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內面) 의 소리.
한인간이자기의생각을정리하고,
그것을’이념화-理念化’해서’자기주장’으로굳히는일은결코쉽지않다.
또아무나할수도없는일이다.
이념은,
모든경험에통제를부여하는,순수이성에서얻어지는최고의개념으로서,
플라톤에서는도덕적가치로서의최고선(最高善)을,
칸트에서는경험을통일하는순수이성이그것이다.
상식적인측면에서는.
한인간이무엇을최고의것으로인정하는가하는,
근본이되는생각이라고말할수있다.
따라서이데올로기-Idelolgie는그뿌리가인간이가지는자기이념에있다.
이데올로기는사회집단의사상,행동,생활방법을그근본에서제약하고있는관념
이며역사적이고사회적인입장을반영하는의식체계이기도하다.
대표적인것이우파와좌파의대립적개념이며’사회주의이념-이데올로기’가
붕괴된것은현실성의결정적결여때문이었다.
그결여의핵심은말할것도없이’사유재산권’을인정하지않은점이다.

한번주어진인생을살면서,
자기의생각,이념,주장에따라개성적으로사는사람과자기것이없이여러가지
쏠림현상에따라흘러다니는부평초와같은사람도있다.
‘생각’을체계화하는학자에서부터땅이정직과성실을요구한다는사실을깨달아
알고있는농부에이르기까지’장기정립-自己定立’이분명한사람들이있는가하면
시류(時流)에떼밀려정처없이흘러다니는인간군상이오히려대부분이다.
사실,선,후진국의구분을경제에더비중을두는시대이긴하지만좀더깊이생각해
보면’자기’를아는사람이더많은쪽이문화적으로선진국이다.
‘개성적-個性的’인삶과,
‘개인주의-個人主義’의구분이그래서필수적이다.
개성적인사람은그것이모두에게이익이된다는사실을깨달아알기때문에
법과질서를지키지만,
개인주의는오로지자기의이익만챙기기때문에모두의약속인법과질서를지키지
않는다.
자기삶에대한철학적성찰과’이념’이없기때문이다.

한인간이자기를정립(定立)하는작업은결코쉬운것은아니지만불가능한것도
아니다.
자기발견의대표적인방법의하나가선(禪)이다.
본래선은불교의삼문(三門:열반에들어가는세문,즉空門,無相門,無作門)의하나로
마음을가다듬고정신을통일하여무아정적(無我靜寂)의경지에몰입하는것이다.
선종(禪宗),또는좌선(坐禪)의준말이기도하다.
근자템풀스테이(templestay)가크게유행하는것도현대인들이무엇을추구하고
있는가를잘보여주고있는현상이다.
선(禪)의첫번째조건이무엇인가.
‘조용히혼자있는것’이다.
동안거결제법문차길상사에내려온법정(法頂)은이런말을했다.
‘혼자있게되면내면의소리를들을수있다.’
인간의자기정립은먼저자기의’내면의소리’를듣는것이다.
그래야비로서자기를알고,자기의생각을정리할수있고,이념과자기주장을확실
하게가질수있다.
보통사람의경우그것은’일상’안에서’가치관’으로나타난다.
선을긋는일에분명한사람이되는것이다.

지금우리들은내의사와는관계없이’정보의바다’에서살고있다.
매일매일정보의홍수속에서생활하고있다.
‘르네상스’와’산업혁명’이사람이사는방법과의미를바꾸었듯이’인터넷’은
가히혁명적으로우리의삶을바꾸고있다.
인터넷이전의정보는특정개인이나계층의전유물이었다.
특히고급정보가그랬다.
정보의독점은권력을강화했으며지금의북한이대표적인케이스다.
그러나,인터넷에공개된모든정보는1차적인것이며익지않은날것이다.
그중상당수는’스펨’이라고부르는쓰레기수준이다.
정보의바다,정보의홍수속에서그정보를선별하고정제(精製)하여내게유용한것이
되게하기위해서는날것을익혀먹을수있는’실력’이있어야한다.
그게바로’가치관’이다.
자기정립이분명한인간만이가질수있는’자기기준’인것이다.

인간은내면의소리를들을수있는정신적-영적존재다.
자기성찰(自己省察)의기능이그것이다.
자기속에서,자기에게하는그내면의소리를듣기위해서는그것을들을수있는조건과
환경을만들어야한다.
선(禪)이라는방법이나타난게바로그런이유다.
종교는달라도그신자들은’기도’할때눈을감는다.
기도에’집중’하기위해서다.
본다는것,무엇이보인다는것은집중을훼방하는대상들이다.
지금의현란한상업주의와천박한문화는사람들로하여금눈을감지못하게한다.
원색적으로말초신경을자극하는온갖광고는말할것도없고,어느곳으로눈을돌려도
‘공백-여백’이없는타락한벽만이우리로하여금눈을감지못하게한다.
눈을감는행위는’사바세계’에대한차단이다.
다른차원으로가는첫단계인것이다.
그게누구든,
눈을감을수있다면다음단계로갈수있다.

다음이오갖’소음’이다.
소음은인간의정신을혼미하게하고가장중요한’창의력’을마비시킨다.
인간의귀가지구가자전하는소리를들을수있다면미쳐버린다고한다.
그엄청난소리를듣지않고살수있는것은그래서놀라운섭리다.
인간이살았던본향은’조용한곳’이었다.
그래서지금도아무리많은사람들이모여살아도’조용한것’이원칙이다.
지금우리들이듣고있는소음은너무나여러가지여서그종류를알수도없다.
장말잠들기전에는어느한순간도조용할때가없다.
그리고더무서운것은,
계속해서소음에노출된생활이중독성습관이되어’조용한것’을잊어가고있는
현상이다.
조용하지않으면내면의소리는들을수가없다.
禪의일차적인요구가’정적-절대적조용함’이다.
사찰이나수도원이어디에위치하고있는가를살펴보면답은절로나온다.
‘소리-소음’으로부터멀리떨어져있다.
그것이일차적이고절대적인조건이기때문이다.

대한민국은조용하면’불안’해한다.
그게어느곳이건사람들은시청도하지않으면서텔레비젼을켜놓는다.
무슨소리든,소리가들려야안정할수있기때문이다.
사실,모두가중환자들이다.
조용한것을견디지못하는’좌불안석’은그자체가중독성이강한마취제인것이다.
약기운이떨어지면금단현상이나타나는중독자들이다.
수준미달의텔리비젼프로그램들이인간의인간성을파괴한악은용서받지못할것이다.
그프로그램들을선별하지못하는가장큰이유는’자기것-자기기준’이없기때문이다.
텔레비젼이일방적으로보여주는모든것에종속되는이유도마찬가지다.
정말내면의소리를듣기원한다면무엇보다먼저그바보상자의주인이되어야한다.
‘텔리비젼을끄니생활이달라진다’는말이그뜻이다.
자기것-자기주장-가치관이분명한사람이라면그어떤것에도그렇게함몰되지는않는다.
왜냐하면자기의의지로’선별,선택’할수있기때문이다.

‘내면의소리’를듣기위해서는,
혼자있을수있어야한다.
‘혼자일때강한사람이가장강한사람이다.’
혼자가아니고는’자기’와대면할수없다.
자기와대면하지않고어떻게자기속의소리를들을수있겠는가.
인간은,
혼자있으면정직해진다.
속여야할대상이없기때문이다.
위선이없어지니진실만남는다.
가장적라라한,본래모습의자기를볼수있다.
혼자일때,비로서인간은탈을벗고화장을지운다.
그래서본래의모습이나타나고가장진솔한얘기를할수있다.
보이는것이없고,들리는것이차단된다면그게누구든’자기’와만날수있다.
혼자있는시간을만들어야한다.
혼자일때비로서주변의의미들이보이기시작한다.
그다른차원에접근해봐야여러가지’차이’를인정하고깨닫는수준에갈수있다.
그게’인간적성숙’이다.

세계적으로잘알려져있는국악인인황병기교수는,
작품하나를작곡하는데2년이소요된다고했다.
그는그것을’숙성시킨다’고표현한다.
숙성이무엇인가.
익히는것이다.
날것을익히는데2년이걸린다는얘기다.
2년동안’생각’하는것이다.
2년동안’사색’하는것이다.
지금우리가살고있는세상은주변의모든것들이’사색’을방해하는것들로가득차있다.
모든’영상매체’가대표적이다.
그것은찰라적이고자극적이고선동적이고즉흥적이다.
인간의가장고상하고고유한기능인사고력-思考力을앗아가고있다.
‘생각-사색’하지않는인간을’인격적존재’라고할수있을까.
지금의우리사회가경박하고천박하고살벌한것이’생각-사색’이없기때문이다.
깊이가없으니’접시문화’가될수밖에없다.
이렇게되면서로가살기어려워진다.
사회자체가발전-성숙해질수가없다.

나는누구인가.
나는무엇을할수있으며지금무엇을하고있는가.
나는어디로가고있는가.
그끝에는무엇이있는가.
쉽게말해이게철학-哲學이다.
이보다더근본적인질문들은없다.
왜냐하면’나’가존재하지않는세상은아무의미도없기때문이다.
그래서,인간은’자기철학’이있어야한다.
그질문에대한대답이’내면의소리’다.
나만이들을수있는대답,
그대답을들을수있어야’인격적존재’다.
현실에서,일상에서’나’를규정해주는게그대답이기때문이다.
등뜨시고배부른것에만족하는인간은죽을때까지’내면의소리’를듣지못한다.
‘귀’가없기때문이다.
일년365일을바쁘게사는게전부는아니다.
때론,잰걸음을멈추고혼자가되어눈을감고귀를막고,그리고깊은곳으로부터
들려오는소리에귀를기울여야한다.
‘의미있는삶’은그렇게얻어지는것이다.
또한해가지나가기전에’자기’를만나는시간을가져야하지않겠는가.
항상남들을따라살수만은없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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