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와 용서.
罪는’허물죄’자(字)다.
허물이무엇인가.
잘못저지른실수나과실(過失)이다.
罪惡이란罪가惡이라는뜻을담고있다.
악은바르지못한것이며양심을좇지않고도덕율을어긴것이다.
죄에는크게두가지가있는데,
그하나가실정법(實定法)을어기는것이다.
실정법은입법기관에의해제정된현실적으로정립된법이다.
대표적인것이여섯가지의기본이되는법률로서헌법,형법,민법,상법,형사소송법,
민사소송법이그것이다.
실정법인성문법(成文法)을어기는죄는누구나알수있는구체적행위가따른다.
판결이증거를채택하는것이바로그객관성을위한것이다.
유죄가인정될경우죄인을교도소에수감하는것은보이는범죄에대한인신(人身)의
격리인것이다.
이런모든절차는보이는것에근거하는객관성을유지하고있다.

다른하나의죄는,
밖으로드러나지않는,그래서실정법을적용할수없는,적용하지못하는내부의악이다.
먼저문갑식기자의아름다운글을함께읽어보자.
‘광화문의햇살이유독밝고,공기또한청량한10월입니다.
정동(貞洞)뒷길은제가무척좋아하는가을색으로변하고있읍니다.
회사에서바라보이는북악산과인왕산도총천연색으로변하기직전입니다.
이렇게멋진거리에독기(毒氣)를감췄을지도모르는사람들이아무렇지도않은표정
으로걸어다닌다는게믿어지지않습니다.
세상은이렇게아름다운데우리의그아름다운심성은다어디로갔을까요.’
독기(毒氣)는사납고모진기운이나기색이다.
드러나기전까지는알수가없다.
아무리치밀하고정교하게만든법이라해도이독기는처벌할수없다.
그게사람의마음속에자리잡고있기때문이다.
그독기-악-죄를정죄(定罪)하는게종교다.
그래서진정한종교인은실정법을어긴것이아니라해도자기마음속에있는악-독기
를죄라고인정한다.
동물적조건을가진인간이인격적존재가될수있는근거가그래서고등종교다.
예를들어크리스챤들이자기를’용서받은죄인’이라고부르는게그것이다.

성경에서말하는죄는,
그원어가hamartia,
본래뜻은시위를떠난화살이과녁을벗어나빗나갔다는것이다.
과녁에꽂혀야할화살이다른곳으로가버린것이다.
파생어harmatesis는의(義-올바름)의길에서벗어난모든행위를뜻한다.
성경이말하는죄가실정법으로다스릴수없는인간내부의문제임을알게해주는
신앙적,신학적용어들이다.
어떤사람이다른사람을미워하고,죽이고싶어한다해도실정법으로이를처벌할수는
없다.
그러나신앙의세계에서그건이웃에대한끔찍한범죄-악이된다.
인류에게고등종교가필요한것은보이지않는죄와악에대한통제없이는사회공동체를
영위할수가없기때문이다.
마음속의독기를순화시키지못하면약육강식의동물적환경이될수밖에없다.

마태복음18장21-35절은,
마태에만있는독특한기사다.
더발전된내용이누가6:36절에있다.
죄와용서에대한큰가르침이손에잡힐듯한비유로설명되고있다.
유대인들의일반적인관습은,
형제의허물에대해,죄에대해세번만용서해도관대한처분으로평가된다.
그러데베드로는,
일곱번이라는대단히확대된조건으로주님께질문했다.
그런데그질문에대한주님의대답은,
상식과관습을크게벗어나는것이었다.
‘일곱번뿐아니라일곱번씩일흔번이라도용서하라.’
이를490번으로해석하면율법주의자가되는것이고무한한용서로깨달으면은혜의
자리에든사람이다.

이어서주께서말씀하신비유는정말많은의미가함축되어있다.
어떤왕에게일만달란트빚진신하가있었다.
이게얼마나큰돈일까.
그때노동자의하루품삯이한데나리온이었다.
일만달란트는일억데나리온이다.
유대인역사가요세푸스의기록을보면,
주전4세기갈릴리와베레아지역의연간세수(年間稅收)가200달란트였다.
한편,주전47년줄리어스시저에의해유대행정관으로임명된헤롯은그후
이방인으로서유대인의왕이되었다.
그가유대땅을지배하면서로마정부로부터받은연봉이800달란트였다.
달란트는금화로서그때지중해연안에서통용되던화폐중가장단위가높았다.
일만달란트는,
그때로서는최고의숫자였다.
빚은죄를의미하며일만달란트는인간이갚을수없는,인간이해결할수없는죄를
상징한다.
빚을갚지못하면가족전부가’노예’가되는게당시의관행이다.

땅에엎드려애걸하는신하를불쌍히여긴왕은그큰빚을탕감해준다.
인간이하나님으로부터그죄를용서받는모습이다.
그런데이사악한신하는밖으로나온후자기에게백데나리온빚진자를만나자그의
애걸도들어주지않고그동료를감옥에가두었다.
큰용서를받은자가가장작은자비-용서도베풀지않는악이고발되는장면이다.
이얘기를전해들은왕은크게노하여일만달란트를다갚을때까지그를감옥에
가두었다.
‘너희가진심으로형제들을서로용서하지않으면하늘에계신내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이와같이하실것이다.’
같은맥락에서,
누가6:36절엔더절실한말씀이있다.
‘그러니너희의아버지께서자비로우신것같이너희도자비로운사람이되어라.’
용서받은자라면,용서하라는말씀이다.
자기가용서받은사실을깨달아아는자는용서할수있다는말씀이다.
독기를품고있는것은아직용서받지못했기때문이다.

용서(容恕)는,
죄나잘못에대해꾸짖거나벌하지않는것이다.
그러나본문의용서는더깊은뜻을가지고있다.
우선탕감(蕩減)의의미가더크다.
afesis는빚으로부터해방한다는뜻이다.
인간을붙잡고있는죄의원인을제거하는것이다.
이때중요한것이그해방의댓가인손해를용서하는자스스로감당하는것이다.
그게성경이요구하는용서다.
그용서를일흔번씩일곱번이라고하라는말씀은,
인간은인간을정죄(定罪)할수없다는깊은의미가있다.
기독교신앙에서인간을죄있다고인정하시는분은하나님한분뿐이시다.
피조물이피조물을정죄할수없다는신학이그안에있다.
크리스챤이그형제를용서하는가장큰이유는어떤인간도하나님의자리에설수
없기때문이다.
죄에대해그책임을물으시는분은하나님이시며용서-탕감하시는분도그분이시다.

다른하나는,
그신앙고백이성경에근거하는건전한크리스챤이라면,
자기가하나님으로부터용서받았음으로’구원된인간’임을자각하고있다.
일만달란트-근본악,죄를용서받은죄인이백데나리온의빚진자를탕감해야하는것이
아버지의’자비’다.
그아버지의자비하심을본받아실천하는것이크리스챤의삶이다.
때문에’용서’할수없다면크리스챤이아니다.
그용서안에는,
독기-毒氣-악,죄를반드시단죄(斷罪)하시는하나님을믿는믿음이있다.
정의의힘을믿는신앙이있는것이다.
악은내가정죄하지않아도단죄되는것이다.
따라서인간이가지는’용서’의근거는하나님의자비하심과그분의처벌이함께있는
이중성을가지게된다.
그누가하나님의불꽃같은눈길을피할수있겠는가.

지금의우리사회는참으로각박하다.
각박(刻薄)은모나고인정이없다는뜻이다.
모두가그속에毒氣를품고사는것이다.
송곳끝에풍선처럼부딪치기만하면터지고,서로가깨지고상처입는다.
그어디에도관용(寬容-toleration)이없다.
너그럽게생각하고,받아들이고,용서하는분위기가없는마른막대기같은사회다.
만인이만인을향해쟁투하는사회다.
그래서서로가무섭고,또피곤하게산다.
모든시대에서고등종교의순기능은순화(純化)에있다.
불순물을걸러내고순수하게하는기능이그것이다.
‘아무에게도악을악으로갚지말고모든사람앞에서선한일을도모하라.’
로마서12:17개역.
독기를독기로대하면악순환의연속이된다.
그러나그독기를관용과용서로대하면순화될수밖에없다.
기복화(祈福化)로변질된종교는미신적인이기심만남게되어’용서’의기능을상실
하게된다.
딴것이됐기때문이다.

악의진행을멈추게하는것은그악이내게왔을때내가악을감당하여소멸케하는것이다.
악을멈추게하는것이다.
그게기독교의용서가가지는놀라운힘이다.
일만달란트를탕감받은사실에대해이를감사하고인정하는신앙만이백데나리온
빚진자를탕감할수있다.
진정교회가먼저가르쳐야할핵심이바로그것이다.
한국의개신교가순기능을회복하는첩경도그것이다.
크리스챤의일상이너그러워지면사회도그만큼부두러워질수밖에없다.
지금우리사회에는그숭고한기능이절실히요구되고있다.
교회앞에주신’놀라운기회’가아닌가.
사위가어두울수록아주작은불빛이라도크게보이는법이다.
지금이바로그런때가아닌가.
이런기회를놓치면안된다.
특히교회지도자들이이점을깊이깨달아알고있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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