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림돌.
한인간이종교를가진다는것은그인생에있어다른어떤것과도비교할수없을
정도로중차대한문제다.
삼신할미에게손자를점지해달라고정한수를떠놓고비는것은미신이지종교는
아니다.
모든고등종교는경전을통해전통적으로정리된’내용’을가지고있다.
불경(佛經)이나성경,코란이대표적인것들이다.
오랜세월을지나오면서그경전들이사람들에게받아들여진것은그내용이’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진리’라고말한다.
‘변하지않는참’이라는뜻이다.
때문에그참은생활의기준이되고행동양식의근간이되는것이다.
종교-宗敎가근본을가르친다는의미가그것이다.
따라서종교를가진다는것은그근본이되는가르침들을받아들이겠다는인격적
결단이다.

크게봐서,
종교는그종교를받아들인사람에게세가지를요구한다.
첫째가가치관의변화다.
극단적인표현이긴하지만다이아몬드가돌로보일정도의변화가그것이다.
가치를부여하는대상이완전히달라지는것이다.
거의대부분의사람들이’종교인’이되었으면서도그신앙생활에서실패하는이유가
여기에걸려넘어지기때문이다.
가치관의변화가없다면’한번난사람’이지’거듭난사람’은아니다.
종교가요구하는사람은언제나’거듭난사람’이다.
두번째가전향(轉向)이다.
성경에쓰여지고있는’회개’라는용어가바로전향을의미하는단어다.
가던방향을완전히바꾸는게전향이다.
목표가달라지는것이다.
‘거듭난사람’이아니고는어려운일이다.
그러나전향이없이신앙생활은내용적으로불가능하다.
종교가요구하는방향과는다른방향으로가면서’종교인’이될수는없다.

이두가지단계를수용할수있다면세번째요구는자연스레이루어진다.
그게탈속(脫俗)의정신이다.
불교에서는사바세계를떠나는,출가라는적극적행동양식으로표현하고있다.
비록그몸은풍진세상속에서살아도정신은그세계와상당한거리를가지는
생활태도가그것이다.
세속에휩쓸리지않는,자기중심이분명한삶의태도를가지는것이다.
그중심의바탕이종교의’참’이기때문에속(俗)에있으면서도성(聖)을유지하게
된다.
종교를가지고있으면서도세상사람들과하나도다르지않게사는것은아직’참’을
모르기때문이다.
가치관의변화도,전향도,탈속도이루어지지않은’한번난사람’그대로있는것이다.
종교인중거개가그런사람들이다.
종교의깊은뜻을모르고이를가볍게생각하고있기때문이다.

우리나라는국민의3분의2이상이종교를가지고있는종교적국가이기도하다.
그런데도사회가정화되지못하고탁하고혼란스럽다.
사람살기에대단히고통스로운사회다.
정치,경제적이유가아닌종교적이유를말하라면종교가그본연의기능을다하지
못하고있기때문이다.
특히현대인들은종교를하나의’문화현상’으로보는경향이크기때문에이문제를
심각하게생각하지않는다.
여기에는종교스스로의책임도있다.
그렇게보였기때문이다.
외형을키우는물량주의때문에가치관의변화,전향,탈속의정신같은어려운부문에
대해가르치지않았다.
그런걸강조하면사람들이떨어져나간다.
이태만과방만이이제부메랑이되어종교를강타하고있다.
그게종교의’변질’현상이다.
종교가본래의정체성을잃고인간의요구에영합,다른것이되가고있는것이다.
정말본질적인위기가아닐수없다.
우리가우려해야할것은역사적으로종교의변질은회복이어렵다는점이다.
종교가가지는절대성이사악한인간들에의해거짓까지도그것으로포장하는경우가
있었던것이다.
지금이라고크게다른것도아니다.

종교를가진인간이신앙적인삶을살기위해서는그신앙내용이내면화(內面化)해야
된다.
내면화는신앙내용의이성적소화를뜻한다.
음식물이소화되어몸에양분으로스며들듯종교의가르침이녹아들어일상안에서
삶의형태로나타나는수준이그것이다.
성경에서는그런경우를’행함이있는믿음’이라고정의하고있다.
지금우리사회에서종교의기능이없는것은행하는믿음이크게부족해서다.
내면화되지않은,표피적인믿음으로가득차있기때문이다.
예배당의안과밖의생활이이중적인이유도거기에있다.
신앙의내면화는이미앞에서언급한가치관의변화,전향,탈속의정신을거치지
않고는이루어지지않는다.
‘거듭난자’가된다는것은결코아무나할수있는쉬운일이아니다.
그래서’회개’가귀한것이고그회개가받아들여지는이유도그진정성때문이다.

그렇다면수많은명목교인(名目敎人)들이신앙적내면화의단계로들어가지못하는
이유는무엇일까.
평생을예수믿으면서도거듭나지못하는것은무엇때문일까.
우리모두를위해이처럼진지한질문도드물것이다.
이제성경이설명하는대답을들어보자.
‘유혹을당할때에아무도"하나님께서나를유혹하신다"는말을해서는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악의유혹을받으실분도아니시지만악을행하도록사람을유혹하는
분도아니십니다.
사실은사람이자기욕심에끌려서유혹을당하고함정에빠지게되는것입니다.
욕심이잉태하면죄를낳고죄가자라나면죽음을가져옵니다.’
야고보1:13-15공동.
유혹이무엇인가.
사람을호리어나쁜길로꾀는게유혹이다.
유혹을받으면판단이흐려지고마음도사악해진다.
‘참’에서멀어지게되는것이다.
본문은그유혹을만들어내는것이인간의’욕심’이라고설명한다.
욕심이유혹을불렀고그유혹은우리로하여금거듭난자가되지못하게하는것이다.

모든번역성경은그원문의뜻에대해서한계를가진다.
위의본문에서’욕심’도그런경우다.
에피두미아-epithoumia는단순한욕심이아니다.
욕심은무엇을가지거나누리고싶은마음이다.
건전한욕심은개인과사회를발전시키는원동력이기도하다.
그러나본문에서의에피두미아는그의미가다르다.
헬라어원문과영어의대조성경에서는lusts로번역했다.
그리고NIV영역성경에서는,
‘byyourownevildesireandenticed로번역했다.
lust는색욕,성욕,육욕을의미한다.
건전한욕심이아니라어떤대상에대한강력한집착을뜻한다.
evil로수식하는것은’나쁜욕망’이라는강한의미다.
결국명목교인이진실된신앙인이되지못하는것은이’나쁜욕심’이걸림돌이
되기때문이다.
가치관의변화도,전향도,탈속의정신도이걸림돌에걸려넘어진것이다.
에피두미아-탐욕-세속의색(色)이나재물을탐내어그칠줄모르는욕심은
그렇게무서운것이다.
그보다더큰함정은없을것이다.
욕심-죄-죽음이라는도식적표현은탐욕이얼마나큰걸림돌인지를알게해준다.

이세상에욕심이없는사람은없다.
그러나그것이건전한것이라면걸림돌이되지는않는다.
그러나탐욕-에피두미아는다르다.
그’집착성’이우상이될수도있기때문이다.
집착이강할수록믿음에서는멀어진다.
그래서한번빠지면나올수없는함정이라고표현한것이다.
이제종교를가진사람들이생각해야할숙제는내가집착하는탐욕의대상이무엇
인지를가려내는일이다.
식욕,성욕,물욕,명예욕은가장보편적인탐욕들이다.
이탐욕을채우려는인간의지나친행태는역겨울정도다.
거기에참이비집고들어갈자리는없다.
탐욕이죄로이어지고다시사망으로이어지는나쁜연속성이그것이다.
그게누구라도이탐욕을가진채진정한신앙인이될수는없다.
탐욕과믿음은끝까지서로어긋나는,상치되는정서이기때문이다.

모든고등종교의경전들은한결같이물질을멀리할것을가르치고있다.
탐욕의대상자체를거부하는것이다.
그것이참믿음에이르는길에서큰걸림돌이되기때문이다.
우리가성인,성자라고부르는모든분들은한결같이’검소’한생활을했다.
그분들이우리와다른점은탐욕의해악을깨달은것과그것을차단한결단이다.
종교는하나의문화적현상으로현대인들의필요에의해존재하는악세사리가아니다.
한인간의삶전체를완전히뒤엎는놀라운세계다.
차이가있다면더가깝게접근한사람이있는가하면아직도멀리떨어진사람이있을
뿐이다.
오늘의우상은단연코돈-물질이다.
거기에서자유로울수있다면진정한의미에서종교를가지고,그종교의가르침대로
사는구원된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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