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를믿는다는것은아주쉽게정의하면나와예수사이에내용적관계를설정
하는것이다.
내게있어예수는어떤존재인가.
결국나는그를어떻게정의하고있는가하는문제로귀결된다.
이때중요한것이예수에대한올바른지식이다.
바울이그토록’그리스도에대한지식’을강조한이유가그때문이다.
예수를제대로모르면그신앙도온전한것이될수없다.
믿음은지식-이성을뛰어넘는것이지만그바탕은역시지식이다.
바른바탕에서만바른비약이가능하다.
그리스도에대한지식이부족하기때문에온갖사이비가나타나는것이며또그것을
비판없이따라가는현상이빚어진다.
성경은그것을’소경이소경을인도한다’고말한다.
신앙은그절대성때문에잘못들어서면그대로나락을만나게된다.
회복은거의불가능하다.

예수에대한신앙고백에서’베드로의고백’은가장대표적이고보편적인기준이된다.
주께서제자들을향해’너희는나를누구라고하느냐’고질문했을때베드로는제자
들을대표해서대답했다.
가장먼저쓰여진마가복음에서는,
‘선생님은그리스도이십니다.’-막8:29.
그리고누가에서는,
‘하나님이보내신그리스도이십니다.’-눅9:21.
그러나마태에서는설명이덧붙여진다.
‘선생님은살아계신하나님의아들그리스도이십니다.’-마16:16.이상공동.
성경을읽을때병행구의오리지날은언제나짧은쪽이다.
따라서베드로의고백은마가쪽이원형이고누가를거쳐마태에서부연설명을단
것이다.
우리가이해해야하는점은,
그런부연설명은반드시그렇게해야할필요가있었기때문에만들어진다는사실이다.
의미의훼손없는가필(加筆)이그것이다.
수많은필사본의모든가필도마찬가지다.

다른한가지는,
마가에서의단순한문장이마태에서길어진것은십자가사건이후두세대가지난
싯점에서교회공동체가신앙고백에대해어떤교리적정리를했기때문이다.
‘살아계신하나님’은가장유대적표현의야훼를지칭하고있다.
즉유대인들까지도받아들일수있는예수로자리매김하는것이다.
‘아들’은적자다.
가장지밀한관계의설정을통해그의권위를세우는것이며
‘그리스도’는구세주메시아의의미다.
따라서’살아계신하나님의아들그리스도’는예수에대한더이상의설명이필요
없는가장완벽한해석이된다.
다음에주께서는그런신앙고백을하고있는베드로를’게파-게바-반석-바위’라고
부르시고자기의교회를그반석위에세우시겠다고선언한다.
이는,
예수를살아계신하나님의아들그리스도로고백하지않는공동체는교회가아니라는
대단히배타적인선언이기도하다.

외국에서고등교육을받은,독서를많이하는친지한분에게신약공동번역을드리면서
꼭한번읽어보라고권했다.
학구적인그분은공동번역뿐아니라영어성경과일본어성경까지함께읽었다.
그리고그분이내린결론은,
‘예수는혁명가다’였다.
유대교에대한예수의첨예한입장이혁명적이라는것이다.
그리고그혁명적인태도에대해진심으로찬사의소감을피력했다.
그분에게예수는뛰어난정신의소유자이며구습을타파하는과격한혁명가의
모습으로파악된것이다.

어떤사람들은예수를성인(聖人)들의반열에세운다.
보통인간으로는이룰수없는위업을달성한거룩한인물로보는것이다.
그리고그성인을정신적으로흠모하면서그드높은정신을배우고기린다.
또어떤사람들에게는예수는하나의도덕적규범이된다.
예수의가르침이나공맹(孔孟)의가르침에구별없이그분들의드높은도덕적
정신과태도를평가하고자기의삶에서하나의지표로삼으려고한다.
또어떤사람들은예수의기적과이사에매료되어그를기복(祈福)의대상으로
삼고삼신할미에게빌듯온갖것을빈다.
그의신통력을통해부귀와영화를얻으려고애쓴다.
기복신앙이그것이다.
기독교신앙의변질중가장유치한단계가그것이며그게바로기독교의샤머니즘화
(化)다.
우리민족고유의종교인무속(巫俗)의옷을입은기형이바로’예수무당’이다.

작고하신장로한분이있었다.
비교적완고한신앙의소유자였는데그신앙하는자세와정신은배울게많은분
이었다.
그분이줄기차게주장하는지론은,
믿음에도양반믿음이있고상놈믿음이있다는것이다.
절대로양보하지않는자기주장이그러했다.
같은성경을읽고예수를알고이해하는일에서,
문맹-무학과초등학교학생,중고등학교학생,대학생과대학원학생,그리고고등
교육을받고전문적에종사하고있는사람들의수준은같을수있을까.
그럴수가없다는것은모두가아는대로다.
예배당안에함께앉아있어도교인들의예수이해와그리스도지식,그리고신앙의
순준과내용은천차만별이다.
이차이를좁히려고제정된것이교리-敎理다.
신앙내용을가장큰공통분모로정리,선언한교회의자기입장이그것이다.
그래서교리가필요한것이다.

‘예수는나에게누군인가’
이근본적질문에대한정직한대답이자기신앙의지금수준이다.
중요한것은,
이질문은’교리’로대답해서는안된다는점이다.
교리는’그리스도지식’을위한접근법이다.
그러나신앙고백은’예수체험’에대한자기의진솔한얘기다.
알고있는예수와체험된예수는다르다.
전혀다른존재다.
아무리형식이내용을담는그릇이라해도형식자체는우리를구원하지못한다.
지금한국개신교의최대위기는이구별을하지못하는척박한수준에있다.
본래형식을더찾는것은내용이빈약하고부실하기때문이다.

가짜박사소동이무엇인가.
속이비었으니겉을거짓으로꾸민게그것이다.
그러나교회는,에클레시아는겉을꾸며하나님을속일수는없다.
‘예수는나에게누군가’의질문이무서운것이그때문이다.
‘나’이외의그누구도,그무엇도나를대신해서대답할수없는게그질문이다.
그대답은반드시자기가직접해야한다.
준비가안돼있다면준비해야한다.
그게거짓말보다낫다.
하나님을속이는것보다는그게더정직한태도다.
우리의마음이진실된것이라면그분께서는언제까지라도기다리고계신다.

처음교회의베드로의고백은그때교회공동체가가지고있던자기정체성의모습이다.
신앙고백위에세워진교회의모습이그러했다.
그리고중세를거치면서교회는제도화(制度化)됐다.
로마카톨릭의하향식조직이그것이다.
예수도알수없는직제와전통이성경을능가하는모습이되어군림하는성직자를
배출한것이다.
성경본래의신앙으로회귀하기위한종교개혁은개신교라는또하나의교회를만들
었으며제도,직제,전통에대한과격한배척은수많은교단으로갈라지는분열의
쓴잔을마셔야했다.
그리고이미한국의개신교는그정체성을상실한채딴것으로변모하는중이다.
그변질은구조적인것이기때문에회복이어렵다.

이렇게혼란스럽고어려운시기일수록
‘예수는내게누구인가’라는질문에대한대답은더욱중요하다.
그대답이올바른것일때시류에관계없이자기의신앙적정체성을지킬수있다.
지금은모든여건이자기신앙에대해올바른대답을하기가어려운때다.
진짜보다는가짜가많고더많은사람들이넓고편한길로가고있다.
인간이자기의의지로혼자서좁고험한길을선택한다는것은절대로쉬운일이아니다.
그힘든길의끝을확신하지못하면어려운일이다.
중간에포기할수도있다.

그누구에게나신앙생활은혼자가는길이다.
가장가까운혈육이라해도대신할수없는게그길이다.
예배당에여럿이함께앉아있어도신앙의길은혼자의고독하고힘든길이다.
때문에그길을스스로선택한이유가분명해야한다.
그게’신앙고백’이다.
예수는내게있어누구인가.
우리모두는과연어떤대답을준비하고있는가.
그게어떤것이든반드시대답이있어야하는게신앙생활의요체다.
베드로의신앙고백은실로많은것을알게해주는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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