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여(無如) 스님의 가르침.
무여(無如)스님은,
태백산과소백산사이첩첩산중에자리한경북봉화의축서사주지다.
석가탄일인지난12일자신문에그분의인터뷰기사가실려있어읽어보게됐다.
정말오래간만에’큰스님’을만난것같았고올바르고힘든수행을한체험이없이는
말할수없는’참’을들을수있었다.
또한가지는,
그말씀을읽으면서스님이가지고있는인간적기본이탄탄하다는느낌이었다.
그분은사바에서고등교육을받은분이다.
대학에서경제학을전공했고군복무를마친후직장생활을하다가어떤결정적계기를
만나출가한분이다.
해인사로여행하던중경북고령의한암자에서묵게되었는데사흘째되던날아침
공양을받던중암자의노장이느닷없이질문했다.
‘자넨누군가?’
턱막혀아무대답도못했다고한다.

사실우리들은남들이나를알고있는것만큼도나자신에대해모른다.
‘자넨누군가.’라는갑작스런질문에제대로대답할수있는사람은결코많지않다.
가장쉬운것같지만그대답은이미’밥’의세계가아니고’정신’의세계이기때문이다.
이른아침부터하루종일,매일매일을분주히살아도무엇때문에그렇게살고있는지
그뜻을제대로알고있는사람은드물다.
주어진조건과환경에순응하고있을뿐스스로에대해질문하지않는다.
‘나는누구인가.’
아주잘알것같지만사실은아무것도모르고사는게우리들이다.
내가누구인가를대답하려면도구가있어야한다.
철학도,종교도모두가도구들이다.
그공통점은형이상학의세계다.
따라서철학과종교가없는사람은자기를설명할방편이없게된다.
밥-물질-돈밖에모로는머리로는접근이안되는세계이기에그렇다.
그러니’자넨구군가.’하는질문에콱막히는것이다.

무여스님은그길로출가했고,
그정진(精進)과정이치열했던분으로유명하다.
그분은자기의체험으로첨선수행을강조한다.
선(禪)은삼문(三門)의하나로,
정신을가다듬어번뇌를버리고진리를깊이생각하여무아(無我)의경지에드는일이다.
스님은오대산북대에서2년동안눕지않고방바닥과의자에앉거나서서참선을
했다고한다.
스님의설명은,
참선의가장좋으점은마음을쉬게해준다는것이다.
참선수행은분주하고번잡한마음을쉬게하고우리모두의본성(本性)을발굴해준다고
한다.
‘현대인들은무엇보다도마음을쉬어야합니다.
그러면흙탕물에서진흙이가라앉고원래의맑은물로변하게됩니다.’
체험하지않고는할수없는얘기다.
우리는매일매일을분주하게만살줄알았지마음이쉬어야한다는사실은모르고있다.
놀줄도모르는데마음이쉬는일에관심이나있겠는가.
마음이쉬지못하니’나는누구인가.’를모를수밖에없다.

자기가누구인지를아는게’깨달음’이다.
그래서어려운것이다.
그작업은노트북으로는절대안된다.
노트북의정보를다꺼내놔도답은없다.
‘나’를제대로아는일은그만큼어렵다.
매일아침거울을들여다보고얼굴을다듬으면서보는자기는,사실껍데기뿐이다.
그게자기인줄알고쓸고다듬지만그건가짜다.
진짜’나’는그껍데기안에감추어져있는’실존적존재’다.
철학의이용어는종교에가면’피조물’이된다.
인간이’인간’을설명하려고시도했을때만들어진’말’이다.
계속흙탕물속에서허우적거리는한그누구도자기의본성은볼수가없다.
그래서선(禪),즉마음을쉬게하라는것이다.
흙탕물이가라앉는시간을가지라는얘기다.
혼자조용히있는시간이그래서필요하다.
소음과현란함에중독된우리들로서는정말어려운일임에틀림이없다.
우선조용하면견디지못한다.
오히려불안해한다.
병이깊은환자들이기때문이다.

불교에서말하는삼독(三毒)은,
사람의착한마음을해치는세가지번뇌다.
첫째가탐(貪),무엇을가지거나차지하고싶은욕심.
다음이진(瞋),노여움,성내는일.
그리고치(癡),너무나미련하고우둔해서미친듯한짓을하는일.
인간은이세가지번뇌를벗어나기가어렵다.
스님의설명은,
이탐,진,치가우리들의삶을탁하고어둡게하며따라서탐욕이커지고그게이루어
지지않으면성을내고분노하고결국은어리석은짓을하게된다는것이다.
삼독은사바세계의대표적인속성이다.
따라서그굴레를벗어나기는쉽지않다.
더구나모든것을많고,큰것,즉물량으로가늠하는세상에서는더욱그렇다.
삼독의결말이’어리석은인간’이되는것이다.
지금은그누구도’돈’을삶의수단이라고말하지않는다.
모두에게’돈’은언제나최고의목표다.
수단과목표가바뀌어있는한’나’는설명하지못한다.
언어가다르기때문이다.
삼독은언제나우리와함께있는’조건’이다.
가까이할수도,멀리할수도있는조건이다.
선택은우리가하는것인데그게쉽지가않다.
가치관의문제이기때문이다.
가치관이분명한사람은’나’를설명할수있는사람이다.

무여스님은자기가성장했던시대와지금을비교하면서설명한다.
’60-70년대에비하면얼마나풍요로워졌는가.
그러나그이상을바라기때문에어렵다고느낀다.
물질자체는허망한것이다.
아파트,자동차,냉장고가고급화되는것보다인간이고급화돼야한다.’
‘고급인간’이라,
이게무슨소린가.
저급인간에대한반대말이다.
저급이무엇인가.
등급(等級)의정도를나누는말로성질,내용,취미따위가낮거나천박한것을이르는
말이다.
우리가정직하게평가해보자.
지금우리주변엔고급인간이많은가저급인간이많은가.
고상한사람이많은가비열한사람이많은가.
그렇다면나는고급인간인가저급인간인가.

대답은서로다를것이다.
그러나지금의우리사회가혼탁한것만은사실이다.
그안에살고있는사람들이혼탁하기때문이다.
인간성을함양하는덕목과목(德目科目)들이커리큘럼에서사라진후교육된세대는,
‘고급’에접근할수있는통로자체가차단된세대다.
자고로사람과사람사이의관계는예의(禮儀)로규정된다.
동물의세계와다른점이그것이다.
모든사회질서와규범은거기에서비롯된다.
그러니예의를배우지못해모르는세대가질서와규범을알리가없다.
우리사회가그근본에서흔들리고있는것이바로그이유다.
장유유서(長幼有序-연장자와연소자사이에지켜야하는차례)는고리타분한골동품이
아니다.
그게파괴되면약육강식의폭력적사회가되는것이다.
결코고급한인간이사는고급한사회는아니다.
‘저는우리나라가탄탄대로를질주할만한때가됐다고생각합니다.
그런데늘발목을잡는게정신문화가약해서라고생각합니다.’
그약한정신문화란’마음이바로서지못한것’이라고했다.
온갖사회악이난무하는게그때문이라했다.
마음이바로서는게무엇인가.
그대답은정말심오했다.

-석가탄일은어떤의미가있읍니까.
-아주특별한날이지요.
부처님은누구나가지고있는불성(佛性)을발견하고깨달은분입니다.
그뿐아니라모든중생이참된삶,진리의삶을살게하려고오셨읍니다.’
부처는산스크리트어붓다의우리말음역이다.
그뜻은’깨달은자’.
석가모니는석가족이배출한성자라는의미다.
불성-佛性이무엇인가.
부처의본성-本性이며,
모든사람이본디지니고있는,부처가될수있는자비스러운성질이다.

불교의가르침을집대성하면,
대자대비-大慈大悲다.
크고넓어그지없는자비,
특히관세음보살이중생을사랑하고불쌍히여기는마음이다.
더크게해석하면모든이들의슬픔과기쁨을함께하는마음이다.
대웅전에높이모셔진금불상앞에엎드려두손을벌리고발복을기원하는불자들이
이크낙한가르침을깨닫고있을까.
모든불자들의최종목표는부처가되는것이다.
‘깨닫는자’가되는것이다.
절에이름석자올려놓고,일년에몇번다녀오는것으로가능한일일까.
선(禪)이라는어렵고힘든과정이있는것은그일이쉽지않다는증거다.
지금불교의큰근심은불교경전이쓰여진한문을제대로읽지못하는승려들이늘어
나고있다는점이다.
기독교성직자들의질(質)이떨어지고있는것과같은문제다.
불사(佛事)는점점커지고있는데불성(佛性)은그만큼멀어지고있는것은아닐까.

승려가고무신을신는것은’겸손’하기위해서다.
그러나그고무신위에비단옷을입는다면그겸손은위선이된다.
지금한국의종교계(宗敎界)가그렇다.
예수는암하레쯔(흙의사람들)들앞에섰었다.
그분이암하레쯔들과다른옷을입고있었다면아무도그를따르지않았을것이다.
오늘날교황의그화려한복식을보면예수와의연결고리가보이지않는다.
예수고상이장식된지팡이가황금이아닌것만도다행한일이다.
본질(本質)을그안에가지고있다는것,
그것을지켜나간다는것,
그건무여스님같은극소수의인간들만이가지고있는능력이다.
그래서그들이정신의지도자인것이다.
그들은고행을통해’깨달음’에다가섰기때문에그일이가능해진것이다.
우리가그런분들을소중하게생각하는소이도거기에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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