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인간인데한쪽은주인이고다른쪽은물화(物化)된물건으로서주인의소유가
되어사고팔수있는것은물론,죽일수도있었으며반대로해방시킬수도있었다.
고조선의8조금법에,
‘도둑질한자는가노(家奴),여자는비(婢)로삼는다’는기록이있는것을보면이미
그때부터노비-노예가있었으며이노비제는조선시대까지존속해오다가1894년
고종31년에공사노비제(公私奴婢制)를폐지함으로서없어졌다.
서양의경우,고대사회자체가’노예’를다수가지고있었으며전쟁포로나채무노예가
가장많았다.
그리스-로마사회의노예제는체계적이었으며특히농원에서는집단적인혹사로
대규모노예반란이일어나기도했다.
서양봉건사회의농노(農奴)도마찬가지였다.
신약성경의누가복음과사도행전을기록한누가는,
바울의증언에의하면’의사’였다.
그당시의사는노예가하는일이었기에누가가본래노예였다는것은사실일것이다.
그가사도바울과함께선교사역에참여했다는것은주인에예속된노예가아니라
‘해방노예’임을알수있는근거가되며,
누가라는이름과함께누가복음과사도행전의기록된문장으로보아헬라인임을알수
있다.
번역성경으로는그차이를알수없지만고전그리스어-헬라어로쓰여진신약성경을
읽어보면상대적으로누가의미려한문장이가지는수준을알수있다.
아무리헬라어에능숙한유대인이라해도그것은외국어인것이다.
따라서차이가날수밖에없으며신약의어떤책들은읽기가힘들정도로문장력이떨어
지는것도있다.
흡사중학생과대학생의차이로이해하면될것이다.
동화보다더아름다운,수많은어린이들의가슴을설레이게하는’베들레헴탄생기사’를
쓴누가는상상력이풍부한노예였음이분명하다.
나사렛예수는,
지금신약복음서에남아있는모든가르침과말씀을통해’노예제도’를비판한일이없다.
60개가넘는놀라운예화중에는’주인과종’에대한것도상당수있다.
그분께서는’노예제도’를당연한것으로받아들인당시의사람이었다.
이점은바울도마찬가지다.
우리가성경말씀을제대로읽고,그뜻을올바르게깨닫기위해서는이런사실에대해
정직해야하고,인간예수가살았던그당시에대한공부와이해가있어야한다.
그시대를알면,성경은훨씬더가까이다가온다.
그리고그심오한내용의’근거’들에대해폭넓은이해를할수있다.
많은사람들이성경을뜻이아닌글자로읽고,교의-교리의울타리에갇히는것은그
시야가좁고안목이편협하기때문이다.
기독교의기복화,미신화,광신이여기에서시작된다.
그래서우리들은그분께서살았던당시에대해관심을집중하고공부하면서크고넓은
깨달음의세계로들어가야한다.
‘가이사아구스도’.
이명칭은예수당시를이해할수있는중요한키워드다.
예수는’가이사아구스도’가세상을다스리던그레꼬-로망의시대를살았던역사적인
인물이기에더그렇다.
그분께서살았던시대를알면그만큼더그분에게가까이갈수있다.
인간예수를이해하면그의가르치심을더깊이깨달을수있고급기야는그분을
‘하나님의아들’이라고고백할수있는것이다.
처음그분은요셉과마리아가정의맏이로태어난사람이었기때문이다.
누가복음2장1-2절에보면,
‘이때에가이사아구스도가영을내려천하로다호적하라하였으니이호적은
구레뇨가수리아총독되었을때에첫번한것이라’는기록이있다.(개역)
로마황제아우구스토스가호구조사령을내린것은기원후6-7년이었다.
당시팔레스타인(유대땅)은시리아관구에속해있었으며총독은퀴리노였다.
우선은’가이사’라는명칭부터살펴보자.
가이사는’케사르-Caesar이며,
영어로는’씨저’라고읽는다.
황제를뜻하는독일어카이저-Kaiser와러시아어차르-Tzar는모두Caesar에서
유래한단어들이다.
Caesar는기원전3세기이후가장유명한로마의명문가문으로서특히출중했던
인물이우리가잘알고있는’케사르가이우스줄리어스-CaesarGaiusJulius.BC
100-44’였다.
보통’줄리어스씨저’라고불리는인물이다.
기원전60년폼페이우스,크랏수스와함께제1차삼두정치를시작한다.
59년,집정관에취임한후야만족이침입한갈리아원정에나섰으며유명한’갈리아
전투기’는이때쓴것이다.
그내용중충격적인것은로마군에잡힌포로들은모두가팔을절단당한다.
로마군을향해창을던지고칼을휘둘렀기때문이다.
씨저의연전연승에질투가생긴폼페이우스는원로원과결탁,그의소환령을내리게
된다.
기원전49년,줄리어스씨저는금기를어기고군부대를이끌고루비콘강을건어
반란군이되었으며다음해파르살로스에서폼페이우스군과결전,대승을거둔다.
패장을추격,이집트까지간씨저는여왕클레오파트라를만나애인이된바있으며
기원전44년,종신독재관으로임명된그는공화제를위협한다는이유로암살되었다.
이후이유명한가문의이름’케사르-Caesar’는모든로마황제에게붙여지는칭호가
되었다.
‘가이사아구스도-케사르아우구스티누스’도그한예로서,
‘로마황제아구스도’라는뜻이다.
예수께서로마통치시대에출생했다는가장확실한증거가되는것이다.
다음은’아구스도’.
아구스도-Augustus는기원전63년에서주후14년까지살았으며,
그의정식명칭은,
‘가이우스율리우스카이사르옥타비아누스-GaiusJuliusCaesarOctavianus’다.
기원전45년9월,
줄리어스씨저는조카딸의아들인옥타비아누스를양자로삼았으며자신의후계자로
양육한다.
이옥타비아누스가아우구스투스가된경위는그이야기를마케도니아에서시작해야
풀려나간다.
마케도니아의왕필립2세에게는출중한아들이있었다.
14살된아들알렉산더를위해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384-322)를가정교사로초빙한다.
그는플라톤의제자였으며플라톤은소크라테스에게불후의명성을안겨준인물이다.
역사상가장반동적인가정교사아리스토텔레스는2년동안알렉산더를가르치며
‘하늘이정해준지도자의식’을강하게주입시켰으며,
그리스인들에게는지도자로서그들을친구나친족처럼대하되야만족은짐승과초목
처럼다루라는충고를서슴치않았다.
알렉산더는18세나이에카이로네이아전투에나가좌익기병대지휘관으로큰공을
세운다.
그는부왕필립2세가암살된뒤,이반한그리스각도시를진압했으며,
기원전334년마케도니아-그리스연합군을지휘,페르시아원정을시작한다.
이어이수스전투에서승리,페니키아의각도시를점령했으며이집트로진격,
알렉산드리아를건설한다.
기원전331년에는가우가멜라에서페르시아군을격파했으며아프카니스탄에서인더스
강으로동진했으나전염병때문에인도정복계획을중지하고’수사’로귀환한다.
기원전323년아라비아원정직전바빌론에서급사했다.
알렉산더사후,
그가정복한드넓은영토에서는세개의왕국이일어난다.
마케도니아왕국이그하나이며,
두번째는그의부관이었던셀레우코스가바빌로니아정복을시작으로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까지세력을확대,왕국의지배권을수도인안티오키아에서페르시아만동단
까지확장했다.
세번째가그의막역한친구이자,군인,역사가인프톨레마이오스가기원전305년
이집트에서일으킨프톨레마이오스왕조다.
클라오파트라7세가이왕조의마지막여왕이었으며그녀는옥타비아누스가아구스도가
되는요인중하나가된다.
줄리어스씨저가암살된후,
그의후계자인옥타비아누스는안토니우스,레파투스와함께제2기삼두정치체제를
결성했으며씨저를암살한브루투스일파를격퇴했다.
합의에의해레파투스가빠지게됐고,
제국의서방은옥타비아누스가,동방은안토니우스가지배하게되었다.
한편,
이집트의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통치자대부분이친누이나이복누이,또는조카와
결혼했다.
기원전47년,프톨레마이오스14세도스물한살의누이클레오파트라와결혼했다.
결국동생을독살한누이는클레오파트라7세로여왕이되었지만불안한정치적입장
때문에로마의절대적인보호가절실했다.
기원전41년,여왕은제국동방의지배자안토니우스를만나기위해소아시아의
타루수스(바울이태어난다소)까지오게된다.
아름다운보라빛돛과황금색의배를보기위해타루수스의시민들은모두해변에
나왔었다고한다.
나는이곳타루수스-다소에갔을때여왕의방문을기념해그곳에세워진
‘클레오파트라의문’부터찾아가봤다.
자그마한아치형의그구축물은유감스럽게도상단귀퉁이가많이허물어져있었다.
터키정부는그렇게무심했다.
안토니우스는클라오파트라에게매혹되었으며,알렉산드리아로의초청을기꺼이수락,
결국은애인사이가된다.
문제가터진것은,
안토니우스를뒤에서조정하는클라오파트라에대한옥타비아누스의분노가커져갔고,
기원전32년안토니우스가누이동생인옥타비아와이혼을선언하자폭발했다.
그는즉시이집트에대해선전을포고했고,안토니우스와클레오파트라의연합군과
옥타비아누스의군대는기원전31년9월,이오니아의악티움앞바다에서격돌했다.
유명한’악티움해전’이그것이다.
이해전에서옥타비아누스는결정적인승리를거우었으며그여세를몰아알렉산드리아에
입성,이집트를자기의사유재산으로선언했다.
먼저안토니우스가자결했으며,이어클레오파트라가자결함으로서275년간의
마케도니아왕조의이집트지배가막을내렸다.
이제명실상부한로마의제1인자는옥타비아누수다.
기원전27년,원로원은신격(神格),신성(神性)의의미인’아우구스투스’라는존칭을
그에게부여했으며이는로마공화정이끝나고제정(帝政)이시작되는순간이기도했다.
그는사후황제가신격화되는최초의인물이기도했다.
그후200년간을’PAXROMANA-ROMANPEACE-로마의평화’라고부른다.
로마의압도적인힘이국지분쟁을막았기때문이다.
오늘날줄리어스는July로,아구스도는August로각각그이름이달력에남아있다.
‘가이사아구스도’는,
위대한로마황제의이름이다.
로마의통치자들은시리아관구에속해있는작은땅팔레스타인을주목하지않았다.
골치아픈유대인의땅은기피의대상이었다.
나사렛은더더구나보잘것없는변방이었다.
그러나그들은,
그곳에서로마제국은물론,전세계를정복한위대한이름이나타날줄은꿈에도생각하지
못했다.