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도 마음편한 날이 없었다.
이중섭(李仲燮1916-1956)은8.15광복으로내왕이끊겨일본에갈수없었다.
일본에있는아내(일본인)와두아들을그리는그의마음은답배갑은박지에
선화(線畵)라는새표현영역으로나타났으며모두가아는대로소,흰소는그의
대표작으로꼽힌다.
그어려웠던시절,이중섭의아픈마음을아는구상(具常)은어렵사리밀항여비를
마련,그의손에쥐어준다.
통영(지금의충무)까지는무사히갔고,
밀항선만얻어타면현해탄을건너몽매에그리던처자의옆으로갈수있었다.
사단이난것은장터에서였다.
소판돈을소매치기당한후망연자실,땅바닥에주저앉은농민에게그돈을모두
내주고만것이다.
결국이중섭은일본에가지못했고끝내는객사하고말았다.

시인구상과화가이중섭의관계에대해그깊은내막은모르지만구상은오래동안
이중섭을보살폈었다.
그구상이나이80에자기의신앙에대해진솔한얘기를한적이있다.
‘나는예수를안후하루도마음편한날이없었다.’
그의인간적의지가향하는모든길목에서예수가간섭한것이다.
바꾸어말하면그는일상을예수안에서살았다.
예수를피하려고하지않았기때문에계속만나야했고모든일에간섭을받았기에
편할수없었던것이다.
그의번민은신앙의본질이다.
상대적인간이원하는모든것이절대적인것에의해검증될때마다그게누구든
번민하고고통받는다.
하루도마음편할날이없었다는시인구상의얘기는그래서진정한’신앙고백’이다.

살아있는성녀로불렸던테레사수녀는본명이아그네스곤자보아슈,
유고슬라비아태생으로1928년인도캘커타에서수녀생활을시작했다.
1950년인도시민권을얻었으며,
1964년뱅골에한센씨병환자들의요양원을개설,봉사했다.
그녀는막사이상과게네디기금상,그리고노벨평화상을수상했다.
최근보도에의하면,
테레사수녀는50여년간신이주신소명에따라살면서도번민하는신앙으로고통
받았다고한다.
고해신부에게보낸많은편지에서예수를보지못하고그의말씀을직접듣지못하는
고통을호소했다고한다.
테레사수녀역시예수를알고난후하루도편히살지못한것이다.
마지막순간까지자기가받은소명에따라산것을보면번민하는신앙을끝까지지킨
것을알수있다.

‘내속,곧내육신에선한것이거하지아니하는줄을아노니원함은내게있으나선을
행하는것은없노라.
그러므로내가한법을깨달았노니곧선을행하기원하는나에게악이함께있는
것이로다.
내속사람으로는하나님의법을즐거워하되내지체속에서한다른법이내마음의
법과싸워내지체속에있는죄의법아래로나를사로잡아오는것을보는도다.
오호라,나는곤고한사람이로다.
이사망의몸에서누가나를건져내랴.’로마서7:18-25개역.

보이는종교로서기독교를시작한바울의자기고백이다.
인간의이중성에서오는이신앙적번민은예수를안후하루도편하게살지못하는
전형적인인간의모습이다.
바울이누군가.
그러나그도구상이나테레사수녀처럼그예수때문에번민하고고통받는신앙인인
것이다.
그들모두는결국같은본질적문제앞에서있었던것이다.

주께서는잡히시던날밤,
마지막만찬을마친후제자들과함께게쎄마네에갔다.
베드로,요한,야고보를데리고따로기도하러가실때공포와번민에싸여
‘내마음이괴로와죽을지경’이라고했다.
앞으로벌어질참혹한일에대한두려움에대해자기의심정을죽을지경이라고
말한것이다.
뿐만아니라
‘아버지께서는무엇이든할수있으시니이잔(고통)을나에게서거두어주소서.’
하고간구한다.
예수가십자가에서남긴마지막말이무엇인가.
‘나의하나님,나의하나님어찌하여나를버리셨나이까.’였다.
나사렛의청년예수가보여준이번민과고통은신앙의본질은같다는것을알게해
준다.
자기에게주어진십자가의소명을다하면서까지도하나님이자기를버렸다고
외치는것이신앙의본질이다.
iesuskristos-JesusChrist-예수그리스도는,예수가messiah-메시아-구세주,
하나님의아들이라는고백이다.
하나님의아들로고백되는인간도번민하는게신앙이다.

이세상에서가장무서운신앙이’번민’이없는신앙이다.
그대표적형태의하나가광신이다.
자기의신앙적상태에대해거침없이단정적인표현을쓰는사람들이그들이다.
번민이없기때문에단순해지고단순하기때문에자기중심적이다.
행함이있는신앙은’하루도편히살지못하는신앙’이지만자기중심적인신앙은
행할일이없기때문에편히살수있다.
우리속담에’관뚜껑을덮어봐야안다.’는게있다.
신앙이그런것이다.
우리가부르심을받는그순간까지도구원은현재진행형이다.
하나님의법과사람의법사이에서싸워야하는게인간이다.
그래서바울은자기를곤고(困苦)한사람이라고한탄했다.
어렵고고생스러운삶을살기때문이다.
신앙이위대한것은그곤고한삶을스스로선택했다는데있다.
거기에는반드시그만한이유가있는법이다.

참신앙은스스로어려운쪽을선택하고,
내것을내어주면서도오히려기뻐하는생활이다.
내가다른이들에게쓰임받는사실을감사하고고통과번민에서세상이줄수없는
깊고오묘한뜻을발견하는생활이다.
그놀라운체험은흔하지않다.
그러나한번그세계를본사람은자기의모든것을걸고신앙을지킬수있다.
그것은값이아니라가치의세계다.
‘아는자는말이없다.’는격언이있다.
그래서참신앙은과시하지않는다.
오히려감추려한다.
떠들고소란한신앙은모르는신앙이다.
기복(祈福)만하면서그게기도인줄한다.
온갖보이는것을탐욕적으로추구하면서그물량(物量)이제믿음의크기인줄로
착각한다.
그리스도는아는데예수를모른다.
그러니예수의가르침을알리가없다.
번민없는신앙은그래서무지한거짓신앙이다.

며칠전,
아침9시반경해외에편지를부치려고우체국에갔다오는길이었다.
어디선가여러사람이’주여,주여.’하고외치는소리가들려왔다.
그소리를따라가보니허름한건물의어둠컴컴한지하교회였다.
한참을서있었지만그소리는멈출기색이없이계속되었다.
그건기도가아니라’절규’였다.
다른내용도없이’주여,주여.’하고외치는것이다.
그게주술(呪術)이다.
내가요구하는것,내가원하는것에대해응답하라는’혐박’인것이다.
그런잘못된신앙엔번민이없다.
번민이뭔지도모른다.
예수없이’내’가중심이기때문이다.
그건기독교신앙이아니라기독교간판을달고있는굿집이다.
한국의개신교는그숫자에서굿집이더많다.
그리고계속늘어날것이다.
정규신학교보다무인가,사이비신학교가두배나더많기때문이다.

‘나는예수를알고난후하루도마음편한날이없었다.’
시인구상도,테레사수녀도,사도바울도,심지어인간예수까지도마찬가지였다.
하루도편하지않다는것은,
우리가예수옆에있다는증거다.
우리가모든일에서내뜻과하나님의뜻사이에서싸우고있다는얘기다.
때로는발을헛디뎌넘어지지만그분곁을멀리떠난일이없다는증거다.
예수앞에있다는것은무엇인가.
그래서하루도편치못하다는것은무엇인가.
매일매일예수와싸워야한다는것은무슨뜻인가.
그건,
우리가’구원받고있다’는가장분명한표식이다.
편하면이미죽은것이다.
편치않다면제대로살고있다는뜻이다.
그래서감사해야한다.
그게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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