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예배.
예배(禮拜)는모든종교의본질적요소로서종교를가진인간이자기가신앙하는
절대자에게나타내는숭경심(崇敬心)의표현이며일체의형식적행위다.
따라서예배를가지지않는종교는없다.

기독교의경전인성경에서볼수있는유대교예배의초기형태는희생제물을드리는
것이었다.
이제의적(祭儀的)예배는주후70년성전이붕괴될때까지계속됐다.
유대교의전통적인제의예배에대한주님의입장은,
‘안식일이사람의주인이아니라사람이안식일의주인’이라는것이며이는예배의
본질적의미가형식보다는내용에있다는혁명적해석이다.

계명(誡命)은모든종교에서그신자들이반드시지켜야하는규정,규례를정리해
놓은것이며그실천에대한강제성을내포한다.
유명한십계명의1계명부터4계명까지는같은내용의반복적표현이다.
유일신인야훼를섬길것,
우상을만들지말며야훼의이름을함부로불러망령되게하지말것을물론,예배의
형식적실천인안식일을구별하여거룩하게지키라는것이그것이다.
말하자면이스라엘이야훼하나님을예배하는일이얼마나중요한것인지를재삼
강조하고있다.

기독교예배의근간은주님의말씀에근거한다.
마가복음12장28-31절의말씀이그것이다.
‘모든계명중첫째가는계명은,
이스라엘아들으라우리하나님은유일한주님이시다.
네마음을다하고목숨을다하고생각을다하고힘을다해주님이신너희하나님을
사랑하라,
또둘째가는계명은네이웃을네몸같이사랑하는것이다.
이두계명보다더큰계명은없다.’
사실이말씀은신명기6장4-5절의말씀을다시강조하신것이다.

자기의최선을다해야훼하나님을사랑하는것,그것이하나님께드리는예배다.
주일에예배당에모여예배순서라는형식에따라드리는예배가대표적인것이다.
이예배에서의하나님에대한사랑은그연장선상에이웃이존재하게된다.
즉하나님을사랑하는마음의신앙적표현이이웃과의관계에서비로서가시적으로
성립되기때문이다.
야고보서2장14-17절은,
헐벗고굶주린이웃을돌아보지않는믿음을’행함이없는죽은믿음’이라고정의하고
그믿음이자기를구원할수없음을밝히고있다.
형식으로시작하는예배는이웃과의인간적관계에서비로소내용적으로종결되는
것이다.
기독교예배의신앙적독특함이바로여기에있다.

증기기관의발명이산업사회라는혁명적변화를불러왔다면구텐베르그의인쇄기는
문화적혁명이라고할수있다.
그두개의사건은인류문화와인류의생활방식,내용까지바꿨다.
그리고등장한컴퓨터,
단순한적산(積算)기능의이기계에인터넷이라는소프트웨어가장착되었을때
세계는과거두번의혁명보다더크고충격적인변화를겪게됐다.
전지구적소통이현실화된것이고세계는아날로그의체제에서디지털세계로
급속하게변했다.
인터넷의혁명은국경을넘고인종과문화를넘어세계적인것이되었으며이제는
아무도그놀라운힘을막지못한다.(북한만은예외다.)

인터넷이우리생활에끼친파급효과는모든분야에서생활방법과내용을바꾸고있고
그건그대로부정적인측면도있지만긍정적인측면이더많다.
IT기술의발전은그끝이안보이는정도다.
인터넷기능이교회와의연관은그대표적인것이’인터넷예배’다.
현재국내에서운영중인종교별사이트중개신교는5.394개로가장많다.
인터넷에만존재하는사이버교회도등장하기시작했다.
이미수십만명의교인들이이사이트를통해동영상으로인터넷예배에참여하고
있으며헌금도인터넷뱅킹으로처리한다.
그렇다면인터넷예배는이제하나의시대적추세로자리잡아가고있는데교회는
아직이에대한공식적인입장을내놓지못하고있다.

모든일이그러하듯,
인터넷예배에도빛과그늘이있다.
등대지기,
극지에있는연구기지의대원들,
작전에투입된군인들,
휴일이나명절이더바쁜운수업종사자들,
병원에있는환자들,
주일이라는정해진시간과예배당이라는정해진장소에갈수없는사람들은많다.
24시간돌아가는공장의생산라인도엄청난사람들을붙들고있다.
이런사람들에게인터넷예배는정말새로운예배방법이된다.
적극적으로인터넷예배에참석하는게옳다.
그러나그건어디까지나불가피한차선책(次善策)이라는사실을명심해야한다.
결코정석은아닌것이다.
불가피하다는단서가그래서붙는다.

교회를에클레시아라고부른다.
‘부르심을받아하나님앞에나온무리’라는의미다.
한개인이부르심을받아하나님앞에나가는곳이교회다.
그장소에가서경건한예배를통해하나님을경배드리는행위가최선을다해
그분을사랑하는길이다.
컴퓨터의모니터가대신할수없는신비하고영적인영역이다.
모니터로서는얻을수없는체험이교회에만있는것이다.
또하나,
교회가교회되는신앙적,신학적요소의하나가코이노니아-koinonia다.
코이노니아의본래뜻이’남과함께나눈다’이다.
communion,또는fellowship이라고도한다.
타인과의교제로이루어지는교회공동체가그것이다.
‘우리몸은각부분(지체)이자기구실을다함으로서각마디는서로연결되고
얽혀서영양분을받아자랍니다.
그리스도를머리로하는교회도이와같이하여사랑으로지체를완성해나가는
것입니다.’에베소4:16.공동.

코이노니아의기본개념이그렇다.
서로다른탈란트를받은교인들의교제,사랑이주님을머리로하는교회의지체가
되어공동체를이룬다는설명이다.
구원은개인적인것이지만그구원을이루는길은상대적인’관계’를통해만들어
진다.
‘성령께서는각사람에게각각다른은총의선물을주셨는데그것은공동의이익을
위한것입니다.’고전12:7.공동.
고린도교회에대한바울사도의설명은이렇게구체적이다.
혼자모니터앞에앉아서는결코이룰수없는신앙영역의신앙공동체가교회다.

밖에있는이웃.
내주변에있는모든타자는교회밖의이웃이며내신앙은그들에대한’행함’에서
규정된다.
모니터앞에는이타자가없다.
타자가없는,타자와의’관계’가없는신앙은그자체가죽은믿음이다.
예배에참석할수있는사람이의도적으로인터넷예배를본다면그건분명한불경죄
로단정받는다.
최선이있는데차선을택했기때문이다.
목숨,뜻,생각을다해하나님을경배하고사랑하라는주님의말씀과도상치된다.
‘여러교회사이트를돌면서유명목사들의설교를들을수있어서좋다’는신자가
있다.
그건예배가아니다.
TV의인기프로를선호하는것과하나도다를게없다.
어떻게그런행위가예배가될수있는가.
이제교회는그교인들에게분명한선을그어교육해야한다.
차선책으로서의인터넷예배는그불가피성이신앙적이고양심적일때만허용된다는
것을,
교제도,이웃도없는모니터는교회도예배도아니라는신앙적내용에대해분명하게
교육해야한다.

한편이미사이트를개설하고있는교회들은그내용을더충실히할필요가있다.
불가피한사정으로교회예배에참석하지못하는교인들이모니터를통해서라도
같은은혜의자리에있을수있도록최선을다해야한다.
앞으로의세상은’불가피한일들’이계속늘어날것이다.
그때차선책이지만모니터앞에서함께예배드릴수있는세밀한배려를해야한다.
단지,그것이아무리불가피한차선의선택이라해도본질적인것이아니라는점만은
끝까지분명히해야한다.
세상에는디지털화할수없는아날로그의세계도있음을알고살아야한다.
예배가그중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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