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나홍진.
영화(映畵)란,
어떤주제(主題)를움직이는영상으로표현하는예술의한장르라말할수있다.
이영화의시작은,
1895년파리에서공개된뤼미에르형제가고안한’시네마토그라프’를정설로인정
한다.
실로113년전의일이다.
내가처음으로봤던영화는흑백의무성영화였다.
보통활동사진(活動寫眞)이라고불렀다.
광목천을이어만든엉성한스크린옆에는변사(辯士)가서서영화의내용을설명하고
혼자서대사까지읊조렸다.
지금생각하면초라하기그지없는영화감상이지만그땐신기하기만했었다.
그러다가녹음기술의발달로토키가나왔고,총천연색영화가나타났을땐정말놀래기도
했다.
그리고’아이반호’는시네마스코프였다.
크게휘어진커다란스크린자체가경이로왔다.

지금까지도잊혀지지않는스펙타클은1959년윌리암와일러감독이만든’벤허’다.
찰튼헤스튼,잭호킨스,스티븐보이드가열연했던이대작은아카데미11개부문을
휩쓸기도했다.
특히이영화에서히브리인같은마스크로남우주연상을받았던찰튼헤스튼의연기는
아주인상적이었다.
나중에프랑스주간지’파리마치’를통해그의서재를봤을때그가평범한배우가
아니라는사실을알았다.
그거대한서재는사다리까지있는,책으로가득찬도서관같았다.
와일러감독이1953년에만든RomanHolyday-로마의휴일과1965년에만든
TheCollector-해결사등세작품을비교해보면이감독의재능이어떤것인지를알수
있다.
정말모든장르를커버하는수준이다.
적어도내생각으론아직까지’벤허’를능가하는작품은없다.
영화사에길이남을만한대작이다.
나는지금까지도벤허의비디오테입을소중하게간직하고있다.

내가제일처음본스필버그감독의영화는그가1971년에만든’Duel-결투’였다.
데니스위버와에디파이어스톤이주연한이영화는황량하게뻗은고속도로를승용차
로달리던평범한사람이미치광이가모는대형트럭에쫓기는스릴러다.
승용차운전자의기지로트럭은계곡밑으로떨어졌고결투에서이긴사람은기뻐
하지만곧이상한정적에싸여깊은생각을하게된다.
뚜렷한스토리도없는이영화를본후다른영화와는아주다른,뭔가를다시생각해야
하는모티브가있다는것을알았다.
그렇게스필버그는내게다가왔었다.
그는1947년오하이오주신시내티에서태어났다.
이제그도우리나이로환갑이다.
유태계미국인으로캘리포니아주립대학영화과를졸업했다.
그가만든’죠스’,’미지와의조우’,인디아나죤스’,쥬라기공원’같은오락영화를보면
이감독이천부의재능이있다는것을알수있다.
특히’E.T’는SF영화이상의,남녀노소모두에게하나의’환상적인세계’를열어준
작품이기도하다.
E.T.의그놀라운장면들은지금도인상깊은것들이다.

예루살렘에가면,’야드바쉠’이있다.
나치에학살된600만유대인을기리는기념관이다.
입구에들어서면어른가슴높이정도의네모난기둥이있고그위에는작은유리상자
속에어린애가신었던구두한짝이놓여있다.
나치에끌려가희생된그어린아이의구두는지금도세계를향해나치를고발하고있는
것이다.
그야드바쉠에들어가는길양쪽에는큰나무들이심겨져있고그아래에놓인돌에
글자들이부조돼있다.
나치치하에서유대인들을구출한사람들을기리는나무들이다.
그중한나무아래에는’쉰들러’라는이름이새겨져있다.
스필버그가1993년에만든영화’쉰들러리스트’의주인공이다.
이영화와2002년에만든’마이너리리포트’,그리고2005년에만든’뮌헨’은내가
크게실망한작품들이다.
허진호감독의’8월의크리스마스’를보고같은기대로’봄날은간다’를본다음의
기분과같은것이다.

‘뮌헨’을본후오래동안허전한마음이가라않지않아얼마전러닝타임135분의
‘컬러퍼플-colorpurple’테입을꺼냈다.
이틀에걸쳐두번감상해봤다.
1985년에만든이영화는,1900년대중반굴욕적인삶을살던기구한흑인여자의
이야기를다루고있으며아카데미11개부문에노미네이트됐던작품이기도하다.
우피골드버그와대니글로버의연기는정말대단하다.
그만큼감독의연출력이뛰어났기때문이다.
나개인적으로는이컬러퍼플이야말로스필버그의모든재능이다나타난작품
이라고생각한다.
20년도더된영화지만스필버그의작품으로는단연최고다.
엘리스워커는이소설로퓨리쳐상을받았으며대본은스필버그가직접썼다.
정말그가심혈을기울인대서사시다.
상은못받았지만미평론가들은그해의최고작품으로평가했었다.
지금다시봐도전혀틀리지않는평가다.
단지상복이없었을뿐이다.
그렇게오랜세월이흘렀는데도영화가주는감동은전혀손색이없다.

데이빗크로넨버그-DavidCronenberg는1943년카나다토론토에서태어났다.
처음에는토론토대학의과학학부에입학했지만1년후영문학과로전과했다.
1967년졸업때까지이미16,35미리의영화를제작한바있으며,
그는아마츄어카레이서이기도하다.
1986년’Fly’로헐리웃에진출했으며아카데미특수효과상을수상한이작품으로
세계적인감독의자리를굳혔다.
1991년작품인’네이키드런치-Nakedlunch’로92년전미비평가협회감독상을
수상했으며2002년에다시’폭력의역사-AHistoryofviolince’로같은상을받았다.

‘폭력의역사’를보고난후,
한동안여러가지생각을했다.
폭력영화를이렇게도만들수있구나하는것과악이정화(淨化)되는프로세스가다시
악을만나는극적인대비를통해인간안에숨어있는폭력이어떤것인지를알수있는,
아주독특한영화였다.
대본도탄탄했고,배우들의연기도전혀낭비가없었다.
메시지도분명했고,여운도길게남는,그런영화였다.
가장연약할것같은가족-가정이폭력보다더강하다는,폭력을정화해내는힘이
있음을보여주는특이한영화였다.
계속두번을봤는데도화면에서눈을뗄수가없었다.
그리고부러웠다.
우린언제이런영화를만들수있을까.
크로넨버그의연출은정말탁월했다.

영화가끝나관객들이다나간후에도한참동안자리에그대로앉아있었다.
기쁨을느긋하게즐기기위해서였다.
그리고혼자서말했다.
‘됐어,이제시작된거야,
드디어괴짜가나타난게야.
이제충무로의골빈당들이긴장하게생겼군.’
영화’추격자’는,
내가’8월의크리스마스’를본후처음보는한국영화다.
그건지금까지의한국영화들과는그모습을달리하는스릴러다.
나홍진은약관34세의감독이다.
‘도미요리’로이미주목받았고,단편汗(한-땀)으로2007년대종상을받은실력파다.
한양공대공예과94학번인나홍진은영상에매료되어2006년30대초반에
한국예술종합학교영화과에입학했고두학기밖에다니지못했으니아직학생이기도
하다.
사실그는학업을마쳐야되겠다는말을했다.

‘추격자’는,
그가직접각본-대본을쓰고연출한첫장편영화다.
제작자,돈,감독,배우,그리고스텝이모두갖추어져있어도그것만으론좋은영화는
결코만들어지지않는다.
좋은영화는반드시좋은시나리오-대본에서만나온다.
이건만고불변의법칙이다.
‘정성스레오래준비하고여러번고쳐쓴흔적이역력한작품이라는느낌을받았다.
상황들이치밀했고문장도매우간결했다.’
전직경찰포주역의김윤석이한말이다.
나홍진의재능이묻어나는얘기다.
그는1년동안이대본을서른번도넘게고쳐쓰면서와신상담했다.

첫추격신만일주일동안찍었다니그들이얼마나고생했는지는더말할것도없다.
무거운장비들을들고같이골목길을뛰어야했던스텝들의고생은설명이필요
없을것이다.
그래서격려를보내고싶다.
추격자는,
군더더기가없다.
연기자들의오버액션도없다.
사실자연스럽다는것은가장어려운연기다.
20년의캐리어가없었다면김윤석의그빼어난연기도없었을것이다.
추격자의옥의티는편집이다.
특정장면을너무길게끌고가는고질병이도진것이다.
영화다만들어놓고편집에서망쳐지는일은도무지끝날줄을모른다.
오히려짧게짤랐으면더인상적일수있는명장면들을죽이는것이다.

그래도추격자는한국영화의새로운가능성을열어놓은카다란수확임에틀림이없다.
약관의감독이이런영화를만들었다는것은더큰기대를가지게한다.
어떤면에서추격자는분수령이될것이다.
이제충무로식구들은긴장해야한다.
한해에만드는100여편의영화중손익분기점을넘는영화가20편도안된다는것은
물건-상품이나쁘기때문이다.
누가재미도없는영화를제돈내고보겠는가.
정말다른이유는없다.
부족한제작비로5개월만에만든추격자가청소년관람불가등급임에도불구하고
쉽게관객200만을돌파하고이제400만을바라보는게그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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