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노 하는자.
성경에는해석하기어려운난해절(難解節)이많다.
가장큰이유는같은단어라해도기본이되는뜻은같지만시대적으로쓰이는
내용이달라지기때문이다.
지금우리가가지고있는신약성서는2천여년전,비과학의시대에쓰여진책이다.
지금우리가알고있는어휘의뜻이그때에는어떻게쓰였는지정확히알수가없는
것이많고,문장도마찬가지다.
그당시에는누구가쉽게알아들을수있었던문장도지금우리들에게는난해절이
되는이유가그런것이다.

그러한난해절중하나가마태복음11장12절이다.
‘세례요한의때부터지금까지천국은침노를당하나니침노하는자가빼았느니라.’
개역.
침노(侵擄)는남의나라,영역을불법으로쳐들어가는것이다.
원문의baizetai도침노를당한다는뜻이다.
공동번역에서는이를’폭행을쓰는사람들’로번역했고,
표준새번역은’힘을쓰는사람들’로번역했으며,
현대인의성경에서는’침략하는사람’이라고번역했다.
TNIV는’violentpeople’로번역했다.

번역이다양한만큼12절의주석도여러가지고그해석도다양하다.
대표적인것두가지만소개해도,
요한의전파후세리,창기,이방인같은소외계층이열심으로하나님나라에모여들어
왔고또그것을얻었다는설명이다.
다른하나는,
대단히단호한사람들,
임박해오는천국을아주단호하게마중나가는사람들,
예수의부르심을받고가족과생업까지도버려두고예수를쫓은사람들,
천국에합당한매우공격적인삶을산사람들이라는설명이다.
두가지해석의공통점은’적극성’이다.
그것이폭력적일만큼적극적이라는얘기다.

어떤주석가한분은12절에대해아주인상적인설명을한일이있다.
구기종목중가장치열한경기가농구다.
농구경기에서공을빼았으려는적극적인공격과공을빼았기지않으려는필사적인
방어는다른구기종목에서는볼수없는광경이다.
그건흡사폭력적이기까지하다.
그래서반칙도’폭력’으로규정한다.
공을빼았으려는,빼았기지않으려는적극적자세가’침노하는자’라는것이다.
12절을설명하는데이만큼적합한비유도달리없을것같다.
천국은자기의최선을다해필사적으로접근하는자가차지한다는말씀이그핵심
이다.

종교를가진인간이그어떤대상을신앙한다는것은사실이미적극적인삶의자세다.
신앙은어떤면에서는제일큰모험이기때문이다.
기독교신앙도마찬가지다.
차지도덥지도않으면뱉어버리겠다는계시록의경고가그래서주어졌다.
모든크리스챤은자기의구원이최종목표다.
그것은어떻게얻어지는것인가.
물론그냥주어지는것은아니다.
부르심에응답하는생활,그게신앙생활이다.
그응답은전인격적인것이기때문에거기에는생과사를가르는적극성이있어야
한다.
그래서선택이고전향인것이다.
이제’침노하는자’가되기위한조건들을생각해보자.
침노하는자가된다는것은격열한의미를가지는선택이기도하다.
신앙의적극적인자세가그런것이다.

가장중요한것은신앙하는대상에대한올바른지식이다.
우리속담에,
‘죽을때까지같이살아도시어머니성(姓)도모른다’는말이있다.
기본적으로알아야할것도모르고살았다는얘기다.
예수를믿는다면그예수에대해알아야하는것이우선이다.
그리고그앎은정상적이고제대로된지식이어야한다.

바울사도께서는’그리스도를아는지식’이가장고상하고,자기는이를얻기위해
모든인간적인긍정적조건들을배설물처럼버렸다고고백한다.
예수를바르게아는길은성경밖에없다.
성경을읽고,공부하고,연구하면예수를제대로알수있지만성경을읽고공부하지
않고귀동냥만하면예수에관해아는것으로끝난다.
다른사람을통한간접체험이될뿐이다.
간접체험으로는진정한신앙이생길수가없다.
예수와부딛치고,넘어지고,예수와싸우면서그분에게접근해야내가신앙하는
그리스도를만날수있다.
비로서그리스도를아는지식을가지게되는것이다.
그과정의격열함은농구경기보다더치열하고치열해야한다.
의심하고,부정하고,다시엎드리고,순종하는격열함이없이는’침노하는자’가될수
없다.

다음은그믿음이사람들사이에서시험받아야한다.
기독교신앙은타인-이웃과의관계,접촉에서그구체적인모습을드러내기때문이며
거기에서합격점을받아야한다.
생면부지의타인-타자와의접촉은’네이웃을네몸같이사랑하라’는말씀이기준이다.
크리스챤의조건없는이타적인사랑이아가페다.
아가페는성경에만있는희랍어다.
그리스도를아는지식에서아무리뛰어나도그것이이웃을통해구현될때만이의미를
가진다는얘기다.
교회안,신앙공동체의’성찬’이밖으로이어지는것이아가페다.
지금의한국개신교가딴것이되어가는제일큰이유가’실천-행함’이없는믿음때문
이다.
성경은그런믿음을죽은믿음으로정의한다.
그런믿음으로는구원받을수없다고못박는다.
연혁적으로설명한다면그리스도를아는지식이없기때문에실천-행함도없다.
그게무엇인지조차모르고있다.
오직제몸불리기에혈안이되어있는동안완전히다른것이돼버렸기때문이다.

‘은혜’라는말의희랍어어근은’기쁨’이다.
조건없이내것을내어남을도왔을때,
더좋은사회공동체가되기위해남들이기피하는자리에자발적으로갈때,
모두가돈과명예와이익을쫓아갈때비록혼자라도’올바름,진리’의자리를지킬때,
거기에기쁨이있다는것을체험해야한다.
그체험은정말’침노하는자’만이맛볼수있는지극한은혜이기도하다.
한번그맛을본사람은다른것을모른다.
은혜란그렇게소중한것이며천금을주고도바꿀수없는천국의선물이다.
크리스챤이자발적으로입은모든손해는그보상이크게약속되어있다.
개신교의물량주의와기복신앙은기독교신앙의근본을훼손한용서받을수없는
죄악이다.
날로죄에죄를더해가는그모습이이미벌을받고있는증거다.

기독교신앙의또한가지적극성은자기체험의전파다.
선교라는말이남발되다보니그의미도많이퇴색했지만내가체험한그리스도를
그분을알지못하는이들에게알리는것이선교다.
그래서선교는,분명한자기체험이있어야가능하다.
자기확신없이는전달이되지않는다.
가장좋은,대표적인선교의방법은어떤것일까.
입은다물고,자기의삶을통해본을보이는것이최선이다.
지금의교회들은선교라는이름으로자기교회를광고하고선전한다.
그건선교가아니다.
자기팽창을위한세속적인수단일뿐이다.
한인간의온전한삶이다른이들에게’감동’을줄수있어야선교다.
그감동의뿌리가체험된기쁨-은혜다.
침노하는자의한가지조건이그래서선교다.

한인간이가지는종교생활-신앙생활은,
해도좋고,안해도좋은회색지대가아니다.
가장적극적인사람만이올바른신앙을가질수있다.
그건생사가걸리는중차대한문제다.
예배도,모든예물도,직분도,봉사도보이는그릇일뿐이다.
그안에내용이없으면무용지물이다.
아무리그그릇이크고현란해도그안에아무것도없다면없는것이나마찬가지다.
형식은내용을담는그릇이기에필요한것이기도하다.
침노하는자,천국을차지하는사람이되기위해서는가장적극적인자세로그그릇에
내용을채워야한다.
마지막에하나님이보시는것은그릇이아니라그안의내용이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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