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과 믿음.
태형(笞刑)은채찍으로매질하는체벌로서이는고대사회의일반적인체형이었다.
유대인의율법은민사상의소송에서도태형을인정하고있다.(신25:2,3)
유대인들은세가닥의가준끈으로된채찍을사용했으며매를때르는횟수는서너번
에서39번까지다양했다.
죄수는옷을벗겨기둥에묶었다.
몸의상처는엄청났으며심지어내장까지튀어나오는경우도자주있었다.
고린도후서11장24절에보면,
바울은이렇게무서운태형을다섯번이나맞았다고한다.
‘유대인들에게사십에하나감한매를다섯번맞았으며…’
그러니까가장무서운태형인39대의매를다섯번이나맞은것이다.
왜하나를감했을까.
본래는40대를때리는형벌이지만계수에서틀리수도있기때문에하나를감하고있다.
사람이하는일이라자칫실수해서41대를때릴수도있기때문에하나를감한것이다.
한대라도덜때리는것이낫지더때리면안되기때문에만든’지혜의방법’인것이다.
2천여년전의유대인들도인간의’오판’을알고있었다.
태형40대의계수에서도틀리수있는게인간이라는전제가그것이다.

판사한분이있었다.
자기에게배당된살인사건의심리에서살인죄를완강히반대하는피고에게기소내용
의증거에따라사형을선고했다.
그러나사형이집행된후그살인사건의진범이잡혔다.
무고한한생명이판사의오판으로억울한죽음을당한것이다.
그판사는법복을벗고출가,중이됐다.
중으로평생을살았다.
그가겪은마음의고통은필설로는다설명할수없는지난한것이었으리라.
스스로죽고싶었을것이다.
결국불교에귀의(歸依)한것이다.
귀의는’돌아가몸을의지한다’는뜻이다.
또는신불(神佛)의가르침을믿고의지한다는의미도있다.

그분이고통없이평생을살았다면아마도종교는가지지않았을것이다.
법복을벗을때까지그에게는종교가없었다.
그가불자가되어승려의길을걷게된것은’고통’때문이다.
종교에귀의하는길밖에다른방법이없었던것이다.
인간이만든그어떤것으로도그고통은해소되지않았다.
해소될수도없었다.
그가중이되어깨달은것은무엇이었을까.
아마도’인생의덧없음’이었을것이다.
그래서계속승려의삶을산것이다.
‘부처’는’깨달은자’라는뜻이다.
석가족출신의이성자-싯달타를그래서석가모니라고부른다.
그분은인간으로서는아주큰깨달음에도달한분이다.

시편34편18절에이런말씀이있다.
‘여호와는마음이상한자에게가까이하시고중심에통회하는자를구원하시는도다.’
고통은마음이상한상태다.
극심한고통에서다른방법을찾지못한자들은스스로목숨을끊는다.
인간이겪는고통의무게가얼마나크면죽음의길을선택하겠는가.
그절박한길에서종교에귀의한다는것은깨달음이있기때문이다.
깨닫는것은인간의몫이다.
그절박한인간이절대적인것을찾을때하나님은가까이계시는것이다.
자기를드러내어발견하게해주신다.
진정한의미에서한인간이종교를가지고신앙생활을한다는것은그런깊이와무게
를가지는일이다.
우리가우이주변에서’참믿음’을보기가어려운이유가그것이다.
현대인들은고통에의통과없이한번난모습으로온갖요구를하기위해종교를가진다.
그건진정한종교도,진정한믿음도아니다.

세계의모든고등종교는그기반에서같은내용을가진다.
‘물질을탐하지말라.’가그것이다.
특히예수의과격한말씀은그수위가다르다.
‘가진것을다팔아가난한자들에게나누어주고그후에나를따르라.’
영생을구하는청년에게주신말씀이다.
‘부자가하늘나라에들어가는것은낙타가바늘귀를지나는것보다어렵다.’
이말씀에는베드로도항의할정도다.
왜그토록무소유를강조하는것일까.
인간은가진것이많아지면자만해진다.
부족한것이없기때문에아쉬운것을모르고산다.
부족한것이없다는것,
인간에게이보다더무서운환경이달리있겠는가.
더구할것이없는인간이종교에귀의할이유가없다.
그래서많이가지고있는것이문제가된다.
모든고등종교가’물질’을악으로규정하는이유가그것때문이다.
절실하지않으면귀의도없다.

또한가지생각해야할것은,
재판에서오판한그판사는고통만겪은게아니라는점이다.
자기의인간적잘못을인정한것이다.
그중심에통회하는마음이있었던것이다.
자기의부족과잘못을뼈아프게깨달았기때문에자살이아니라종교에귀의한것이
다.
이는결코쉬운일이아니다.
그가승려의삶을살수있었던것은자기의잘못이용서받았다는믿음이있었기때문
이다.
재판은다시할수없지만자기의잘못에대한인정과참회가받아들여진것이다.
그확신이없었다면승려의길을계속갈수가없었을것이다.

현대인들의생활태도에서대표적인특징중하나가고통-어려움에대한적극적인
회피다.
어려서부터그렇게길러졌고커서도쉬운길을먼저찾는일에익숙해있다.
또그렇게할수있는방편도많아졌다.
기다릴줄도,참을줄도,깊이생각할줄도모른다.
쉽고빨리결말을보는일에만집중한다.
인스턴트의시대인것이다.

현대인크리스챤들의신앙생활이비기독교적인요소가많은것도같은이유에서
찾을수있다.
기독교는사막에서시작된종교다.
유대교와이슬람도마찬가지다.
셈족의이사막종교가세계를점령했다.
사막이어떤곳인가.
‘아무것도없는곳’즉사하라다.
사막종교가위대한것은,
보이는것은아무것도없지만고통과시련을통해보이지않는것으로가득찬땅을
발견했기때문이다.
사막에서는야훼를찾고,만나고,의지하지않으면살수가없다.
그’고통의땅’에서비로서가까이계신야훼를만났던것이다.
같은시편말씀이라도사막에서읽으면전혀딴것이된다.
본래가거기에서쓰여진글이기때문이다.

지금우리들은전세대에비하면아루말할수없는풍요로움속에서살고있다.
버려지는물건들을보면겁이난다.
물가를보면두려운마음이생긴다.
부족을모르고산다는것은종교적-신앙적으로는위험한신호다.
풍족함속에는결코절박함이없다.
기독교는십자가의종교다.
인간에대한가장참혹한형벌인십자가의처형이기독교신앙의상징이다.
모든예배당정면벽에는이십자가가걸려있다.
그십자가를바라보면서그것의의미를제대로모르는것이오늘의크리스챤들이다.
‘각자자기십자가를지고나를따르라’는말씀을회피하는건그깊은뜻을모르기
때문이다.
아주심한경우가진자들은기독교라는심오한종교를악세사리처럼가지려한다.
자기를더돋보이게하는장신구정도로생각한다.
참으로가증스러운일이아닐수없다.
그들은때가되었을때반드시그대가를치를것이다.

‘아는자는말이없다’는격언이있다.
극심한고통을겪어본사람은고통을모르는사람들과대화할수가없기때문이다.
체험의세계가다르기때문에그사이를연결해줄끈이없다.
참신앙은,자기를구원하는신앙은고통을통해하나님을만나는믿음이다.
하나님은마음이상한자에게가까이하시고중심에통회하는자를구원하시기때문
이다.
우리가정말온전한믿음을가지기원한다면부족을모르는풍요로움을걱정해야한다.
기지고도더얻기를원하는기복을피해야한다.
모든것을가진자에게,그부족과절실함이없는인간에게하나님은결코나타나지
않으시기때문이다.
‘내가고통중에여호와께부르짖었더니여호와께서내게응답하시고나를광활한
곳에세우셨도다.’시편118:5.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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