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하나는율법적인공적주의(功積主義)이고,다른하나는순수하게자기의내면을
향한심연의세계다.
어느쪽이더신실한것인지는사람에따라그평가가다르겠지만주께서는이문제에
대해가장단호한가르침을주신바있다.
마태가기록한그의복음서에는,
6장5-8절에그가르침이상세하게보존돼있다.
그말씀의요지는,
‘회당과큰거리의어귀에서사람들에게보이려고기도하는자는외식하는자이다.
그는이미자기상을다받은사람이다.
진실로너희에게말하노니,
너희는네골방에들어가문을닫고은밀한중에모든것을아시고,모든것을보시는
아버지께기도하라.
그분이갚아주실것이다.
이방인들처럼말을많이하지도말라.’
자기상을이미받았다는것은사람들에게인정을받았으니하나님이더인정해주실것은
없다는뜻이다.
기도의대상이하나님이아니었기때문이다.
겉과그속이다른,겉을꾸미는자-외식하는자의악을그렇게풀이했다.
위의본문에는우리가깊이생각하고공부해야할중요한단어가두개있다.
그하나가’골방’이다.
우리말로골방은안방과같은큰방의뒤쪽에딸려있는작은방을의미한다.
지금과같은현대적구조의주택에는이미없는옛공간이기도하다.
골방-tameion은,
유대인들의농가에있는창고로서거의유일하게문을걸어잠글수있는장소다.
세상의모든것으로부터차단된,가장독립적인공간을의미한다.
말하자면사람들에게보여질수없는,기도하는자의’자기만의절대공간’이되는것이다.
문을닫다-잠근다는것은,그절대공간에대한이중의강조점이다.
하나님앞에드리는기도와기도시간이그무엇으로부터도방해받아서는안된다는
강조인것이다.
이’골방’에는,
자기와하나님밖에없다.
사람들이알아줄수있는통로는완전히차단된자기의기도공간인것이다.
이럴때,인간은정직해지고,진실해지고,간절해질수있다.
그게바로올바른기도의조건인것이다.
그게온전한신앙의자세인것이다.
여기에는사람들에게좋게보이려고자기를꾸며야하는’외식’이설자리가없다.
그래서문을닫은골방,그차단된장소는하나님이들어주시는기도를드리는공간이다.
이공간의신앙적개념은그의미에서의절대성에있다.
‘세상과차단된상태’라면모든곳이골방이될수있다.
다음이’은밀’이라는단어다.
은밀-隱密은생각이나행동이숨겨져서잘드러나지않는것이다.
본문의kruptou는숨기는,감추는,덮는다의뜻이다.
우리들도모르는사이에,
우리들이알아차리지도못하는사이에,
우리의모든것을살피시는분이하나님이시라는설명이다.
우리의신앙선배들은네개의한자로이를압축했다.
무소부재-無所不在,’안계신곳이없는분’이시라는뜻이다.
온전한신앙생활은내일상을그분앞에서사는삶이다.
‘일상에없는것은거짓’이라는말이그뜻이다.
인간이그분앞에서감출수있는것은아무것도없다.
자기가자기를속이지못하는게그증거다
주께서가르치신대로그신앙생활을영위한다면그사람은참크리스챤이다.
그러나그말씀과는무관하게,자기의인간적조건들을기준해서신앙생활을한다면
겉모양은교인이지만그속은이미자기상을다받은외식하는죄인이다.
회당과큰거리의어귀는,
자기의기도하는모습을보다많은사람들에게보여줄수있는공개된장소다.
따라서그기도는가증스러운것이된다.
하나님께드리는기도라는수단을통해사람들에게인정받으려는그생각자체가
이미반신앙적죄인것이다.
기도의대상이’인간’이기때문이다.
개신교의경우,
전세계에서가장큰개교회다섯개가모두서울에있다.
2천년기독교역사에서100년은아무것도아닌일천한기간이다.
그100년에몸집만키운게한국교회다.
커지고,화려해지고,더커지려고하는게한국교회다.
겉을화려하게꾸미고더커지려고하는것은사람들에게보여그’성공’을인정받기
위해서다.
그리고우리민족은크고화려한것을먼저택한다.
외화내빈의민족성이바로그것이다.
언제나내용은문제시하지않는다.
이제여기에기복(祈福)이라는주술(呪術)까지더해지고있으니미상불일은돌이킬수
없는길로들어서고있다.
이미충분히변질됐다.
더변질되면무엇이될까.
생각만해도두려울뿐이다.
5만교회를자랑하는한국의개신교가이혼란스러운세상에서티끌만한순기능도
못하고있는것은그것이진정한의미의’종교’가아니라이미죽은종교이기때문이다.
기미독립만세사건때,
‘독립선언서’에서명한민족대표33인중16명이목사와장로였다.
그때와지금의이차이는,
그때에는’골방’이있었고지금은그골방이없어졌기때문이다.
하나님을만날수있는절대적조건이없어졌는데그게어떻게기독교가될수있는가.
‘은밀’을영어성경에서는secret으로번역했다.
하나님이우리들에게비밀스러운존재라는것이아니라그분이우리를살피시는방법이
비밀스럽다는뜻이다.
주변에서지켜보는사람이없어도정직한사람은일상에서하나님이자기를살피고
계심을믿는사람이다.
우리는’보혜사-保惠師’라는신앙용어를쓰고있다.
이는성령(聖靈)의다른이름이다.
성부,성자,성령중,지금은성령의시대다.
하나님께서성령의역사로우리중에계시는시대다.
그분이보혜사다.
신앙인들의영적생활의근본적인힘이되는본체가그분이시다.
만약,지금의한국교회가이보혜사-성령의존재를확실하게믿는다면지금처럼오만
하고방자해질수는없다.
흡사하나님이존재하지않는것처럼모든것이인간위주가될수는없는것이다.
인생-人生은,
등산하는것으로비유할수있다.
산의밑자락과중간,그리고정상에서는그시야에서엄청난차이가난다.
말하자면나이든세대는정상에가까이간사람들이다.
그시야가넓을수밖에없고그높이에까지올라가는동안의온갖경험이축적돼있다.
이는,비교할수있는’기능’이있다는뜻이다.
얼마전나와가까운동창하나가이메일을보내왔다.
지금의우리사회는단군이래가장그수준이저하된,이땅에사람이살기시작한이래
최하의수준이라는것이다.
그건,그친구가과거와현재를비교할수있는안목이있기때문에내릴수있는결론이다.
나는그의견에전적으로동감했다.
정말지금의우리사회는모든분야에서더내려갈수없을만큼그수준이떨어져있다.
바닥에내려앉아있는상태다.
한사회의수준은곧사람의수준이다.
그일반적인수준은특정분야에대한것이아니고보편적인것이다.
정치,경제,사회,교육이3류가됐는데종교만1류일수있을까.
종교도마찬가지인것이며어떤면에서는그수준이더떨어져있다.
본래의’종교’가요구하는수준에미달하는인간들이종교지도자가됐을때어떤일이
일어날것인가.
회당과큰거리의어귀에서사람들에게인기,명예,부를얻으려는그외식에서참믿음은
나올수없다.
‘골방’을알지못하는시대,’골방’을거부하는시대,그게지금개신교의형편이다.
더두려운것은거짓도오래되면그게참이되는속성이다.
이미한국의개신교는그렇게돼가고있다.
결국은거짓으로드러나겠지만그동안은충분히어리석은인간들을현혹할수있다.
그건얼마나끔찍한일인가.
내가중학생이었을때,
우리가족은6.25전쟁중오래동안시골에피난가서살았다.
아무연고도없는시골의그집은우리를받아들였고보살펴줬다.
어느날이집에손님이왔고,논에서일하던집주인에게는내가뛰어가서이를알렸다.
그는급히집으로돌아와얼굴과손,발을씻은후안방에들어가평상시의옷으로
갈아입은후사랑방에나와손님을만났고,
그들은피차정중하게맞절을한후얘기를나눴다.
비록교육이많지않은농부들이었지만그들의만남에는예의-禮儀가분명했다.
예의가뭔가.
인간이다른인간을인격적으로대하는기본적인자세다.
그때는그게살아있었다.
비록물질적으로는어려운시기였지만사람들이마음편하게살수있었던것은
그’예의’때문이었다.
사람사는세상에’예의’만살아있어도다른문제는모두풀리게돼있다.
예의의기본은상대에대한인간적배려이기때문이다.
지금의우리에게는그게없다.
각박하고살벌한게그때문이다.
세상천지에’원시적인이기심’뿐,
사람들에게서’인격-人格’을찾아보기가어렵다.
그러니예의가없고,예의가없으니이렇게막사는,고달픈세상이된것이다.
그렇다면이렇게붕괴된인간관계-예의를복원할수있는기능은어디에있는가.
그게학교교육과종교다.
교회가교인들에게’상식’만제대로가르쳐도세상은많이달라질수있다.
그런데왜안가르치는가,
그걸가르쳐야할사람들이그사실을모르기때문이다.
깨달음이없는것이다.
바로그점이우리의비극이다.
이제교회는’골방’을찾아야하고,
그안에서은밀한중에계시는하나님을참기도로서만나야한다.
지금같은현란한모습으로는될수없는일이다.
검소하고조용한교회가되지못하면불가능한일이다.
여기에서조금만더떨어지면’나락-奈落’이다.
산스크리트어’naraka’는바로’지옥’이라는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