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을 받은자.
한인간이종교를가진다는것은그일상에서’다르게살겠다’는심오한결단이다.
그이유는설명이가능한부분도있고,설명이불가능한대단히신비한부분도있다.
그래서신앙의세계는깨달음의세계인것이다.
그러나그결단은반드시눈에보이는’변화’를동반하게된다.
그래야진정한결단이될수있다.
종교에따라그변화를부르는명칭은서로다르다.
신간과공간의환경에서차이가있었기때문이다.
지역에따라그언어-말이서로다른것과마찬가지다.
하지만’다르게살겠다’는결단의내용은그심층적인면에서같다고말할수있다.
가치관의변화가그것이다.
그정도는’황금이돌로보이는’수준까지이를수있다.
성경은그변화를metanoia라고부른다.
메타노이아의일차적인의미는전향(轉向)이다.
지금까지가던방향을180도바꿨다는뜻이다.

참으로오래동안,
제도교회는그’메타노이아’를회개(悔改)로만가르쳤고,
예수를믿으면서도끝까지죄인으로남아야하는모순과한계를드러냈다.
전향,즉그방향을바꾼사람은가는길이전과는다르기때문에그일상이달라질수
밖에없고또달라져야한다.
종교용어로는’거듭난다’는게그것이다.
옛사람은죽고새사람으로다시태어났다고도말한다.
문제는종교를가진이후,즉신앙생활을시작한이후,그근본에서달라진사람이
있는가하면옛사람그대로인경우도허다하다는사실이다.
이차이는처음교회때부터있어왔으며지금은물론,앞으로도계속나타나는지속적
현실이다.
한쪽이부르심을받았다면다른한쪽은자기가종교를선택한차이가그대답이될수있다.
이러한차이에대한극단적인신학이’예정론’이다.

바울은자기가가지고있던세속적인자랑을명료하게요약했다.
이스라엘백성으로베냐민지파에서태어났고,
난지여르레만에할례를받은것은물론,
히브리사람중에히브리사람이며율법의분류로는바리새파사람이고,
열성으로는교회를핍박했다.
율법을지키는일로올바른사람으로인정받는다면조금도흠이없다.(빌립보3장)
바울의이고백은,
그가베냐민지파의사울이었을때가지고있던세속적자부심과교만의바탕이었다.
여기에더해,
그는다이스포라부모를따라소아시아(터키)의타르소스(다소)에서태어나일찍부터
그리스문화속에서성장했고,
예루살렘으로유학,가말리엘문하에서최고의율법교육을받은당시의엘리트였으며
지중해시대의’로마시민권자’이기도했다.
그가십자가형이아닌참수를당한것은로마시민이기때문에고통을면제받은것이다.
본래의이름사울(큰자)에서바울(작은자)이된것은인간적인자랑과유라한조건들을
스스로포기했기때문이다.
그는자기의모든인간적인장점들과조건들을’그리스도’를얻기위해배설물처럼
버렸다고적고있다.

바울은유대,그리스,로마의정신과문화를이해하고공부한엘리트다.
그가고린도교회에보낸편지에서강조하는내용중에는한인간이’종교-신앙’을
가지는조건에대해결정적으로중요한단서가포함돼있다.
고린도전서1장18-23절에서,
유대인은기적을요구하고십자가를비위에거슬린다고생각했으며,
그리스인들은지혜를찾고십자가를어리석은것으로보았지만,
‘세상은-인간은그지혜로는하나님을알수없다’고단정한다.
26-31절에서바울은,
인간적으로내세울것이하나도없는,아무것도아닌사람들이하나님의택함을
받았다고설명한다.
특히24절에서는,
하나님의부르심을받은자가아니면십자가와그리스도를알수없다고말한다.
21절에서,
‘세상이자기지혜로는하나님을알수없으며이는하나님의경륜’이라고쓰고있다.

바울의주장을기준한다면,
크리스챤은크게두부류로구분할수있다.
그하나는’다르게살기’로결단한사람들이며,
다른한부류는종교를이기적’수단’으로선택한사람들이다.
여기에는그시작은순수했지만증간에변질된자들도포함된다.
시대에따라이비율은차이가있었지만분류자체는언제나상존하는현실이다.
극단적으로표현한다면전자가’부르심을받은자’라면후자는자기의이기적인이유로
종교를’선택’한사람들이다.
비슷해보이는표현같지만그본질적차이는실제의신앙생활에서확연하게구분된다.
부르심을받은대표적인사례의하나가바로사도바울이다.

그가그리스도와조우한것은다메섹으로가는길에서였다.
그리스도의몸된교회를핍박하기위해나선바리새인이’부르심’을받은것이다.
그만남은,
너무나극적인것이었고확실한것이어서그가남긴기록만으로도충분히뒷뱓침
되고있다.
사울은바울로metanoia했고바뀐방향은유대교를떠나그리스도인이된것이다.
뿐만아니라사실상기독교를창시하는영적노력으로결국은자기의한목숨을
그리스도에게바쳤다.

부르심을받은사람은,
반드시전향-메타노이아하며,
그가치관이완전히달라진다.
이기적인인간이이타적인간이되며,
오늘에살지만내일에속한자녀가된다.
성경은이들을’빛의자녀’라고부른다.
자기를태워촛불이되며,스스로녹아없어지는소금이된다.
가루서말속에들어가전체를부풀리는누룩이되며,
땅에심겨져스스로를희생,많은열매를맺는기능이된다.

더중요한것은,
이모든긍정적기능을감당하되’말’이없는것이다.
정말오른손이하는일을왼손이모르는수준이다.
그렇게할수있는이유는,
사람이아니라하나님이갚아주실것을믿기때문이다.
알려지는것을오히려거부하고숨기는일은보통인간으로서는어렵다.
그건너무나큰유혹이기때문이다.
그러나부르심을받은사람은자기가아닌하나님의도움으로그것을극복하수있다.
그게신앙생활이다.
그게다르게살려는결단의결과다.

스스로종교를선택한사람은,
그이기적인동기때문에’이타적존재’는될수가없다.
종교가자기를위한’수단’이기때문에그신앙내용이변질되는것은필연적인귀결이다.
대표적인것이기복신앙(祈福信仰)이다.
내가원하는복을받기위해서라면그게미신적인것이되어도상관이없다.
본래우리의종교적바탕이샤머니즘인것도맥락을같이하는요소가된다.
다른하나의파생현상은광신(狂信)이다.
특히대인관계에서상처받은사람들이빠지는함정이기도하다.
기독교신앙이라는형식을빌어무당이굿을하듯판을벌이는것이다.
일부심령대부흥회와기독교무당은같은뿌리에서나온서로다른모습이다.
우리앞에나타났던사이비와이단들의종말적집회들이이카테고리에속하는대표적인
변질이다.
최근에는영상과매스컴을이용,사람들을현혹하는수준으로까지발전하고있다.

성경에서사용하고있는교회라는단어는
에클레시아-ekklesia,
‘부르심을받은사람들-무리’라는뜻이다.
그렇다면누가부르심을받았는가.
바울의고백이그설명이다.
인간적으로자랑할것이없는,아무것도아닌자가선택받았다.
바울은스스로아무것도아닌자가되기위해세속적인조건들을쓰레기처럼버렸다고
했다.
유대인과그리스인이부르심을받지못한것은자랑스러운자기들의인간적조건들을
끝까지고집했기때문이다.
그렇다면왜아무것도아닌자가부르심을받는것인가.
‘세상이자기지혜로는하나님을알수없기때문’이다.
먼저비어있는그릇-자기가되라는뜻이다.
하나님께서는비어있는,깨끗한그릇에만부르심이라는’내용’을담으시는분이라는
설명이다.

나는’부르심을받은자’인가.
아니면세상의지혜로하나님을알수있다고생각하는’버려진자’인가.
이차이를본질적으로이해하고,알고있다면이미부르심을받은사람이다.
그러나그게무슨소린지조차모르고있다면확실하게’버려진자’다.
바울이자기의신앙적체험을통해고린도교인들에게전하려고했던말씀이
바로그내용이다.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