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자들.
위선(僞善)은,
겉으로만착한체하거나겉치레로보이는선행을이르는말이다.
겉과그속이다른거짓인것이다.
예로부터지금까지,특히종교안에이런위선이많았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글로벌리서치에의뢰해지난11월성인1천명에게전화로여론조사를한바있다.
한국교회-개신교의신뢰도에대한이조사에서
신뢰하지않는다가48.3%로가장높았고,
보통이라고대답한것이33.3%,
신뢰한다고대답한사람은18.4%에그쳤다.
그리고교회가신뢰를받기위해개선해야할대상은,
교회지도자들(25.5%),교회의운영(24.4%),그리고교인(17.2%)등을들었다.
호감을가지고있는종교로는,
불교가31.5%,카톨릭29.8%,개신교가20.6%였다.

한편4년전인2004년,
한국갤럽의종교실태조사에서는신자들의만족도가가장높은게개신교였다.
‘종교가정신적문제에만족스러운답을준다.’는대답에서,
개신교59.2%,카톨릭44.8%,불교38.1%의순서였으며
‘종교인들의역할에만족한다.’는대답은
개신교76.1%,카톨릭67.4%,불교58.0%엿다.
신앙심이깊다고응답한신자의비율도
개신교50.5%,카톨릭26.8%,불교19.6%의순서였다.
불과4년사이의역전은개신교의변질이생각보다심각하다는뜻이다.

신뢰(信賴)는,’믿고의지한다’는뜻이다.
따라서그종교가’신뢰’에서멀저졌다면형식은있되내용은없는,죽은종교가
됐다는얘기다.
사람들이믿고의지하지않는다면이미종교라고할수없기때문이다.
18.4%의신뢰도는개신교의실패를보여주는분명한수치(數値)다.
통계가절대적인것은아니지만그함축하는의미는간단한것이아니다.
개신교의’현실’에대한비판적인기준이되기때문이다.
엄격히말해’종교-宗敎’자체는변질되지않는다.
예를들어기독교의경전인성경은영원불변의절대적진리를그안에담고있다.
종교를변질시키는것은언제나세상안에서그종교를운용하는사람들이다.

여론조사에서,
우선개선대상으로거론된’종교지도자’들이바로그들이다.
그들이교회운용을잘못한것이다.
교파에따라그내용은조금씩다르지만,
개신교의종교지도자들은목사와장로다.
특히장로교의경우,강단에서강론-설교하는장로를목사라부르고,
치리(治理)하는직분을장로라고부른다.
같은장로(長老)이면서그역할이다를뿐이다.
그래서그들이바로교회의지도자인것이다.

개신교의변질은국가의’경제성장’과맞물려양적(量的)으로팽창하면서
시작됐다고보면거의틀림없다.
대표적인구호가’총동원주일’이었고,사람들을실어나르는버스가등장하고
‘목회성공’이크게유행하면서수단과방법을가리지않고몸집불리기에열중
했었다.
그건흡사시장바닥같은현상이었다.
언제나양(量)은질(質)을희석시킨다.
성장-팽창에몰두하는동안질적인퇴행이뒤따르는것은자연스러운현상이고모든
일이늘그랬다.
본래종교는양적인것이아니라질을추구하는목표를가지고있기때문이다.

개신교의경우세계에서가장큰개교회다섯개가모두서울에있다.
세계개신교역사에없던일이다.
한국의개신교,그지도자들이양적성장-팽창에어느정도몰두해있었는지를보여주는
살아있는증거들이다.
매주은행원이파견되어헌금을정리해야하는교회가정말기독교일수있을까.
개신교의대표적인폐해는’성장-팽창’은했지만’성숙’은없었던점이다.
몸집은어른이되었지만그정신은자라지못하고애들수준그대로다.

마태복음23장에는,
유대교의지도자들을’위선자’로질타하는예수의말씀으로가득차있다.
이제1-13절을텍스트로그내용을정리해보면지금의한국개신교가안고있는문제와
해답이그안에있음을알수있다.
우선비판의대상이었던’바리새’부터알아보자.
그뜻은’분리된자들,구별된자들’이다.
사두개,에세네와함께3대유대분파중하나다.
특히사두개파와대립하는세력으로모세의율법과조상의유전을중시했으며
부활,천사,영(靈)의존재를인정한다.
헬라문화에대해서는이를거부했으며,
다른부류의같은유대인들을멸시했다.
자기들만이성경의유일한해석자라고믿었으며의(義)는율법의엄격한실행에
있다고주장했다.
따라서귄위주의,형식주의,율법주의에빠졌다.
율법사는율법에능통한사람이며,
서기관은법으로결정된사항을공포할때율법사의기능을맡음으로서율법사와
서기관이동격으로나타나기도한다.
구역에서는’서기관과바리새인’으로,
공동번역에서는’율법학자와바라사이파사람들’로묘사되고있다.

바리새와율법학자들에대한예수의질타는그들이유대교의지도자로서
‘위선자들’이었기때문이다.
우선그들은자기들이가르치는율법에대해실천이없었다.
행함이없었던것이다.
솔선수범하지못하는종교지도자는그가르침이아무리현란하다해도위선인것이다.
말과행실이일치하지못하면내용적으로권위가생길수없다.
종교의모든가르침은’강제’가없다.
때문에종교지도자들의솔선수범은그자체가교인들의본(本)이돼야하는것이다.
모세의자리에는앉았지만,그들은위선자들이었다.

그들의권위주의,형식주의,율법주의는율법을더무겁게해서사람들의어깨에
올려놓고전혀어떤도움도주지않았다.
본문에서’멍에’는유대인들이율법을가리킬때쓰는용어다.
크고작은613개의율법은그자체로도무거운것이지만교조적인틀이될때
‘무거운멍에’가되어사람들을짓누르는것이다.
종교가그가르침에서’교리-敎理’을앞세우면그게바로멍에다.
자기들은지키지도않는율법-멍에를사람들에게지우는위선이비판받은것이다.
마태11:30에보면,
‘내멍에는편하고내짐은가볍다’는주님의말씀이있다.
율법처럼무겁고어려운것이아닌,누구가쉽게알아들을수있는가르침을이르는
말씀이다.

다음이그들의’과시욕-誇示慾’이다.
실제보다크게나타내자랑해보이는것이다.
유대인들은경문-성구를적어넣은작은상자를가죽끈에연결,이마와왼팔에묶고
기도한다.
지금도예루살렘의’통곡의벽’에가면같은모습을볼수있다.
형식은중요한것이지만’내용’이빠지면위선이되는것이고그게’자기과시’로
이어지면악과죄가되는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이빠지기쉬운가장큰유혹이’자기과시’이기도하다.
세(勢)를나타내보여자기를돋보이려는함정은의외로크고깊다.
내용이빈약할수록형식을찾게되고그게정착되면변질이일어나는것이다.

그들은잔치에가면상석을차지하려하고회당에서는상좌에만앉으려고한다.
언제나,누구에게나대접받기만을원하지그누구도대접하는일이없다.
상석과상좌는교만의상징이다.
신앙적인겸손이들어설자리가없는것이다.
예수가자기제자들에게오히려말석을권한것은그게종교지도자들의본연의자세
이며처신이기때문이었다.

그들은사람들이많이모이는시장에서인사받는것과,
‘랍비-선생님’이라고불리기를원했다.
원문에는’랍비여,랍비여’로되어있으며랍비를두번반복하는것은관행적으로
존경의표시였다.
이는군림하는자세이며복종을요구하는종교적독선이다.
종교지도자가’군림’하는자리에있으면교인들과의진솔한소통은기대하기어렵다.
권위주의라는벽은생각보다크고두껍다.
자격도없으면서’랍비’라불리기를원하는것은속이비어있으면겉을더화려하게
꾸미려는욕망때문이다.
정말무서운위선이아닐수없다.

구역을보면,
‘화(禍)있을찐저외식하는서기관들과바리새인들이여’로되어있으며
공동번역은’율법학자들과바리사이파사람들아너희같은위선자들은화를입을것이다’
로되어있다.
화(禍)는재앙이나위해를말한다.
그러나원문의우아이-Uai는,
‘너희가얼마나큰고난을겪게될지’
‘너희에게얼마나끔찍한고난이닥쳐올지’라는헬라어식표현이다.
그들의앞날에대한저주가아닌’탄식’인것이다.
그들은사람들이천국에들어갈수있도록가르칠의무를가지고있으면서도잘못
가르쳐자신들도들어가지못하고다른사람들도들어가지못하게하고있다.
‘천국문의열쇠’가베드로에게주어진이유가그러하다.
유대교를극복하는초대교회의완강한신학이엿보이는대목이다.
비로서처음의교회가그뿌리에서유대교와분리되는,중요한부분이다.
예나지금이나종교지도자들의위선은그내용에서크게차이가나는것은아니다.

18%의신뢰도로는그게어떤종교라도세상의빛과소금이될수는없다.
사회의향도(嚮導),길라잡이가될수없는것이다.
정말한국의개신교는’기독교’본래의자리로복귀할수있을까.
그러기에는너무멀리떨어져나온것이아닐까.
본말이전도된지가오래되어복원력을잃어버렸을수도있다.
우선,
‘양적성장-팽창’을멈추어야한다.
그건아무리높이쌓아올려도’새바벨탑’일뿐이다.
이제는’성숙’해져야한다.
성숙(成熟)이무엇인가.
잘자라서익은것이다.
몸도마음도자라나서어른스러워지는것이다.
그러기위해서는’종교지도자들’이먼저회개하고변해야한다.
질타의대상에서벗어나야한다.
성장의목표를버리고성숙을새목표로정해야한다.
그게양-量을버리고질-質을찾는일이다.
무엇보다먼저’가난한교회’가되지않으면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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