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
인간의삶은크게세가지범주를가진다.
그하나가형이하학(形而下學)적범주로서보이는육체와그삶이다.
육체는동물적조건을가지고있으며오직본능에따라살게한다.
식욕,성욕,탐욕과같은대표적정서가그것이며교육이라는수단을통해정화되지
않으면짐승같은놈이되거나짐승만도못한놈이될수있다.
우리가살고있는사회공동체안에서일어나고있는비인간적이고엽기적인사건들은
순화되지못한본능적인간의행동에서야기된불상사들이다.
심한경우기본적교육은받았지만환경과조건이주어졌을때동물적으로변하는것도
본능의힘이얼마나큰것임을알게해준다.
먹고,마시고,즐기는것이전부인삶은형이하학적범주이며여기에안주하고있는
인간들은뜻밖에많다.
정말유행가처럼사는것이다.

다른하나가형이상학(形而上學)적범주로서,
사물의본질이나존재의근본원리등을사유(思惟)나직관에의해탐구하는삶이다.
즉,보이지않는세계,
보이는것들의뿌리가되는정신세계에대한탐구가그것이다.
가장보편적이고대표적인것이철학이다.
철학은세계와인생,그리고인간이가지고있는지식의근본원리를연구하는것이며
따라서인간이자기자신에대해질문하는정신의세계다.
이범주를통해도덕과윤리가생겼으며동물적인간이인격적인간이되는계기가
마련되는것이다.
인생은무엇인가.
어디에서왔으며무엇을하다가어디로가는것인가.
형이상학의범주는과학을탄생시켰으며그것은인류문명의발전으로이어져왔다.
먹고마시고즐기는인생에서사유,생각하고철학하는정신적존재가된것이다.
시와산문,무대와온갖예술은이범주가만들어낸창조적이며문화적인삶의모습
들이다.

그리고마지막범주가종교적세계다.
宗敎는근본을가르친다는뜻이다.
인간이자기의인간적한계를절감,절대자의존재를인정하고일정한형식을통해
그를경배하고구원받기를희구하는삶이신앙생활이다.
학문적표현으로는정신문화의가장높은체계라고하지만사실종교는그이상이다.
형이하학은물론,형이상학의범주도인간의사후세계(死後世界)에대해서는일체
언급이없다.
언급할수가없기때문이다.
그러나종교는선과악을설명하는것은물론,그연장선상에서사후세계에대해근본
적인계시를준다.
우리가체험적으로알게된사실은인간이형이상학적범주를거치지않고종교를가지
면미신과광신이될수있다는위험성이다.
그이유는참과거짓에대한분별력이부족해서거짓에미혹될수있기때문이다.
그리고광신은고치는약이없는무서운병이기도하다.

‘어리석도다갈라디아사람들아예수그리스도께서십자가에못박히신것이너희눈앞
에밝히보이거늘누가너희를꾀더냐.내가너희에게다만이것을알려하노니너희가
성령을받은것은율법의행위로냐듣고믿음이냐.너희가이같이어리석으냐,성령으
로시작하였다가이제는육체로마치겠느냐.’갈라디아서3:1-3.개역.
바울의한탄이바로그것이다.
성령으로시작한그들이이제육체로마치려는그어리석음을장탄식하고있다.
믿음으로시작했었는데이제는인간의율법으로끝내려하는그어리석음을탄식하고
있다.
anoetos-foolish,어리석은,헛된,판단력의결여와정신적미숙을뜻하는말이다.
갈라디아교회의이어리석은교인들이그부족함때문에믿음이아닌율법을주장
하는사악한무리들에게미혹당한것이며그꾐에넘어간것이다.
변질은그렇게시작됐으며결국은딴것이되고만다.
종교개혁의구호중하나가’solafide’다.
‘오직믿음으로’라는뜻이다.
로마카톨릭교회가기독교의본질적인믿음에서멀어졌을때,급기야면죄부를판매
하기에이르렀을때개혁은불가피한것이었다.
함께어리석은갈라디아사람들이될수없었기때문이다.

논리를단순화하면,
도든교회는어떠한경우에도형이하학적범주나형이상학적범주에자리하면안된다.
그렇게되면이미종교의범주에있는것이아니기때문이다.
그건교회가아니라인간의집단일뿐이다.
이제는모두가알고있는대로한국의개신교는물량주의,황금만능주의,기복신앙으로
가득차있다.
크고많은것은좋은것이며그것을얻기위해수단과방법을가리지않는다.
교회의각종이벤트는상업주의를뺨칠정도다.
도대체이어리석은변질은어디서온것일까.
길게설명할것도없이그변질은인간의어리석음에서왔다.
보이지않는본질적교회는하나님의섭리안에있지만보이는인간의교회는,땅위의
교회는인간에의해운영된다.
따라서어리석은인간이교회를맡으면교회아닌다른것이되는것이다.
지금개신교일반에서진행되고있는사태가그런것이다.
판단력이부족하고,요점을파악하지못하고,합리적인사고능력이부족한인간들이
교회를좌지우지하고있기때문이며교회정통성의훼손도거기에서비롯된다.

이름만대면쉽게알수있는,
도시빈민운동의대부로알려진목회자가있다.
지금의지하200평규모의예배당이비좁아아차산기슭에새예배당을건축하기로
했다.
자기의목회철학에따라모든사치스러운요소들을제거한,검소한천막교회를짓기
로했다.
건물의뼈대는철근콘크리트지만지붕은유리섬유로된천막을덮는공사다.
그러나연면적3900여평의이검소한예배당의건축비는79억원.
79억원짜리천막교회를지으면서그것을’검소’하다고말하는것이바로위선(僞善)
이다.
정말천막교회라면7억9천만원도많다.
잘못된생각,어리석은생각이만들어내는이괴리가지금개신교의대표적인모습이
다.
보이는것의크기를탐하면서도그걸검소하다고생각하는위선은이제고질병이됐고
고치기도어렵다.

기독교신앙의본질을설명하는대표적인말씀을들어보자.
‘우리는보이는것에눈길을돌리지않고보이지않는것에눈길을돌립니다.
보이는것은잠시뿐이지만보이지않는것은영원하기때문입니다.’고후4:18.공동.
눈길을돌린다는것은skopeo-consider로서주목한다.숙고한다.고찰하고깊이
생각한다는뜻이다.
깊은관심을가지고탐색한후그것을취한다는의미다.
갈라디아교인들이처음에성령으로시작했다는표현이그것이다.
성령의세계는보이지않는차원이다.
그래서,그것은믿음의세계다.
보이지않는것의존재를인정하고그세계를믿는신앙이기독교신앙이다.
보이지않는것이영원하다는바울의설명이그것이다.
보이지않는것은분명히존재하지만보이지않기때문에훼손되거나별질될수가
없다.
훼손되고변질되는것이라면성령의세계는아니다.

이제갈라디아교인들이그끝을육체로마감하려한다는얘기는,
시작은보이지않는세계를지향했지만이제는보이는세계,물량의세계로변질
됐다는뜻이다.
그리고그변질은그을의어리석음때문에사악한유혹에넘어간결과다.
그들은그꾐에빠진것이다.
땅위의교회는땅위에있기때문에세상풍조에영향을받을수밖에없다.
세상이mammonism에잡히면교회도그사악한힘의영향을받지않을수가없다.
이때필요한것이역류하는힘이다.
모두가보이는것을추구하는세태에서보이지않는것을추구하는자세를견지할수
있어야그리스도의몸된교회다.
교회에’구원’이있다는말은역류하는능력이그안에있다는뜻이다.
세상안에서세상사람들처럼또하나의바벨탑을쌓고있다면그건결코성령의
세계는아니다.
그래서참교회와거짓교회를구분하는기준은하나밖에없다.
보이는것을추구하는가.
보이지않는것을추구하는가.
그안에대답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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