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예수.
나사렛예수에대한이야기가구전(口傳)으로만끝났다면2000여년이지난지금
예수는존재하지못했을것이다.
예수가지금도존재하는것은’기록’때문이다.
그기록이부분적으로불확실한구전에의한것이라해도그얘기가기록,보전,전승
되었기때문에예수는살아있는존재가되는것이다.
문제는,결국그구전과기록의진정성이다.
예수에대한가장직접적인기록은공관복음서들이다.
마태,마가,누가복음을공관(共觀)이라고부르는것은같은내용의병행구들때문이다.
말하자면그입장이조금씩다른’예수전’인것이다.
특히최초의복음서인마가는그내용의3분의2를마태와누가가차용하고있다.
요한복음을제4복음서라고부르는것은그책을기록한저자가자기의그리스철학의
사유체계로해석한예수를얘기하고있기때문에공관과는구별한다.
사실성에서도큰차이가난다.

그렇다면최초의복음서인마가는어디에서예수의얘기들을채집했을까.
일반적으로’Q자료’라고불리는예수의어록을사용했을것은거의틀림없다.
그러나그어록도누가언제,어디서,어떤의도로만든것인지는전혀알려진바가없다.
기록의주인공인예수의사후두세대가지나는동안그에대한수많은얘기들은첨삭
되기도하고과장되기도하고각색되기도했다.
그건피할수없는현실이었다.
벌써예수에게는사람들의자기식대로의해석이덧입혀지기시작한것이다.
그런면에서’도마복음’은독자적인의미를가진다.
저명한신약학자들의모임인’예수세미나’교수들이밝힌대로공관복음서안에서
예수가한말씀중20%정도만이진정성을가진다는것이다.
그렇다면그나머지는무엇을의미하는가.
구전과기록과정에서개인들의’예수해석’이그렇게첨가된것으로생각할수있다.
악의는없었다해도본래의예수를가리는중대한결과가그렇게만들어진것이다.

다음에따라나오는문제가필사본들이다.
모두가아는대로지금우리들은최고4세기경의필사본을기준으로할뿐그이전의
필사본과원본은하나도없다.
신약성경의경우거의4천여개의필사본과일부사본조각들이현존하고있으며
정밀하게살펴보면필사되는과정에서의도되지않은오류들이발생하고있다.
성경왜곡의역사는초대교회시대에이어필사본이제작되는전시기를통해계속
발생했다고볼수있다.
1460년’구텐베르그’의개량활자판인’카트리콘’성경이인쇄됨으로서필사본의시대는
끝났다.
지금우리들이가지고있는성경은수많은필사본을연구,총합해서만든학자들의
‘연구작품’들이다.
가장기준이될만하다고판단된연구작품을채택한것이다.
성경,특히공관복음서들의내용은절대적인것이지만글자에의한기록은아직도
상대적인한계를가지는것이그이유다.
나역시개인적으로세가지의서로다른헬라어원문성경을소장,비교하면서읽고있다.
학자마다그편집에서차이가나기때문이다.

형식은내용을담는그릇이다.
특히종교가더그렇다.
지금까지남아있는대부분의고대유적들이종교와관련된구조물들임을볼때더욱
그러하다.
기독교역시마찬가지다.
초기의,기십명이겨우앉을수있었던가정교회나동굴교회에서수천,수만을수용하는
예배당건물에이르기까지교회의역사는형식의역사이기도하다.
베드로를제1대교황이라고한다.
실제로그의유골은바티칸의성베드로성당중앙지하에위치하고있다.
그베도로는어떤옷을입고있었을까.
아마도그시대의평범한유대인이입었던보통의옷이었을것이다.
(고증에의한영화에서도그렇다.)
예수역시그랬을것은더말할것도없다.
지금카톨릭교회의신부,추기경,교황이입고있는복식들은당초기독교와어떤
관계가있는것인가.
사실,아무관계도없다.
기독교가공인된후황제의요청으로갑자기그를알현하게된로마주교가너무나초라한
복장을하고나타나궁정관리들을당황하게했다.
그런복장으로는황제에게나아갈수가없었던것이다.
그들은주교에게고위관리의궁정복장을입혀황제에게나아가도록했다.

그옷이발전의발전을거듭,온갖의미와상징으로뒤덮인교황의복장이된것이다.
그리고그복장은,
하나의’전통’으로서확고한자리를잡았다.
옷-복장은대표적인상징성을가진다.
예수와는전혀무관한교황의복장이기독교를상징하는대표적인형식의하나가된
것이다.
아무리형식이내용을담는다해도그건형식나름이다.
오래된찬미가나기도문은예수그리스도에대한신앙고백과관계되는것이기때문에
그전통적형식에서지금도같은의미를가진다.
그러나보이는교회가집례하는모든형식이반드시신앙적이라고하기는어렵다.
교황의그화려한옷은있어도없어도그만인형식이다.
그러나그형식이교회의상징이되어있다면그안의내용은기독교와는무관한것이다.
예수와는무관하다는말이다.
내용을덮는,내용과무관한형식이발전해가는것은신앙적으로는위험한일이기도하다.

지금유적으로남아있는옛교회당에는크고작은많은모자이크가있다.
모자이크로그려진그그림들은말할것도없이성경공부를위한것들이며이는당시거의
모든사람들이문맹이었기때문이다.
(지금의터키안티오카에는세계에서제일큰모자이크박물관이있다.
어떤것은벽면전체만큼큰것도있다.)
글을읽을수도없었고,글을안다해도그비싼가격때문에성경책들가진다는것은불가능
했다.
교리-敎理-dogma가발생한1차적인원인이거기에있다.
성경내용을단순화,규격화,표어화해서교인들에게가르치기시작했으며결국은그
교리의내용들이신학-神學으로발전,거대한학문체계를만들게됐다.
도그마-교리는성경내용의압축이라는긍정적인측면도있지만신앙내용을단순화,
도구화시킨부정적측면도있다.
성경의앞뒤가거두절미된’교리’로는예수에의전인적(全人的),인격적(人格的)접촉이
불가능하다.
이교리-도그마는나중에마녀사냥과종교재판을통해사람을불에태워죽이기까지하는
만행으로발전했다.
나사렛예수와는전혀연결할수없는이런참담한일들이형식이되어내용을훼손한것이
중세암흑시대를관통한교회의독선이었다.
교리는필요한것이지만그것만으로예수에게접근하는것은그래서위험하다.

복음서가기록되기시작했을때부터지금까지예수는수많은’수식어’로장식됐다.
이신격화(神格化)는신앙적으로는당연한것이라해도지나친수식은본래의것을
덮어버리는속성이있다.
불교사찰의대웅전에높이모셔진금불상은절대로싣달타가아닌것이그것이다.
부처는’깨달은자’라는산스크리트말이다.
싣달타는부처이지금불상은아니다.
수많은교인들이화가들이그린상상화를예수의얼굴로착각하고있는것도같은현상
이다.
예수는생전에그림으로그얼굴이그려진적이없는분이다.
예수라는이름앞에붙어있는수많은수식어는예수에게다가서는우리들에게는
장애물이될수도있다.
수식되는개념이그뒤에있는예수를볼수없게만들수도있기때문이다.
더나아가면수식어만남고예수는사라지는현상도생길수있다.

얼마전외출했다돌아와보니현관문에전단(찌라시)하나가붙어있었다.
접은화장지가들어있는비닐봉투였는데거기에는,
‘귀하를초대합니다.
행운을잡으세요,오디오,금반지…’라는글귀가인쇄돼있었다.
그밑을보니전단을붙인당사자는어떤개신교교회였다.
물론이런일은이번이처음은아니다.
기독교교회가오디오,금반지등의경품을걸고사람을모은다는것은스스로
‘장사꾼’임을드러내는지극히반기독교적인행태다.
그런파렴치한일들이지금은다반사가됐다.
교회-ekklesia-부르심을받은무리의공동체는’참,진리’로서사람들을구원하는
예수그리스도의몸이다.
이런황당한일이다반사가된것은’예수없는교회’가됐기때문이다.
기복과이벤트가중심이된지금의교회들은인간집단이지본래의교회는아니다.
그게미신화된한국기독교의다른모습이다.

지금은신앙적으로’예수를잃어버린시대’다.
본래의예수는사라지고오래동안사람들에의해구전되고,기록되고,수식되고,변질된,
인간이자기마음에맞도록만든,대체된예수의시대다.
2000년동안기독교에덮힌이끼는두껍고,견고하고아름답게보인다.
힘들어도그것을걷어내지않는한본래의나사렛예수는만나지못한다.
우리모두가그런신앙적위기의시대를살고있다.
특히우리의극단적인민족성은외래종교인기독교를한국적기독교로만드는일에
크게기여한바있다.
굿판같은심령대부흥회가그것이다.
이대로간다면예수는완전히실종될수밖에없다.
대체된,인간들이만든예수만남을것이다.

최근예루살렘부근에서도로공사를하던중1세기에사망한유대인의두개골여러개를
발견했다.
영국멘체스터대학연구팀은이중대표적으로유대인의형태를가진두개골을사용,
첨단법의학기법과컴푸터기술을이용,실제사람의얼굴로복원해냈다.
BBC는2001년3월에그복원된얼굴을방영한바있다.
그얼굴은,
지금까지우리가봐왔던금발에푸른눈을가진수려한모습의서양청년이아니라
둥근얼굴에뭉툭한코,짙은갈색피부와짧은고수머리의전형적인고대유대인농부의
얼굴이었다.
예수가농부였다는것은의심의여지가없는일이다.
당시농부들은석수요목수이기도했다.
이상한것은투박한그얼굴이가슴에와닿는친근감을가지고있다는점이다.
전혀수식되지않은,너무나평범해서그를체포하러간로마군인들이알아내지못한,
예수의얼굴이그러했을것이다.
나는지금도가끔그복원된얼굴의사진을꺼내놓고오래동안들여다보곤한다.
가능하다면original에다가서고싶기때문이다.
그분이나를사랑하고,내가그분을사랑하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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