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어렸을때아버지와함께배를타고한강에서견지낚시를했는데점심식사를
하면서한강물을그대로떠마셨다고했다.
정말그때는그랬다.
웬만한개울물은언제나그대로떠마실수있었다.
‘돈을물쓰듯한다’는말도그래서생겼을것이다.
흔한게물이었으니까.
지금은한강물은고사하고수도물도마음놓고마시지못한다.
산천(山川)이크게오염됐기때문이다.
이미6.25전쟁당시한국에주둔한미군들이일본에서물을실어다마신것은잘알려진
얘기이기도하다.
지금우리들은상당한물값을쓰면서살고있다.
페트병은말할것도없고정수기를구입해야하고휠터교체를위해많은돈을지불해야
한다.
이제는흔해진해외여행의경우도그게어디든물은사서마셔야안전한세상이됐다.
지금은바다에서심층수를끌어올려마시기시작했지만사실지구전체에존재하고
있는물가운데서인간이식수로쓰는물은0.009%에지나지않는다.
97%가바다의짠물이며2%는얼음과눈이다.
앞으로의’물전쟁’을경고하는소리가여기저기에서들려온다.
가장큰문제는식수로쓰는담수가아니라공업용수와농업용수다.
모든제품생산은엄청난물을써야하는공장에서만들며물없이농사는불가능하다.
담수의고갈과오염은그래서위협적인사실이된다.
이스라엘이회교국가인터키와우호적인관계를유지하기위해노력하는것도
갈릴리호수로흘러드는수자원(水資原)때문이다.
아직은흔하게물을쓰고있지만우리도물걱정을할때가이미시작되었다고보는게
옳을것이다.
고고한(考古學)처럼재미있는학문도드물것이다.
유명유적지발국작업에서구름처럼모여드는무보수자원봉사자들을보면알수있는
일이다.
한번빠지면헤어나기어려운중독성이있기때문이다.
일단어떤물체가감지되면붓으로그많은흙을닦아내는힘든작업도마다하지않고
매달린다.
로마의유명한분수애천(愛泉).
그곳에세워진여러가지조각과인물등구조물을닦아내는공사가있었다.
여러해가소요된이공사는면봉으로구조물의오래된때를닦아내는어렵고지루한
작업이었다.
그런데공사현장에다가가서자세히살펴보니그일을하고있는사람들은모두가젊은
여자들이었다.
섬세하고꼼꼼한여자들이손길이아니면안되었을것이다.
그러나그작업은모두가보수를받고하는일이었다.
고고학발굴은그보다몇배어려운작업을하게된다.
그런데도그일에몰두하는것을보면인간이위대하다는생각을안할수가없다.
이제어떤발굴현장에서아주오래된’활’을발견했다고하자.
활틀의소재도중요하지만,
고고학적으로는더중요한것이활에매서썼던’줄’이다.
만약그줄이식물성섬유를꽈서만든것이면그활은농업을위주로했던부족들이
썼던것이고,
그줄이동물의힘줄로된것이라면그건사냥을위주로했던수렵부족의것이된다.
1922년영국의고고학자카터등에의해이집트룩소의나일강건너편계곡에서
여러왕들의무덤이있는’왕가의계곡’이발견,발굴됐다.
그중가장유명한것이전혀도굴되지않은어린왕’투탕카멘’의무덤이었다.
나는,지금은출입이금지된그왕의무덤속에직접들어가본일이있다.
화려하고두꺼운금관(金棺)은모조품이었지만아름답고놀라운벽화는그대로였다.
그때,비로서발굴작업에매달리는사람들의심정을조금은이해할수있었다.
세계에서가장큰’카이로박물관’특별실에전시되고있는투탕카멘의유명한
‘황금마스크’를볼때마다처음그것을발굴했을때고고학자들이얼마나흥분했을
것인가를가늠해볼수있었다.
박물관냉장전시실에보관,일반에게공개하고있는’라암세스2세’의미이라도
마찬가지다.
1999년,
NASA는1.300억원의거대한예산으로’화성탐사프로젝트’를진행하고있었다.
그러나이야심찬계획은너무나도사소한실수로실행도하기전에끝나고말았다.
이탐사프로젝트는너무나크고,섬세한작업이어서여러개의전문팀이일을
분담해서진행했었다.
그중한팀은기본적인계산들을담당하는외부의위탁계약팀이었다.
그런데이전문가들은부하량(負荷量)을계산할때미터법이아닌야드,파운드를
기준해서사용했다.
그들이복잡한계산이끝난’데이터’를항법팀에넘겼고,항법팀은전혀어떤의심도
없이넘겨받은데이터가미터법이라고이해했던것이다.
그건,미터법이NASA의기준이었기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항법팀은로켓발사를위한부하의수치를네배이상으로설정,프로젝트
자체를망친것이다.
도량형(度量衡)의통일은그렇게중요하다.
도량형은길이,부피,무게,자(尺),되,저울을이르는말이다.
도량형은문화의산물이기때문에예로부터지금까지시대와지역에따라서로달랐고,
심지어는한지역안에서도그것을통일하는것은아주어려운일이었다.
대표적인것이미터와마일,킬로그램과파운드같은서로다른기준이다.
여기에자(尺),인치,큐빗과같은세부적인기준들까지대비해보면그것이얼마나
복잡한것인지알수있다.
도량형의대표적인미터법(meter法)은,
18세기말,프랑스의탈레랑의제안에따라파리의과학자들이지구자오선길이의
4000만분의1을1미터로정했고1875년미터조약이체결되어세계대다수나라에서
이를채용했으며우리나라는1963년부터이를시행해오고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2200여년전인기원전210년대에넓고넓은중원(中原-중국)에
이복잡한도량형을통일한인물이있다.
기원전221년6개나라로갈라져있던중원을통일한진(秦)나라의시황제(始皇帝)가
바로그사람이다.
보통우리가’진시황’이라고부르는인물이다.
그는도량형만통일한것이아니라문자(文字)를통일했으며표준화폐도제정했다.
이스케일이큰인물은그넓은땅의도로망을정비했으며만리장성도증축했다.
지금시안(西安)에서발굴되고있는병마용(兵馬俑)의엄청난규모를보면벌어진
입이다물어지지않는다.
나는그병마용을천천히걸으면서그가정말대단한인물이라는생각을하지않을수
없었다.어떤면에선무모하기까지했다.
그러나불로초(不老草)을얻기위해선남선녀를우리나라에까지보냈던그도쉰도
채우지못하고마흔아홉에죽었다.
그날아침’왕룽’은,
부엌에서귀한물로온몸을깨끗하게닦았다.
장가가는날이었기때문이다.
펄벅의’대지(大地-GoodEarth)’첫부분을나는지금도기억하고있다.
그대하소설을번역한분이장왕록교수다.
그분은펄벅의모든작품을번역하기도했다.
번역을제2의창작이라고한다면장왕록교수이번역은지금읽어도감탄할수준이다.
슬하에여러자녀가있었지만어린딸’장영희’는어릴때앓은소아마비로두다리가
불편했다.
고졸후,장애인이라는이유때문에계속신체검사에서불합격,대학진학의길이막혔다.
장왕록교수는이영민한딸을위해여러대학의문을두르렸지만결과는마찬가지,
시험볼기회도주지않았다.
그는마지막으로서강대학교의영문과교수인’브루닉’신부를찾아갔다.
그간의어려웠던여러가지사정을소상히설명한후시험볼수있는기회라도달라고
부탁했다.
오랜시간긴사연을말없이듣고있던신부는,
‘무슨그런이상한질문이있읍니까.
시험은머리로보지다리로봅니까.’
지금쉰여섯의장영희는서강대학교영문학교수로재직중이다.
내가현역이었을때,
특히’사회학’에대해관심이컸고,꼭공부해보고싶었다.
대학에근무하고있는친지를통해서울대와연세대에청강생등록을시도했지만모두
거절당했다.
등록금도전액납부하고,학위를달라는것도아니고,단지사회학몇과목을’청강’
하겠다는데도안된다는것이다.
그때내가느꼈던높은벽은유대인들의게토보다더견고했다.
우리가학문적으로발전할수없는’협소함’을봤기때문이다.
그후죠지아주아틀란타에있는ColumbiaTheologicalSeminary와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병설MartinBuberInstitute에서연수받으면서느낀점은,
그들의놀라운’개방성’이었다.
기본적인요건만갖추면공부하겠다는사람을막아서는장애는아무데도없었다.
그들이선진국이되어발전하는힘은그개방성에있다는사실을깨달았다.
한국의대학들은아직도철옹성처럼폐쇄적이다.
대학뿐아니라우리사회는구조적으로폐쇄적인곳이많다.
칸을막아놓고소통하지못하면자멸하는게지금의정보화사회다.
세계주요도시에는반드시차이나타운과유대인들이살고있다.
서울에는그두가지모두가없다.
배타적이된다는것은스스로판깊은우물에빠지는것과같은것이다.
이제는우리도세계를향해마음의문을열때가되지않았을까.
더늦으면실기(失機)가될수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