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주신 계절.
기원전27세기이전이면사실아득한옛날이다.
그때메소포타미아(바빌로니아)남부지역에는사람들이모여살면서’문화’를
만들어냈으며우르크기(期)에는도시국가에서수메르인의통일국가가탄생했다.
그때가우르제3왕조때다.
지금우리들이’인류최초의수메르문화’라고부르는것이바로그문화권이다.
수메르문화는바빌론제1왕조이후셈(Sem)족에게전해져흡수,동화되었다.
성경에나오는히브리족장아브라함이바로우르출신이다.
기원전3000년경,
눈썰미가있고지혜로운어떤사람이강가에남아있는물새들의발자국을보고
영감을얻어글자를만들었다.
그게설형문자(楔形文字),곧쐐기글자다.
주로흙으로만든점토판에갈대펜으로썼기때문에쐐기모양으로보이는데서유래된
이름이다.

수메르인의쐐기글자는,오리엔트에서는페르시아에서1세기중엽까지사용했으며
기원전1700년대에집대성된’함무라비법전’도이쐐기글자로쓰여졌다.
실로이글자는거의4000여년동안중동에서쓰여진위대한문자인것이다.
나중에만들어진페니키아인의’알파벳’에도그리스,이집트문자와함께큰영향을
끼쳤다.
한편쐐기글자로기록된,지금까지남아있는유명한작품은우르크왕’길가메시’의
모험을기록한’길가메시-Gilgamesh-서사시’다.
니네베(니느웨)의도서관에서출토되었으며오리엔트각지에서점토판조각들이
발견되기도했다.

그렇다면기원전27세기이전에는’문화’라는것이존재하지않았는가.
결코그렇지는않을것이다.
수메르문화역시그이전시대의문화라는모태가있었기에만들어진것이고,발전한
것이다.
우리는여기에서아주중요한사실을깨달을수있다.
‘기록되지않은문화는존재하지않는다’는역사적현실이다.
기록은그렇게중요한것이고그매체가글자다.
지구상에는수많은종족들이살고있다.
그러나자기고유의글자를가진민족은많지않다.
수메르의문화가전해진것은그들이발명한설형문자-쐐기글자가있었기때문이다.
그동안발굴된수많은점토판(이중에는불에구운것도많다.)을해독,읽으면서
비로서위대한’수메르’문화가세상에알려진것이다.
기록이가지는의미는그렇게막중하다.
동굴생활을하던원시인류가동굴벽에남긴그림도하나의기록이다.
우리는그그림들을통해그들의생활을부분적으로유추할수있다.
그러나그림은글자만큼구체적이지는못하다.
인류문화사에서글자의발명과기록은인류가문화적으로더발전할수있는결정적인
요인이었음은더말할것도없다.

‘가을은독서의계절이다.’
나는이켐페인에언제나반대한다.
여름이강과바다의계절이라면가을은들과산의계절이다.
밖에서생활하는계절들인것이다.
가을의들과산은그맑고투명한자연그대로우리들을불러낸다.
그러나겨울은내공(內功)의계절이다.
일찌기서구에서는겨울을’신이주신계절’이라고불렀다.
봄,여름,가을이외향적인계절이라면겨울은내향적인계절이다.
안을다지는시간인것이다.
물리적으로도밖에서보다는안에서생활하는시간이많은계절이다.

모두가아는대로인간은육체를가진동물적존재이자정신을가지고있는이성적,
영적존재이기도하다.
본능이동물적속성이라면사유(思惟)는정신적기능이다.
이서로다른기질에균형을잡는것이’문화’다.
본능적욕구를도덕적으로제한하는능력이곧문화의수준이다.
인간이그안을다진다는것은비록동물적인조건을가지고있다해도정신적존재
로서의인격적삶을살기위해서다.

안을다지는첩경이무엇일까.
그게’기록’을읽는것이다.
선험(先驗-먼저경험한)된사유의기록은우리가거저받은선물이다.
인간이글자를발명한이후남긴모든기록은그래서인류의자산이다.
누구나원하기만한다면나누어가질수있는값진유산인것이다.
책은그유산을담고있는그릇이다.
아직까지이책을대체할수있는그릇은없다.
그리고앞으로도그질적인면에서책을능가하는그릇이나타나기는어렵다.
나는오래동안거의매일여러가지기능으로컴퓨터를사용하면서아무리큰모니터라도,
아무리성능이좋은본체나부속기기라해도그것이책을능가할수없다는것을일찍
깨달았다.
책은기계가줄수없는’문화적정서(情緖)’를가진다.
컴퓨터가무기물이라면책은유기물같은체온을가지고있다.
무게,냄새,디자인은모두가지극히인간적이다.

책은TV나영화같은찰라적인즐거움과재미는적다.
TV나영화가우리에게주는것은영상,즉이미지다.
그작품성의잔재가남는다해도소극적이고일과성을벗어나지못한다.
질이나쁜영상들은인간의말초신경을자극,이미지에중독되게한다.
폭력물이아이들에게미치는영향이대표적인것이다.
불륜과퇴폐의TV연속극들에사람들이중독되는현상도마찬가지다.
책은컴퓨터처럼편리하지도않다.
나는인터넷으로책과음반,비디오나디비디를주문하고인터넷뱅킹으로송금하는
것은물론,주문한물건들을집에앉아택배로받는다.
옛날에는상상도못하던편리함이다.
이메일은같은시간에지구의어디와도가장저렴한가격으로통신할수있다.
컴퓨터의편리함은계속발전할것이다.
처음컴퓨터는작은방하나의크기였지만,그게지금은큰봉투에들어가는노트북이
됐다.

책은,
그것을읽기위해서는상당한노동이필요하다.
물리적으로긴시간을투자해야하고조용한장소도마련해야한다.
조명이중요한것은더말할것도없다.
그리고지금은책값이비싸기때문에부담도상당하다.
그뿐이아니다.
책을제대로읽기위해서는정신적으로집중해야하고그뜻을제대로깨닫기위해서는
스스로깊이생각해야한다.
때로는현실을뛰어넘는상상력도가져야한다.
한인간이그일상에서손에책을쥔다는것은결코쉬운일이아니다.
특히학교를졸업하면학문-공부와는담을쌓는우리네생활에서는더그렇다.
책뿐아니라서양고전음악,그중에서도긴시간이필요한대곡들도비슷한조건을
요구한다.

책에는인류의방대한경험과깊은사색이녹아있다.
시간과공간을넘어한인간이그것을접할수있다는것은사실놀라운일이아닐수
없다.
기원전1200년경부터기원후100년어간에기록된’성경’이현대인들에게거부감없이
읽히는것이바로그런이유다.
그때나지금이나올바름은같은것이고정직한인간이추구하는목표도같은것이기
때문이다.
전문용어로는그것을’진리’라고하지만사실은더포괄적이고상식적인내용들이다.
그어떤표피적이고찰라적인것도,그것이아무리화려하고현란해도일과성을벗어
나지는못한다.
우리들의삶을풍요롭게하고수준높게하는것은모두책속에있다.
책이아닌그어떤것도책의기능을대신하지못한다.
책을많이읽는사람은,
인생을살면서모두가만나는좌절,실패,슬픔,고뇌앞에서결코쓰러지지않고
그것들과마주할수있는’자기’를가질수있다.
그게내부,즉안의힘인것이다.
분별력과판단력은기록들을읽음으로서얻어지는지적능력이다.
여기에비해음악과미술은아름다움의깊은세계로우리를안내해준다.

지금우리들은’신이주신계절’을어떻게보내고있는가.
겨울이다가기전에스스로에게물어볼일이다.
먼저TV를꺼야한다.
그건백해무익한물건이다.
그리고되찾은시간들을책과음악과미술에투자해야한다.
우리들을온전한인격체로완성시켜주는그놀라운세계의문을열어야한다.
세상에는언제나싸구려와값진것이있고,
열등한것과우수한것이있으며,
추한것과아름다운것이있다.
저속한것이있는가하면고상한것이있고,
버릴것이있는가하면취할것들이있다.

내가안락의자에앉으면마주보이는왼쪽벽면하단에는고호의그림들이있다.
특히’까마귀가있는밀밭’과’오베르의교회’가잘보이도록배치했다.
여러개의그림을배열,촬영한이커다란사진판은오베르에서직접사가지고온
것이다.
나는고호의무덤앞에서요절한천재를애도했고,천정에작은창문이나있는그의
비좁은방에서열악한환경에서도최고의걸작이나올수있다는것을깨달았다.
TV화면이나모니터를통해서도고호의그림은볼수있다.
그러나그것은영상이며일과성이다.
액자에넣어놓고보는’그림’은전혀다른세계다.
책도,음악도,그림도마찬가지다.
그것은인류가기록으로남긴귀중한자산이며우리가다가가는노력을하는만큼
세상에서제일귀한것으로보답해준다.
‘신이주신계절’,안을채우는계절,
봄이오기전에내공을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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