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구제는 나라도 못한다.
여러해전,
우리부부는대단히실험적이고도전적인여행을한일이있다.
프랑스빠리의제17구,빌리에의한프랑스인중산층가정에서한달간민박한일이
그것이다.
(이특이한여행의기록은블로그의여행이야기카테고리속에’빌리에체류기’로
모두기록돼있다.)
세계최고의문화도시빠리에대해그속성을체험하고싶은마음이컸기때문에가능한
일이기도했다.
런던에서발행된여행안내책자에서빠리의민박주선단체를찾아냈고,여기를통해
A클라스의민박집을소개받을수있었다.
체재비는생각보다비쌌지만한달간프랑스인가족들과한지붕밑에서먹고잔시간들은
일생을통해소중한체험이되었다.

우리가머물렀던바로크풍의방에는큰도로쪽으로커다란이중창문이있었다.
나는아침마다그창문을통해지극히개성적인옷차림의빠리쟝들의출근길을
구경했다.
창문바로앞에는인도에고정시켜놓은모양새가아름다운벤치가하나있었는데
그벤치에는아침이면거의매일거지하나가와서앉아있곤했다.
잠은어디서잤는지알수없었지만대개세개에서네개의보따리를가지고나타났다.
그프랑스인거지는(그는백인이었고외모도준수한중년남자였다.)벤치에앉아9월의
따뜻한아침햇볕을쬐고있었으며물과바게뜨로아침식사를했다.
그리고는’르몽드’를오래동안읽었다.
음식먹는태도,신문을읽는자세와눈빛에서그가고등교육을받은사람임을알수있었다.
벤치에서낮잠을잘때의자세도흐트러짐이없었다.
그런데그는거지였다.
분명프랑스는세계최고의문명국이고,경제적으로도선진,일류국가다.
특히정치적으로’사회민주주의-社會民主主義-이하’사민주의’를채택하고있는
복지국가가아닌가.
그런데내눈앞에는분명히빠리한복판에거지가벤치에앉아있는것이다.

베른슈타인(BernsteinEduard1850-1932)은,
19세기말카우츠키,로자룩셈부르그등과수정주의논쟁을전개한독일사민당의
대표적인이론가다.
그는마르크스의산업의집중,노동자의궁핍,경제공황,자본주의붕괴라는견해에
대해비판적이었다.
베른슈타인은자본주의의높은생산성과민주주의발달을긍정적으로평가하고
그것과의단절이아니라그것을비판적으로계승함으로서오히려사회주의를건설
할수있다고주장했다.
1919년제3인터내셔널,일명코민테른이창설되면서사민주의진영에는보다온건한
성향의사민주의자들만이남게됐다.
특히1945년2차세계대전이끝난후시작된냉전시대에사민주의는마르크스-레닌주의
와결별하고점차독자노선을걷기시작했다.
1951년의’프랑크푸르트선언’이바로그것이다.

2차대전이후,
영국,스웨덴,노르웨이,오스트랄리아,뉴지랜드에서는사민주의정당들이권력을
장악했으며서유럽거의모든나라에서사민주의정당들이연정에참여하거나강력한
야당이되었다.
그러나1932년이래40여년을집권한스웨덴에서조차평화적이고점진적인사회주의
로의이행은실현되지않았다.
산업의국유화에따르는엄청난비용과보잘것없는이윤때문에오히려풍요로운
평등을실현하는데방해가될수있다는결론에도달한것이다.

20세기후반,
사민주의의정치,경제적이정표가되어준것은’케인즈주의’였다.
케인즈의’일반이론’은사민주의자들에게절실했던정부관리적자본주의경제라는
이론적토대를제공해줬다.
케인즈의경제학은사민주의자들로하여금생산수단의국유화를포기하는대신
‘복지국가’라는좋은대안으로이끌어줬다.
결국사민주의는의회주의등의합법적,민주적수단으로평화적,점진적인사회주의의
실현을겨냥하는사회계량주의로서독일에서시작된베른슈타인의수정주의와영국의
페이비언주의가두개의큰조류를이룬다.
신자유주의공세에케인즈주의가붕괴된오늘날사민주의는’제3의길’을모색,변화
계승되고있다.
후란시스후쿠야마는’역사의종말’에서민주주의와자본주의체제의궁극적인승리를
얘기하고있지만그건너무나성급한결론일지도모른다.
사회주의의’이념’은실현될수없는현실임에도불구하고좌파에게는언제나매력적인
‘사유체계-思維體系"로남아있기때문이다.
한가지놀라운사실은한국의지식인중에는뜻밖에도사회주의와사회민주주의를구별
못하는사람들이많다는점이다.

貧富(빈부)는,
가난함과부유함이다.
貧은가난할빈자로나눌분-分자밑에조개패-貝자가있다.
조개껍질이옛화폐인것은다알고있는일이다.
돈은모여야부자가될수있는데그게나누어져,쪼개져있으니가난할수밖에없다.
富는부자부자다.움집면,즉지붕아래에곡식포대가쌓여있는모양새다.
옛날부자야곡식많은게그기준이아니었는가.
천석꾼,만석꾼이모두거기에서나온말이다.
사람사는세상에서빈,부는자연발생적인사회현상이지결코인위적인것은아니다.
특히지금과같은자본주의시장경제에서는더그렇다.
그건개인의기량과능력,그리고정당한노력들이경쟁을통해만들어낸결과이기도
하다.
때문에빈부의존재와그격차에대해이를사회의왜곡된현상인양호도하는것은
정직하지도,정당하지도않다.
빈부는지극히평범한사회현상이며일찌기빈부가없었던시대도없었고앞으로도
마찬가지다.

같은사회공동체에살면서빈부가발생하는가장큰이유는무엇일까.
사회제도나법체계,정치이데올로기까지’기회의균등’을외치고있는데왜빈부가
생기는것일까.
가장현실적이고분명한대답은인간의우,열때문이다.
세습되는조건과환경의차이는있지만,
그기량과능력,노력에서더뛰어난인간이있고게으르고나태한낙오자도있다.
탁월한경제적감각으로돈을잘버는사람이있는가하면하루벌고사흘노는지체된
인간도있다.
가난구제는나라도못한다는말이그래서생긴것이다.
얼굴모습이서로다르듯사람은모두가서로다르고그다름이삶의바탕과방법이
되어서로다른수준을만들어내는것이다.
때문에빈부자체는자연스러운현상이다.
빈부를없애겠다는어리석은사회주의이데올로기가참담하게붕괴된것이그걸증명
하고도남는다.

그러나,
우리가유의해야할것은,
가난은모두같은것이아니라는사실이다.
생각만해도끔찍한IMF사태,
그때가장이강제로조기퇴직된모든가정은하루아침에살길이막막한가난으로내
몰렸고극심한고통을겪었다.
그가장들은전문교육을받은사람들이었고직장에서자기가맡은일을감당할수있는
기량과능력이있는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닥친가난은결코인간이열등해서만난고난이아니었다.
그건’현대경제의환경’이만들어낸재난이었으며
‘썰물처럼빠져나간단기투기성외채’가바로그주범이다.
그러나인간이열등해서가난한경우도있다.
배운것이부족하고,전문성도갖추지못했으며여기에게으르고나태하기까지한
부류들이있다.
이들은기회가주어져도그걸활용하지않는다.
그기회가요구하는자기절제,정확성,생산성,효율을감당할자질도,자신도없기
때문이다.
그건어떤면에서태생적인약점이기까지하다.
여기에서우리는’소외와가난’을구별하고분별하는지혜를가져야한다.
‘없는자’는모두가같지않다는사실이그것이다.
그래서’소외된자들’이라는표현을남발해서는안된다.
한국의저널리즘이국민을오도한대표적인개념이바로이것이며특히’양극화’라는
자극적표현을무분별하게사용하는것은그수준이경멸받아마땅하다.

빈부의격차가사회적인문제가되지않도록하기위해서는재산의축적과정이투명하고
합법적이어야한다.
똑같이법을어기고규칙,규정을어겼을때의처벌도가혹하고엄격해야한다.
가지지못한자가가진자를향해가지는’근거있는반감’과’상대적박탈감’을줄여야
하기때문이다.
결과의평등은있을수없지만과정은합법적이고투명해야’승복’을기대할수있다.
우리속담에,
‘배고픈건참아도배아픈건참지못한다.’는말이있다.
정말인간심리의정곡을찌르는관찰이다.
배아픈사람이많아지면그사회공동체는위험해진다.
혁명이잉태되기때문이다.
그래서법체계가조밀해야하고그게누구든법망을빠져나갈수없게해야한다.
가진자에게도덕과윤리를요구하는것은종교의몫이지현실정치는아니다.
그들에게는엄격한규칙과그것을어겼을때의벌이무섭다는것을알게하면된다.

몇달을끌었던촛불시위.
그와중에서격열하게경찰관을공격하고,경찰장비를파손하고,언론사의기물을
파손한자들이경찰의채증자료로체포됐다.
무직,노숙자들인7명의전과가합계24범.
우리사회의’인간쓰레기들’인것이다.
그들이우리와,우리사회공동체안에서함께살고있다.그게현실이다.
그렇다면이런인간말자,쓰레기들을내다버릴것인가.
그럴수없는게문명이다.
그들도우리와똑같은’사람-인간’이기때문이다.
그게진정한의미의인권이다.
아무리형편없는인간이라해도그들을동물의수준으로가게할수는없다.
그래서도안된다.
우리의세금으로그런부류를돌보는,생활보호대상과는또다른,’사회복지’가그런
제도다.
그게빈부를극복하려는인간들의인도주의적노력인것이다.
‘사악한가난’은동정할필요가없다.
그러나인간은,결국끝까지우리와똑같은인간이다.
우리들이세금을내는이유도거기에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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