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옹지마 – 塞翁之馬.
이글을쓰게된가장직접적인동기는어떤식당에서본광경때문이다.
고급한식집인그식당에서일단의손님들이식사를마치고떠난식탁을봤을때정말
두려운생각이들었다.
오래전,이스라엘의텔아비브에서여행온미국소년들이식사를마치고일어선식탁을
보면서’저러고도미국이온전할수있을까.’하는생각을했던적이있다.
똑같은일이오늘우리식당에서현실로나타난것을보면서다시두려운마음을가지게
된것이다.
사람들이자리를떠난그식탁은개밥그릇보다더더러웠으며먹지않고남긴음식의
양이너무많았다.
일인당식대를생각하면그낭비는엄청난것이었다.
남은반찬은,버려지든지비위생적인방법으로다른식탁으로옮겨갈것이다.
두가지모두가옳지못한일이기는마찬가지다.
정부가추산하는,년간버려지는음식은10조원규모다.
정말하늘이무서운일이다.

쌀.
쌀은벼의껍질을벗긴알갱이를말하며,
벼의열매인이삭을정조(正租)라고한다.
알갱이는대미(大米)로총칭되며,
멥쌀은갱미(粳米),
찹쌀은점미(粘米),
매조미쌀은현미(玄米)라고부른다.
그리고쌀의분량을나타내는단위는,
톨,알,홉,되,말,가마,가마니혹은섬이라는말을쓴다.
쌀에대한표현과도량형이다양한것은그만큼우리민족에게쌀은밀접하고귀중한것
이라는살아있는증거다.
농사중에제일어려운것이쌀농사다.
쌀미(米)라는글자는八十八이라는뜻이다.
종자의파종에서입에들어가기까지여든여덟번손이가는게쌀농사다.
‘쌀한톨이농부의땀한방울이다.’
작고하신엄친께서내게귀에못이박히도록하신말씀이다.
나는지금도밥풀하나를아껴가면서밥을먹는다.
가정교육은그렇게중요한것이다.

1946년,
광복후1년이지났지만식량사정은악화일로였다.
드디어우리집식탁에’대두박밥’이올라왔다.
대두박(大豆粕)은콩깻묵이다.
말하자면콩으로기름을짜고남은찌꺼기다.
대개는버리든지비료로쓰기도했다.
그건,한마디로사람이먹을수없는밥이었다.
부모님들은거의필사적으로어디선가비싼값을주고쌀을구해왔고,반드시
할머니에게만쌀밥을따로지어드렸다.
나는버티기작전으로기다리가다할머니가남겨주시는쌀밥을얻어먹곤했다.
할머니는조금만잡수시고많을양을남겨내게먹여주셨다.
지금도그사랑을생각하면눈물이난다.
그럴때마다나는무섭게부릅뜬어머니의눈길을슬그머니피하곤했다.

그로부터20여년이지난1960년대중반까지,
봄이되면모든신문에는대문짝같은네개의한문글자가나타났다.
절양농가(絶糧農家)와초근목피(草根木皮)가그것이다.
절양농가는농사짓는집에식량이떨어졌다는것이고초근목피는먹을게없어
풀뿌리와나무껍질을벗겨먹은데서생긴말이다.
그때는실제로그랬다.
그게유명한’보리고개’다.
설익은보리나마먹으려면기다려야했고양식이떨어진사람들에겐참으로넘기기
어려운고개였던것이다.
쌀은그렇게귀한것이었다.

내가사병으로전방부대에서군복무를시작한게1957년이다.
세칭’자유당군대’다.
썩을대로썩은,껍데기만의군대였다.
나는부대에배치되어제대할때까지글자도선명한USMC의미해병대군복을입고
지냈다.
피복지급이모자랐기때문이었다.
솜에밴땀이얼어발에동상이걸리는조악한방한화도그때얘기다.
가장큰문제는한참먹을나이의젊은이들이항상배가고픈것이었다.
모든군수품이시장으로새나가는시대에쌀과보리(압맥)라고예외는아니었고,
여기에부대주변에기생하는직업군인가족들까지합세,졸명의배는고플수밖에
없었다.
나는군목이추천한사병으로일종계(一種系-주부식과담배,건빵담당)일을봤기
때문에그사정을가장잘안다.
사단장은군종참모를대동하고중대단위로장병들을모이게한뒤사병한사람이
지급받는쌀과압맥으로항고에밥을지어그것을모두에게보여주기까지했다.
그만큼의배식이아니면안된다는실물을보여주는것이었다.
그래도도둑질은끊이지않았고모든졸병들은계속밤마다먹는꿈을꾸면서제대
날짜만기다렸다.

지금도쌀은큰문제중하나다.
모자라서가아니라남아서다.
보관중인정부미를관리하는데만년간6천억원이소요된다.
여기에우르과이라운드협상으로수입해야하는의무량까지겹쳐지고있다.
쌀은모자라든남든쌀이다.
한국인의주식이며한국인의분신이다.
아무리매년쌀소비량이줄어들고있어도우리는쌀없이는살수없는쌀의민족이다.
수입쌀보다비싸도한국의쌀은’우리쌀’이다.

식탁에서남겨진음식중재활용이안되는게밥이다.
그냥버릴수밖에없다.
지금은그걸가져가는거지도없다.
‘밥’이버려진다는것은’쌀’을버린다는뜻이다.
정말무서운일이다.
아무리기계영농의시대라해도쌀이가지는정서적가치는여전히소중한것이다.
쌀은예로부터값과가치를함께가지고있는대지의소출이다.
엄청난음식이지저분하게남아있는식탁을보면서두려운마음이생기는게그때문이다.
쌀-밥의낭비는다른낭비와는사뭇그의미가다르다.
우리가그걸알아야한다.
바로북쪽에굶어죽는동포가있다는사실도잊으면안된다.
체제가인민을굶기는것과우리가그들을생각하는것은전혀별개의문제다.
밥을버리면하늘이노한다.
인간이먹을수없는대두박이밥이되어상에올랐던것이바로전세대의일이다.
그걸잊으면안된다.

고기.
1960년대까지우리식구가고기를먹을수있는것은설과추석때뿐이었다.
입에고기를넣고씹을때의그고소한맛을나는지금도똑똑하게기억하고있다.
‘더도말고한가위만같아라.’
추석은그렇게풍성한명절이었다.
쌀밥과고깃국,떡과엿,과일들,새옷,새고무신,재수가좋으면공책과연필도생겼다.
정말모든물자가부족한시절이었다.
특히고기는부자집이아니곤구경하기조차어려웠다.
지금은지천에고기요,다이어트하느라고기를외면하는시대다.
나는아들세대만큼고기를먹지못한다.
고기먹는습관이없기때문이다.
그만큼고기를먹지못하고살아왔다.
지금도고기는많이먹지않는다.
많이먹을수가없다.
많이먹으면위가놀라서탈이난다.

간식.
학교에서돌아와내가늘먹은간식은무우였다.
사실잘익은무우는맛도좋았다.
어쩌다설탕을조금받게되면손바닥에놓고혀끝으로조금씩찍어먹었고,
물에탄후,그단물을홀짝홀짝아껴가면서마셨다.
거즈로만든작은주머니에든일본군군용’비스켓’은별미중별미였다.
아마-사탕-눈깔사탕을먹는날은횡재였다.
설탕으로만든,그투명한왕사탕-눈깔사탕은꿈에보이는간식이었다.
어쩌다일본애들에게얻어먹어보는요깡(연양갱)과미깡(귤)은정신을혼미하게했다.
봄이되면아카시아꽃이큰간식이었고과일철이돼야참외와수박맛을볼수있었다.
북쪽내륙지방에살았던내게최고의간식은쓰르메-오징어였다.
일년에한번먹어보기어려운간식이었다.
고구마와곶감도북쪽에선귀하고비싼간식이었다.
그래서어린시절내가가장많이먹은간식이무우였다.
지금도무우하나만은아주잘먹는다.

자동차.
우리아버지는키가높은일제자전거를타고다니셨다.
나는아버지몰래그자전거를끌고나와온무릎이까지게넘어지면서타는법을배웠다.
그이후론,
그게어디든세워놓은자전거만보이면타봤고,주인에게잡혀얻어맞은일도많았다.
결혼후나는아내에게자전거를사주고뒤에서붙잡고밀면서타는법을배워줬다.
지금도아내는아주예쁘고날렵하게생긴자전거를가지고있다.
우리가자가용승용차를산것이1974년,
그땐여자운전자가거의없었다.
어렵사리운전면허를받은아내에게내가선물한흰색의예쁜차였다.
지금우리가족은모두가자기차를따로가지고있다.
이런걸’격세지감’이라고한다.
누가알겠는가,우리의손자대에선자가용비행기를가지게될지.
전세대가보리고개를겪은나라로서는기적같은발전을한것이다.
세상이발전하고변하는것은하나도나쁜게아니다.
문제는사람이다.
사람들이나쁘게변하는게문제다.

음식을먹는방법에서,
서양은자기접시에먹을만큼덜어먹는방식인반면,
우리는모든음식을상다리가휘어지게한꺼번에차려내는동시나열식이다.
덜어먹는쪽은남은음식을재활용할수있지만동시나열식은버려야한다.
여기에서우리의음식낭비가구조적이라는사실이밝혀진다.
옛동헌(東軒)에서의상물림이그원형일것이다.
원님이물린상을아전들이먹고다시종들이먹는계단식구조가그것이다.
지금구내식당에서식판을이용,먹을만큼덜어먹는경우가있지만전체적으로는
여전히동시나열식이다.
여기에더해먹지도않는반찬의가지수로경쟁하는식당들의속성상버려지는음식은
계속늘어날수밖에없다.
우리도이제는덜어먹는음식문화를구축할때가된것같다.

버리지않고살수는없다.
또버리기도해야한다.
그러나,
먹는음식을버린다는것은다른문제다.
그건하늘이무서운일이다.
굶주림이라는벌이얼마나무서운것인가를반드시알아야한다.
정말이제는식사문화를바꿀때가됐다.
가정에서,학교에서시작해야한다.
그게첩경이다.
그누가내일일을예측할수있겠는가.
그래서인생만사는새옹지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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