미를알고있었다.
오래동안감당할수없는무게에짓눌렸던한여자의간난신고가드디어끝나는순간
이었다.
‘어머니,지금부터는제가살림을맡는겁니다.
이제는아무걱정말고쉬세요.’

내가처음어머니에게사다드린가전제품이선풍기였다.
그때로서는귀한물건이었다.
어머니는동네친구들을불렀고그선풍기의시원한바람을쏘이게했다.
그건말하자면무언의자랑인것이다.
흑백TV를사다놓은후퇴근해서집에오면우리집현관에는신발가게처럼신발들이
많았다.
동네사람들이모여앉아김일선수의박치기에손뼉을치며좋아했다.
정말오래간만에파안대소하는어머니의모습을볼수있었다.

내가결혼해서첫손자가태어났을때,
어머니는그손자를품에안고기쁨과슬픔의눈물을흘렸다.
손자를못보는할아버지때문에,할아버지를못보는손자때문에울었다.
그건정말한여인의회한(悔恨)이었다.
아침마다어머니는자리에서일어난후깨끗히몸단장을하고손자를기다렸다.
손자를안고있는어머니는흡사다른여인같았다.
비로서그분에게행복이찾아온것이다.
그손자가지금은의학박사이며심장내과전문의가되어대학병원에봉직하고있다.
내동생도외과와방사선과의미국면허를가진전문의다.
한여인의필사적인노력이유가족의주변부인생을막은것이다.

어머니는딸이살고있는LA에가서오래계셨으며나이75세에주무시던중에돌아
가셨다.
그곳에서장례를마친후,나는그시신을화장해유골함에담아안고비행기로태평양
을건넜다.
부모님두분의유골함을모두가슴에안았으니기구(崎嶇)하기는나도마찬가지인
셈이다.
그건그대로우리가족이겪은풍파의크기였다.
나는정성스레어머니의유골함을아버지의유골함옆에안장했다.
헤어진지40여년이지난두분의해후는어떤것이었을까.

내가손녀를얻었을때나는그아이를두분의묘지비석앞에세우고말씀드렸다.
‘아버지어머니,얘가제손녀인우정이의딸입니다.
두분의증손녑니다.’
유가족인우리가죽지않고일어섰으며주변부인생으로밀리지않았음을말씀드리고
싶었다.
내직계가족은우리부부와아들내외,그리고딸고손녀다.
박사하나,석사가셋,학사하나의학력이다.
어머니의필사적인노력이이룩한위업인것이다.

6.25전쟁을기준할때,
지금그전쟁의미망인들은대부분작고하셨다.
남아있는,세상의고초를다겪으며주변부인생을어렵게살아온불쌍한유자녀들도
이제는모두현역에서은퇴한노인들이다.
그숫자가많지도않다.
이제국가가해야할일은이노인들에게중산층의생활을구체적으로보장하는것이다.
지금은보훈처의조직도탄탄하고전문적이며전쟁유가족과전상자에대한지원도
효율적이다.
그러나그예산은국가예산의0.3%수준,사실은3%도미흡하다.

전쟁에서전사한사람과그남은가족에대해,
전쟁에서부상당한상이자에대해살아남은사람들이책임을지지않는다면그런
국가는반드시전쟁을다시만난다.
그리고그때는그누구도죽으려고하지않는다.
전쟁의뒷처리를잘못하고있기때문이다.
현충일이무슨날인지알고있는가.
태극기도내걸지않는부류들이그걸알리가없다.
나는언제나이것이우리의민족성과관계가있다고생각한다.
1년에1조2천억원의돈을북쪽에퍼주면서도’국군포로’라는말한마디못하는게
우리민족성이다.
아직정부차원에서찾아온6.25전쟁포로는단한명도없다.
북한에생존해있는전쟁포로는5천명이넘는다.
어떻게이런비굴한일이있을수있단말인가.

이스라엘은전쟁중실종된군인에대해서는무기한의수색을한다.
경비도엄청나지만그전문성은세계적이다.
이스라엘수상한분이이런말을했다.
‘가족으로부터그들의아버지,아들,딸을불러낸것이국가다.
따라서생사불문,그들을다시가족에게돌려보낼책임도국가에있다.’
일억아랍에둘어쌓여있는이스라엘이생존하고있는정신이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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