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개를 업은 여자.
1950년7월1일.
며칠전인6월25일새벽38선을넘어남침을시작한인민군탱크가우리가살고있는
도시에들어왔다.
사람들은놀랬고,무엇을어떻게해야할지를몰라이리뛰고저리뛰기만했다.
결국은모두가황망히피난길에나섰고우리가족이남쪽을향한신작로에들어섰을땐
피난민행열이길을메우고있었다.
그때나는중학생이었기때문에그모든일을거의다기억하고있다.
한참을정신없이걷다앞을보니젊은여자하나가베개를업고가는게보였다.
나는어머니에게이사실을알렸고어머니는그젊은여자를불러세운후,
‘애는어디두고베개를업고가는가’하고물었다.
포대기를풀고자기가업은게베개라는것을확인한순간여자는부르짖기시작했다.
‘내애기,내애기’
그리고는사람들의물결을헤치면서집을향해뛰기시작했다.
아마도그젊은여자는집에도착해서애기를찾았을것이다.
나는지금도그렇게믿고싶다.
얼마나놀라고무서웠으면애대신베개를업고나왔겠는가.
전쟁은그렇게참혹한것이었다.

근자나는지금의우리사회의혼란과이상한변화를지켜보면서그때의’베개업은
여자’를자주생각한다.
정황이꼭그렇기때문이다.
본질은잃어버리고껍데기만안고가는지금의우리가그여인과하나도틀리지않다고
생각하고있다.
나처럼나이가많은,고등교육을받은구세대는옛과지금을비교할수있는연륜을
가지게된다.
그건단순히표피적비교가아니라심층적이고광범위한것이다.
지금이대로가면안된다는적신호가눈에보이기때문이다.
경험과체험이가져다주는분별력이그것이다.

오늘우리사회의가장큰특징은,
사람들이진지(眞摯;말이나태도가참되고착실한것)하지않다는것이다.
생각이깃털처럼가볍고쏠림현상이심하며그삶이표피적이고찰라적이다.
내용보다는때깔을찾고터무니없이비싼물건도생각없이마구산다.
그리고낭비한다.
그생각이진지하지못하면’삶’도마찬가지다.
목표가분명하지않고주체의식이부족하기때문에하루하루남들을따라살게된다.
그끝이’허망함’이다.
목표가있어야결과가있는것인데목표없이살고있으니결실이있을수없다.
가장큰이유는,
가치(價値)의상실때문이다.
지금의우리사회는값은있는데가치가없다.
값은물건을사고팔기위해정한금액,돈이다.
여기에비해가치는어떤사물이지니고있는의의나중요성이며인간정신의목표가
되는보편타당의당위이기도하다.

우리모두가아는대로인간은동물적조건을가지고있는정신적존재다.
일상을살기위해값의체계가있어야하며똑같이정신생활을위해가치의체계도
가지고있어야한다.
경제가값의세계라면문화는가치의세계다.
우리의생활이값과가치의체계를함께가지고있어야하는이유가그것이다.
그런데값만있고가치의세계가상실되었다면정신적존재인인간이동물적으로만
살고있다는얘기가된다.

진지하지못한현대인들이눈을밝히고추구하는것이’돈’이다.
가치의자리에값이들어선정황이그러하다.
흡사모두가’돈’만있으면무엇이든지할수있다는듯이살고있다.
정말그럴까.
우리가다아는대로년전이건희의딸이뉴욕에서자살했다.
그내막은알수없지만가장분명한객관적인설명은,
‘이세상에는돈으로도안되는일이있다.’는것이다.
돈많기로따지자면누가이건희의딸을따라갈수있겠는가.
그런데도그딸은스스로목숨을끊었다.
그녀에게돈은아무것도아니었던것이다.
그녀가부딪힌벽은돈이아니라가치의견고한체계였기때문이다.
가치를값으로살수있다고생각했던젊은이의좌절은그렇게큰것이었다.

정신적존재인인간에게있어최고의가치는’사랑’이다.
모든종교의핵심이’사랑’인것을생각하면알수있는일이다.
어머니의자식을향한지극한사랑,
이성간에가지는애정으로서의사랑,
형제나친구들사이에존재하는우애로서의사랑,
내것을내주어남을돕는아가페의깊은사랑,
그사랑들은돈으로환산되지않는다.
얼마짜리사랑은없는것이다.

우리는충무공이순신을흠모하고자랑스럽게여긴다.
백의종군한그에게는벼슬도,재산도없었다.
그럼에도우리가그를흠모하는것은그의’명예’때문이다.
명예가무엇인가.
세상사람들로부터받는높은평가다.
사랑과마찬가지로얼마짜리명예란없다.
그건가치의체계이기때문이다.
누란의위기에선조국을위해목숨을바쳐최선을다한그충정을기리는것이다.
그래서충무공=忠武公이다.
이땅에대한민국이존속하는한그의명예는지켜지고흠모될것이다.

다산(茶山)정약용(丁若鏞1762-1836)은조선말기의학자이자문신이며
그의세례명은요안이다.
1783년회시(會試)에합격했으며89년에식년문과(式年文科)에갑과(甲科)로합격
했다.
경기도암행어사로크게활약한바있으나1800년그를아끼던정조가서거하자1801년
신유교난때유배되어18년간유배생활을했다.
그가방대한저서로서실학(實學)을집대성한게이때다.
지금전해지고있는그의시문및저술을망라한’정다산전집’은156권4책이다.
실로그안에는우리나라의철학,정치,경제,법제,역사,지리,국방,과학등모든
학문분야가집대성돼있다.
다산정약용이얼마나뛰어난인간이며탁월한학자였는지는재론의여지가없는사실
이다.
왜우리는다산을흠모하는가.
그의깊고드높은’학문’때문이다.
학문의높은가치때문에그를기리는것이다.

우리는황해도해주출신의안중근(安重根1879-1910)을의사(義士)라고부른다.
나라와민족을위해의로운행동으로목숨을바쳤기때문이다.
그는,1905년을사보호조약이체결되자만주를거쳐블라디보스톡에망명했으며
이후독릭군에몸담았고아령지구의군사령이되어의병을이끌었다.
1909년10월26일,
일본인으로변장한그는만주하르빈역에잠입한후,초대조선통감이던이또오히로부미
(伊藤博文)를권총으로사살했다.
현장에서체포된그는1910년2월14일여순감옥에서처형되기까지모범수로서주변의
신망을받았으며조국을위한드높은신념은일본인들까지도감화되었다.
지금도그가남긴붓글씨들을보면한위대한인물의흔적을읽을수있다.
여순감옥에서쓴서묵200여점중20점을선정,1972년8월16일국가보물제569호로
지정했다.
우리가안중근을의사라부르고기리는것은그가가진’신념-조국에대한사랑’때문
이다.
그신념은인간안중근의덕목인것이며최고의가치체계라고할수있다.

값과가치를구분못하고,
오직돈,값만쫓아가는지금의우리사회는본질적인것들을상실한허망한사회다.
더무서운것은가치까지도돈으로살수있다는착각이다.
일찌기칼마르크스는돈만이사람을움직이게하는시대,돈이사회적가치들을침식
하는시대를’보편적부패의시대’라고정의한바있다.
지금우리들은허망한시대를살뿐아니라부패한시대에살고있다.
가치가학습되지않고가치의모범이보이지않고가치의자리에값이들어선삭막한
시대를살고있다.
지금우리사회에서썪지않은곳이있는가.
값만있고가치가없는사회는반쪽의공동체일뿐이다.
경제적으로아무리발전해도,GNP가아무리높아져도가치가상실된사회는사람이
사람답게살곳은못된다.

이미밝혔듯이인간은동물적조건을가진정신적존재다.
결코밥만먹고는살수가없는존재다.
동물적으로만산다는것은본능대로산다는뜻이다.
우리는전통적으로이런부류들을’짐승같은놈’이라고부르고’짐승만도못한놈’
이라고부르기도한다.
인간의동물적본능을억지하고인격적존재가되게하는게가치의체계다.
결국,값과가치의균형을잡는모든인간의행동이문화가되는것이다.
지금우리사회일각에는돈으로가치를살수있다는동물적인부류들이있다.
아마도그들은끝까지그게불가능하다는것을깨닫지못할것이다.

육체가값을요구한다면정신은가치를요구한다.
이균형을잡게하는사회적인노력이곧’교육’이다.
어떤결정적인변화없이이대로간다면우리는오직’허망함’을만날뿐이다.
모두가추구하는돈은끝까지값일뿐가치는아니다.
우리들의건전한일상은값의체계도있어야하지만똑같이가치의체계도있어야한다.
베개를업고끝까지가는것도,
베개를버리고애를찾으로가는것도,
우리의선택에달린문제다.
그리고그선택이곧국민의수준이며역량이다.
우여곡절은많았지만우리가반만년의오랜역사를가지고있는민족임을잊지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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